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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마인드 맵을 하나 그려 보면 예수의 죽으심 즉 떠나심을 왜 이렇게 긴 말씀을 하시는가 할 때 핵심은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위한다’ 왜 위하는가? 다시 질문을 한다면 제자의 관계를 넘어 사랑의 관계로 설정하셨고 사랑의 관계는 먼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시작되어 우리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처음부터 요한복음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선언하며 시작하는 것이죠.
혹시 여러분이 이런 자녀와 사랑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싶다면 눅 15장의 3가지 비유인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비유에서 소위 말하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현실적으로 제자들은 남겨집니다. 남겨진다는 의미는 현실적으로 미워함을 당하고 결국 출교까지 당하게 됩니다. 현실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보편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앞둔 인간은 남겨질 이들을 걱정하고 이를 준비합니다. 최근 어떤 한국 영화에 현실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일자리보다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이/ 이를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들은 자식을 위해 이러 저러한 것도 해준다는데 해준게 뭐 있어 차라리 보험이라도 들고 죽어서 보험금을 타면 내가 알아서 잘할게’ 라고 악에 처받쳐 막말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어 아버지는 보험을 들고 자살을 했지만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보험사는 자살의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말에 오히려 아들은 죽은 아버지보다 현실에 더 깊이 빡쳐합니다.
깊은 좌절은 인간이 갖는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보호를 받아야 하고, 아니 보호의 그늘조차 깨닫지 못해 이런 식의 영화가 시청자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지만 사실 현실은 더 지독한 것을 뉴스에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지나며 이제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다시 다윗 왕의 시대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거침없이 로마의 통제를 아랑곳 하지 않고 환호를 하는 상황이지만 지금 예수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를 눈치 챈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고 팔기 위해 유대 지도자들에게 지금 가는 상황이고, 베드로 조차도 예수로부터 배신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한치 앞에서 일어나는 일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현실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라를 잃은 우리의 상황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여전히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라는 말씀이 ‘그래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며 성령님의 함께 하심으로 여기까지 인도 함을 받았다고 고백하실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받을 때나 지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있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뭐지’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성령께서 안 보이시는데, 내주 하신다고 하셨지만 내 속, 내 마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아닌걸 맞다고 할 수 있나요? 네 한편으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통해 경험하고 그리고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등장인물처럼 기쁨, 슬픔, 분노 그리고 까칠함이나 소심함등 다양한 감정을 통해서 경험한 것을 우리의 기억 속에 쌓는 과정을 갖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말 그대로 ‘기억나게’하려고 하신다는 말씀 말이죠. 왜 ‘기억’인가 하면 인간 존재가 오감과 다양한 감정을 통해 우리 속 기억이라는 공간에 쌓아 그 기억으로 우리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죠. 기억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의미’를 부여해서 기억이라는 공간에 배치합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것,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계신다는 것은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길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이면서도 많은 사람은 이 방법대로 서기도 하고 절망하고 실족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https://www.tiktok.com/@mbc14f/video/7090469697216466177?q=%EC%82%B4%EC%9D%B8%EC%9E%90%20%EC%9D%B4%EC%9D%80%ED%95%B4&t=1726795169412
https://www.youtube.com/watch?v=wcKjLmbWfPQ (6:14
https://www.tiktok.com/@kristinhicks200/video/7415735964896709920?_r=1&_t=8pp9bf2XK4G
과거의 현실이 안좋다고 해서 결과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라는 학계의 연구는 이미 나온지 오래입니다. 반대로 현실이 좋다고 해서 미래도 좋은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탓을 안 할 수는 없다고 해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런 환경 속에서 올바름이 무엇이며 어떻게 자신의 길을 가야하는 가에 대한 ‘그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감과 다양한 감정과 뒤썩이며 옳고 그름의 기준을 통과해 어떻게 기억되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좀 혼냈더라면, 그때 마음이 상하더라도 따금하게 야단을 쳤더라면 하는 말도 있는가 하면 그때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할 걸,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 할 걸 하면서 서로 반대가 되는 말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나고 나서 하는 이런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이 각자에게 일어날 때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러면서 자기 속에 어떤 포장지로 싸서 넣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아십니다. 그래서 때론 심하게 야단도 칩니다. 베드로에게 넌 나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빌립에게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었는데도 넌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범죄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어게는 ‘너를 정죄하던 이들이 어디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 돌아가서 범죄하지 말아라’고 즉 우리를 알기 때문에 각자의 맞춤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께서 성령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그가 하시는 일은 ‘죄’, ‘의’, ‘심판’에 대한 기준을 갖고 계시고 이것으로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표현된 문구를 보십시오.
1)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요한은 선포로 시작해 기적과 함께 직접 하신 말씀들을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묻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받아 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모든 것입니다. 2) 그러니 ‘의’롭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알 수 있습니까? 과거를 통해 자신이 결정했던 일, 부모로 인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일 또는 주변을 살펴 친구가 이런 결정이 옳다고 했던 결정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행동은 즉 아버지의 구원사역과 연결된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옳음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통을 당하던 욥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를 죽여 보십시오 그러면 당당히 당신 앞에서 저의 무죄를 밝힐 것이고 저의 삶을 인정하실 것이고 그래서 마치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금과 같이 정결한 가장 의로운 상태로 인정받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욥기 40:1–2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다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계속해서 8절에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더어 씌우려느냐’ 그렇게 하시면서 이어진 41절까지 하신 일들을 열거합니다.
여러분 때론 우리가 따지고 싶은 건 전부가 아니라 이번에 혼난 일, 지금 이건 내 잘못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억울함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 마치 신호등을 잘 지키고 안전밸트를 잘 맨다고 해서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로 그 사람을 모른 채 전체를 보듯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고 하면서 비난을 퍼붓는 행동 깊은 곳에 숨은 우리의 ‘의로움’을 돋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아버지께로 가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길을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멈추고 내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자만’이 숨어서 우리를 위험한 길로 이끌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실족’이 두려움으로 인함이기는 하지만 극도의 두려움은 오히려 우리를 마땅히 해야할 도전을 멈추게 하고 가야할 길을 구부러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하듯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2. 왜 보혜사가 필요합니까? 왜냐하면 11절에 ‘이 세상 임금’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위험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악이라는 표현을 마치 숫자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악을 100정도 사용하면 매우 나쁘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1을 사용하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단 횡단을 한다거나 신호 위반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누구나도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보다 높은 10을 사용해도 100처럼 대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래도 90은 아직 남은 선함처럼 말하지만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 한 사람을 죽이는데 100이 들고 100명의 사람이 1을 사용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세상 임금은 괜찮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모두나 나눠진 조금씩의 ‘악’을 허용하는 세상에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때론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작은 ‘1’ 또는 ‘10’을 저지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는 정당한 잘못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지만 오히려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는 논리로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말씀드린 것이죠. 누가 이런 세상 임금을 심판 할 수 있습니까?
3) 우리는 그래서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는 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행하려 하는 어떤 일들이 혹시 ‘1’ 또는 ‘10’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잘못된 것을 당연하듯 말해서 안되며 그런 일들에 참여해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감과 감정이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 기억의 창고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필터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령께서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앞서 기억은 의미를 담아서 저장한다고 했습니다. 의미를 담지 않는 것은 지식에 불과하고 학교에서 외워 암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7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환경과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생각을 좀 먹고 자리 잡으려 해도 성령께서 우리를 올바른 위치를 잡도록 흔든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29:17 “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우리 스스로가 성령께 마음을 열어 살펴 보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보다 먼저 예수께서 성령을 소개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때 우리는 의지하고 우리의 보물 창고를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께서 직접 전해 주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성령께서 죄, 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진리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어떤 과학적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온전한 방향을 올바로 깨닫게 하시는데 사용하는 구체적인 것이 ‘죄, 의. 심판’으로 하신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이자 이것이 ‘실족’하려는 제자들을 올바로 세우신다는 의미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가끔 자녀들에게 너희도 부모가 되면 알게 된다는 자녀 입장에서는 뜻 모를 소리를 합니다. 마치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오 오면 다 알게 될 것이고 그때는 묻고 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23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진실로’ 두 번이나 나오는 의미가 이 말씀의 완전함을 보장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하는 말씀은 자녀가 무엇을 쓸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쓰임새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에 주는 것에 있어서 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말을 갖 때고 칼을 요구하면 어느 부모가 칼을 주겠습니까? 그러나 칼의 용도를 알고 쓰임새를 분명하게 안다면 당연히 주는 것이 마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듯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다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서로의 거리낌이 없이 대화하고 이런 대화에 오해 없는 대화를 할 수만 있어도 행복지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부모와 자녀가 아니라 친구 사이 또는 연인 사이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아무튼 그럴 때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렇게 된다면 ‘기쁨을 만끽’할 것입니다. 24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며 성령께서 남겨질 제자들이 예수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이길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승리했지만 증인이 될 제자들은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의 승리는 제자들의 승리 였지만 제자들 역시 싸움의 현장에서 이긴 것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세상과 더불어 싸울 때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기쁨’으로 싸움을 감당하며 이기게 될 것입니다. 27절에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으므로’입니다. ‘믿었다’는 능동태적 표현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감으로 우리의 감정으로 즉 ‘전인격’적인 면으로 받아 들여 스스로 기억의 창고에서 언제든 꺼내어 볼 상태로 새겨 진다는 것입니다.
가끔 치매의 상태에서 ‘기억에 새겨진’ 어떤 말, 행동들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하죠. 그럴 때 당사자는 몰라도 듣는 이들은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또 의미를 알아 차릴 땐 여지 없이 눈물을 터뜨리며 깊은 공감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이렇게 될 거니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준비나 뭔가 숨겨든 비밀을 전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믿는’ 즉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너희들을 ‘역시 사랑한다’ 어떻게 27절에 ‘친히’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이렇게 서술함으로 사랑의 구체적인 의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모가 ‘친히’ 사랑했다. 하면 솔직히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친히’ 써 주었다 하면 아마도 몇날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이야 아들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그럼에도 ‘친히’라는 건 내가 말해서, 내가 중간에서 말해줘서를 띄어 넘어서 ‘아버지께서 친히’ 움직이신다는 엄청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죠.
제자들은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그리로 이어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고백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변화이자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방향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부와 권력의 길이야 말로 최고라고 말하면서 마치 영화의 악당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래서 너도 우리의 범죄에 동참해라고 꼬시는 것입니다. ‘운전만 하면 된다’ , ‘이 가방을 저기에 가져다 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 주면에 보이스 피싱도 나쁘지만 거기에 당한 사람들이 자진해서 운반책이 되어 손해 본 것만 해결하면 빠져 나올것처럼 말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네가 한 일을 고발하겠다’, ‘이미 너는 우리와 한 편이다’, ‘너도 같이 먹었지 않느냐’하는 말은 그저 영화의 대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일상처럼 일어나는 일이자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지뢰밭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는 것은 더 지혜롭고 많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관계’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와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의 사랑은 한계를 가집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은 그보다는 났지만 그럼에도 죽음 앞에서는 역시 한계를 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것도 ‘친히’ 말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로마서 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사랑의 놀라운 행동이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도 지겹게 1년 넘게 살펴보고 있는 요한의 기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