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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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거나 너무 폭이 좁은 생각만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시는 분이지만 풍요롭게 하시는 분으로만 생각하면 문제가 있고
병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이시지만 또 거기에만 생각을 좁히면 안됩니다.
내 마음과 계획 안에 가두는 것은 “우상”입니다. 출애굽 때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익숙하여, 모세가 십계명 말씀을 받고 있는 순간에도 “황금 송아지” 모양의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우상이 아니라 황금 송아지로 여호와를 섬겼다는 점 말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더 세게 강화할 때도 없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 건설에 그저 조금 도움을 주셨으면 할 때가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1. 사람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질문
1. 사람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질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8장 28-35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오랜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이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와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고,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다른 나라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야심찬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단순히 일반 대중들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언젠가는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라 기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단순한 호기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가진 잘못된 기대를 바로잡기 위한 의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너희들은 바로 이해하고 믿고 있느냐, 진정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냐를 확인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해가 얼마나 깊은지를 확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2. 베드로의 고백과 그 한계
2. 베드로의 고백과 그 한계
예수님의 이 중대한 질문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대답은 얼핏 보면 완벽해 보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고백을 듣고 기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예수님이 기대하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의미는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던 '그리스도'는 여전히 세속적인 성공과 영광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가장 넓게 보아도 유대인에게 제한된 그러한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단순히 올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의 깊은 의미, 즉 고난받는 메시야, 십자가를 지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를 넘어서, 모든 사람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 역사를 품지는 못했던 겁니다.
3. 바른 믿음이 열어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
3. 바른 믿음이 열어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
베드로의 고백 이후, 본문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제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죠. 31절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비로소"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시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그 순간부터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의 본질, 즉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좀 알아들을만 하니까, 핵심 가르침을 시작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최소한의 올바른 인식, 즉 자신이 메시야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후에야 더 깊은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바른 믿음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분의 고난의 의미와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엉뚱하게 생각하고 잘 모르면 고난의 의미, 신비를 알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당장 편한게 좋지, 누가 힘들고 어려움을 거치는게 좋겠습니까? 현대 우리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를 아는 것이 바른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적용점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만만한 길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이미 가셨고 승리하셨고, 지금도 도우시기에 우리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4. 자기 생각에 갇힌 베드로의 항변
4. 자기 생각에 갇힌 베드로의 항변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도 또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항변하다'로 번역된 단어는'꾸짖다'라는 강한 의미를 가집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니 강하게 저항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기에 강하게 반발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영광스러운 메시야, 정치적 해방자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래서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질 때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높은 길과 방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야말로 "사단"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저항하고 가로 막으니 사단이지요.
사람의 일, 즉 우리의 욕심으로 하나님을 끌어들이려 하면 우리는 이런 위험한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 실수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욕망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까?
이는 우리가 늘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이해,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과연 성경적인지, 아니면 우리의 욕심에 의해 왜곡된 것은 아닌지 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 겸손히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궤도 수정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5. 십자가의 길: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삶
5. 십자가의 길: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는 삶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를 불러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절)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자신의 전체적인 삶의 방향과 목적을 예수님께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소욕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고난을 넘어 영광을 보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나님 나라는 나만 바라보던 것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또한 구체적으로는 나와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잠깐 만나 도움을 얻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 등을 돌리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전 삶을 그분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35절의 말씀은 이러한 삶의 역설적인 승리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는 우리의 생명을 넘어선 사랑, 즉 예수 사랑,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우리의 안전과 편안함만을 추구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생명, 풍성한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을 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릴 때, 우리는 오히려 더 큰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깊이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전 삶을 바쳐 따라야 할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심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드려질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각자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그분의 참된 모습을 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더욱 바르게 알아가고, 그분을 위해 자신을 내어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와 지역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을 따르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