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2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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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 여인과 하사엘 : 회복과 심판
수넴 여인과 하사엘 : 회복과 심판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인 우리 친구들을 환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친구들의 마음마다 크신 은혜로 부어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우리 지난주에는 추석 명절이 있었죠? 명절 다들 잘 보냈나요? 명절 기간 가족들과 함께 만나 교제하고 하면서 많은 즐거움을 누렸으리라 생각됩니다.
가족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사실 요즘에는 예전보다는 그 중요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는 하지만, 사실 중요한 일입니다. 신앙적으로도 가족이라는 것은 사람이 가장 처음 만나는 공동체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거든요.
그래서 말씀 곳곳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자녀를 지혜로 양육하라 라던지 이런 가족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들이 등장을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본인을 우리들의 부모로서도 표현을 하시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모자녀 관계라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의 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들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것이냐, 그건 아니겠죠. 우리 고3친구들은 또 중요한 일들을 앞두고 있다보니 잔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우리 하임 공동체를 만날 수 있었죠. 지난주에도 잔류자들이 모여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 중에, 가족 이외에도 허락하신 중요한 공동체,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실제 가족만큼은 아닐 수 있겠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오늘도, 함께 이 자리에서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귀한 시간, 특히 이제 입시도 얼마 남지 않았고, 중간고사도 얼마 남지 않아서 하루하루 소중한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주님께서 우리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을 이길 귀한 힘을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그럼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눌텐데요, 계속 우리는 열왕기하 말씀을 보고 있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시는 모습들을 확인하고 있는데요,
지난주에는 엘리사와 나아만, 그리고 게하시 세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믿음을 주시는 모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주요인물 두명이 등장합니다. 한명은 수넴여인이고, 두번째는 하사엘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오늘 말씀이 첫 등장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 이전에도 등장하는데, 혹시 어딘지 아는 분 계실까요?
우리 청매 큐티를 열심히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장 먼저 수넴여인은 조금 앞으로 가서 4장에 등장합니다. 엘리사가 수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에게 말씀을 통해서 아들을 낳게 하셨고, 이후에 그 아이가 죽었다가 엘리사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여인이 다시 8장에서 등장합니다. 어떤 사연이냐,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가족들과 함께 지금 있는 지역에서 떠나라고 말한 겁니다. 왜냐? 그 지역에 7년동안 기근이 임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떠나서 블레셋 땅에서 7년동안 살다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근데 당시에 소유 개념이 확실하게 있었겠어요? 7년 나갔다 돌아오니까 자기집이나 땅이나 다 난리가 난거에요. 자기 집도 누가 살고, 자기 땅도 누가 농사짓고 이랬겠죠.
그래서 그 여인이 이스라엘 왕에게 호소한겁니다. 내 집과 땅을 돌려달라고.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죠. 그러면 그 여인이 당연히 누구 이야기를 했겠어요? 엘리사 이야기를 했겠죠.
그러자 왕이 엘리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게하시를 통해 듣습니다. 팩트체크를 하는 것이죠.
게하시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사건은 시간상으로는 나아만 사건 이전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하여튼 게하시의 증언과 팩트체크를 통해서 그 집과 땅이 여인의 땅임이 증명되었고, 왕은 그대로 다 돌려 주라고 명합니다.
그렇게 첫번째 수넴여인의 이야기는 끝이 나죠.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인물, 하사엘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사엘 역시도 이번 본문이 첫 등장은 아닙니다. 어디서 등장했을까요?
이거 아시면 정말 성경 잘 아시는건데, 열왕기상에 등장합니다. 열왕기상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을 내리시는데, 그 명령에서 하사엘이 등장을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엘리야를 향한 명령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데, 첫째로는 예후, 둘째는 하사엘, 셋째는 엘리사.
첫째 예후는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고, 둘째 하사엘은 아람의 왕이 될 것이고, 셋째 엘리사는 엘리야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세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렇게 하사엘이 처음 등장하는데, 엘리야가 이들 모두에게 기름을 붓지 못하고 떠나가요. 오직 엘리사를 후계로 삼은 후에 하늘로 올라가죠.
그래서 나머지 남은 예후와 하사엘을 향해 엘리사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사는 먼저 예후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래서 예후가 반역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아합의 자손인 요람 왕과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그 예후의 손에 죽게 됩니다. 이 말씀이 바로 지난주 큐티 말씀이었죠.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하사엘이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등장하느냐, 자신이 섬기는 벤하닷 왕의 사신으로서 등장합니다. 그가 벤하닷 왕의 어떤 말을 전했냐면, 왕이 언제 낫겠는지를 묻는 것이었죠.
어? 뭔가 기시감이 들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번달 첫주에 읽었던 1장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당시 어떤 왕이었죠? 아하시야 왕이 이방 왕에게 자신이 언제 나을지를 물었고, 결국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왕은 죽게 되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아람의 벤하닷, 즉 이방의 왕이 하나님께 묻는거에요. 어쩌면 이전 아하시야 왕의 이야기나 엘리사가 행한 기적들이 널리 퍼진 덕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까닭이더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아닌 아람의 이방 왕이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제 하사엘은 왕의 명령을 듣고 엘리사를 찾습니다. 엘리사는 그 답을 전해주죠.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이게 무슨 이야긴가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벤하닷 왕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엘리사는 하사엘에게 그와 정반대의 왕이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라고 말한 겁니다.
왜 엘리사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일까요? 아마 이 말을 들은 하사엘도 마찬가지로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엘리사가 이상하게 하사엘을 계속 쳐다봅니다. 계속 쳐다보니까 하사엘이 부끄러울 정도까지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사가 우는거에요.
하사엘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죠. 그래서 왜 우십니까? 물으니 엘리사가 이렇게 답합니다. 네가 우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할 악들을 안다. 너가 그 성들에 불을 지르고, 우리의 장정들을 죽이고, 어린 아이를 메치고 임산부를 가를거야.
끔찍한 이야기죠. 하사엘은 지금까지의 상황들도 놀라운데, 엘리사가 말한 그 내용들에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이렇게 대답하죠.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뭐길래 그런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엘리사가 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아람의 왕이 될 것을 알려주셨다.
아마 하사엘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지금까지의 궁금증이 해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 엘리사가 사실과 다른 말을 전하라고 하는지, 왜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몹쓸 짓을 하는지.
그리고 하사엘은 엘리사를 떠나 왕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말한대로 왕에게 당신이 반드시 살 것입니다 라고 전하죠.
그리고 마지막 15절에 나타난 대로, 그 다음날에 이불을 물에 적셔 왕의 얼굴에 덮습니다. 질식사로 왕을 암살한 것이죠. 그리고 하사엘이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장면과 같죠. 병상에 있는 사람을 암살하고 마치 병으로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는.
이렇게 드라마 같은 장면으로 오늘의 본문은 막을 내립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두 사람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봅니다. 수넴 여인에게는 잃었던 땅과 집을 되찾게 행하셨고, 하사엘에게는 아람 나라의 왕이 되도록 행하셨습니다.
이 일들을 표면적으로만 살핀다면, 그냥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주셨구나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우리는 더 큰 것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수넴 여인을 한번 봅시다. 수넴 여인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일까요? 그리 높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엘리사를 찾아 먹을 것을 주었고, 그 믿음으로 인해 은혜를 입어 아들을 얻고, 죽었던 아들이 돌아오는 기적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그정도만 하더라도 우리는 일생에서의 은혜를 다 누렸다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죠. 은혜를 누린 이후에도 수넴 여인은 계속 엘리사를 만나 그에게 베풀었던 것 같아요. 그러한 수넴 여인에게 하나님도 동일하게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엘리사를 통해 기근을 피하도록 말씀하신 것이죠.
그런데 사실 아무리 기근에 대해 알려주었다 한들, 수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거처를 옮긴다는 것, 심지어 블레셋 사람들이라는 이방 민족의 땅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또 당시 시대가 언제에요. 고대잖아요. 그 당시에 모든 가족들이 살던 터전을 버리고 이동한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야 미리 갈 땅 봐놓고 구매해서 그곳으로 이사를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런게 있겠어요? 그냥 괜찮은 땅이 있겠거니 추측만으로 옮겨야 하는 거에요.
게다가 치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때잖아요. 가다가 강도를 만날 수도 있고, 땅에 도착을 해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지자의 말 하나를 믿고 떠나야 하는거에요. 정말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수넴 여인은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믿음을 가지고 블레셋으로 간거에요. 그렇게 그는 칠년동안 기근을 피합니다. 큰 믿음으로 은혜를 누린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또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칠년 기근이 끝나니까 수넴 여인의 가족들이 어떻게 해요? 돌아옵니다. 원래 블레셋 사람도 아니고, 원래 땅과 집이 있으니까 돌아가야겠죠.
그런데 돌아오니 어때요? 그 당시에 지금처럼 잠금장치가 있겠어요, 뭐 땅 문서로 무조건 이 사람만 살 수 있어! 이렇게 해놨겠어요? 그런게 전혀 없겠죠.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누가 들어와 있겠죠. 땅도 누군가가 사용을 하고 있겠죠. 칠년이나 아무도 없이 방치가 되어있으니까.
어쩌면 당시로서는 당연한거에요. 그런데 이 당연한게 수넴 여인 입장에서는 당연하지 않아요. 왜? 이러면 또 거할 곳이 없어지는거에요. 또 소출을 얻을 땅이 없어요. 그러면 칠년 기근 피하려고 앞으로 살 십몇년을 버리는 셈이 되어버리는 거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통해 왕이 그 모든 것들을 갚도록 결정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수넴여인은 모든 것을 다시 원상복귀 받을 수 있었죠.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믿음을 갖고 그대로 따르니까 당시의 상식을 넘어서서 역사하신다는 거에요. 당시의 상식을 따르면, 수넴 여인의 결정은 정말 엄청난 모험입니다. 하지만 그는 믿었기에, 엘리사와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에 몸을 던졌고, 믿음으로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그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살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새 한 마리조차도 아무 걱정 없이 그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데, 당연히 그의 백성들도 모든 삶을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일하심입니다. 그 일하심은 당연히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겠죠.
여러분들에게 소중하고 간절한 기도의 제목들, 당연히 다 아시구요, 심지어는 에이 이런것까지? 싶은 것들도 주님은 아시고, 그의 뜻에 맞는다면 반드시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친구들, 주님을 신뢰하고 맡기시기 바랍니다. 맡기심으로 수넴여인처럼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이 크신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이신데, 그 사랑은 또 다른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그 모습은 오늘 우리가 살펴본 또 다른 인물, 하사엘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사엘은 그저 말을 전하러 왔다가 자신을 향한 예언을 듣게 됩니다. 바로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죠.
그런데 그 예언을 전한 엘리사가 어떤 모습을 보였죠? 말을 전하고 나서 울었습니다. 엄청나게 슬퍼했어요. 왜죠? 왕이 된 하사엘에 의해 이스라엘이 큰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하사엘이 왕이 되는지에 대해 집중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하셨던 것, 하사엘을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라는 말씀은 어떤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이었을까요?
예후와 마찬가지였던 거에요.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요람 왕과 이세벨 왕을 죽인 것처럼, 하나님은 하사엘을 사용하셔서 죄악 속에 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된 이후 하사엘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로 기록이 되죠.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결국 하사엘의 존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해 택하신 도구로서 보아야겠죠.
마치 우리가 지난번 예레미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망치로서 사용하신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시냐는 것이겠죠.
방금 수넴여인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쓰시면서 살펴주셨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선지자가 울 정도로까지 혹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시느냐는 것이죠.
왜일까요? 우리 이 질문을 조금 더 발전시켜볼까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렇게 많은 전쟁과 기근과 핍박이 있느냐는거에요.
당장 지금 세상만 보아도 어때요. 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 전쟁, 수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지금도 먹지 못해 굶는 이들이 있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면 이런 일을 벌어질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시는 것인가요?
그 답은 동일하게 정리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올바른 자리에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말씀을 행하는 그러한 모습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그러지 못했죠. 지속적으로 죄의 자리에 거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방 신들을 섬기며, 말씀과는 반대되는 육체의 행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백성들을 향해 징계를 내리셔야 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이 잘못되는 모습은 더이상 볼 수 없기에, 그들이 알 수 있도록 징계를 내리셔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방 민족을 들어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엘리사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픈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일들이 있어야 백성들은 하나님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시대도 마찬가지겠죠. 세상은 지속적으로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주님의 진리를 무시한 채,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진리를 세우고, 그것을 많은 이들이 좇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가치는 중요치 않고, 순간의 즐거움, 순간의 유희들만을 쫓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여러 일들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전쟁도 있고, 전염병도 있었습니다.
특히 2년간 있었던 코로나 사태는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죠. 인간의 과학이라는 것이, 이제까지 막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인간의 진보라는 것이, 한낱 세포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일하심 앞에서 우리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작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주님은 이렇게도 일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사소한 것 하나까지 챙기시지만, 필요할 때에는 강하게 우리를 치시기도 하십니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죠? 바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모습과 마찬가지라는거에요. 자녀를 너무 사랑하니까 온 한벌, 끼니 하나 잘 챙겨주고자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기에 잘못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혼내고, 아픔을 기꺼이 주고자 한다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주님께 우리는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헌금을 많이 드려야 할까요? 뭔가 명예를 세워서 하나님을 칭송해야 할까요?
우리 어린 시절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 어릴때에는 어버이날이 되면 카네이션 막 접어서 드리고, 무슨 효도쿠폰이다라고 해서 다리 주물러 드리기, 설거지 하기 막 이런거 적어서 드리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비슷한 일들을 했을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그 행동들이 실제로 부모님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까요? 아니겠죠. 카네이션 그거 사실 처치곤란일 수도 있어요. 애들이 했는데 뭐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어졌겠어요.
그리고 효도쿠폰? 다리 주물러 드린다고 시원할까요? 설거지는 사실 안건드는게 도와드리는거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그 모든 걸 기쁘게 받으십니다. 왜요? 그 모든 행동들이 부모님들에게 뭘 전해주기 때문일까요? 사랑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은 사랑입니다. 애들이 뭐 가방 백이런거 드릴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기대도 안하실 거고. 사랑을 드리는 것이 가장 최고라는 거에요.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거 기대하시지도 않아요.
그럼 결국 뭐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들 있을겁니다. 입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물건일 수도 있고, 어떤 해내고자 하는 목표일 수 있겠죠.
그런거 놓고 기도하는 것 좋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다만 그 모든 것들 위에 여러분의 사랑이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거 있었으면 좋겠고, 저거도 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제게 가장 중요한건 주님이에요. 주님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모든 필요 다 아셔요. 당연히, 어련히 알아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든 하임 공동체가 우리 주님을, 부모님과 같이, 아니 어쩌면 부모님보다 더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우리 앞의 문제들 다 이겨내고 주님과 함께 깊은 사랑을 누리는 귀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주 사랑이 날 숨쉬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