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율법

산상수훈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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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완성이된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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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의 자격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수 많은 환경 요소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한 개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람이라는 다양한 요소들의 접촉과 충돌’은 그 개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좋은 사람 많이 만나시고, 좋은 멘토와 생각을 나누세요!” 좋은 사람에 대한 기준은 각자 어느 정도 쌓아 놓았을 것이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패스! 멘토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좋은 멘토에게는 그에 합당한 자격이 있습니다. 먼저는 경험이 풍부해야 합니다. 경험은 지식과 학문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렇기에 경험이 많은 이들과의 대화는 그 나름의 유익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 경험을 넘어서는 인사이트가 있어야 합니다. 경험의 풍부는 그 나름의 유익이 있지만, 경험만을 자랑하는 이들은 자신의 경험 세계에 함몰되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에 경험을 하나의 발판으로 삼아 그것을 넘어서는 지각, 판단,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감정을 향유해야 합니다. 감정에 있어서 주의 해야 할 것은 ‘감정을 누리는 것’과 ‘감정적’인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멘토는 감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다스리며 누리고 표현할 능력이 있습니다. 네 번째로 자기자신에 대한 메타인지가 있어야 합니다. 인지는 무언가를 알고 인정한다는 뜻이고 메타인지는 알고 인정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메타인지는 나를 제 3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3자의 시선은 생각의 함몰로부터 보호하며 더 유동적인 사고를 일으킵니다. 마지막으로 언행일치입니다. 말은 쉽지만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떠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개인적으로 좋은 멘토의 최소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사복음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은 더할 나위 없는 멘토의 자질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그분은 좋은 멘토로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유익합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 유대땅 변방 시골에서 살던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고심하며 산상수훈의 함께 배우고, 복음서를 읽는다면 예수님을 향한 내적친밀감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완전

오늘 본문 17절은 말씀을 듣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유와 율법의 상관관계를 생각할 때, 대체로 율법에 대해서 우리는 나와 상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도 바울의 가르침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누린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것을 완전하게 하러 왔고,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다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19-20절의 말씀을 보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매우 불편한 관계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면 될까요? 예수님과 바울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율법과 선지자의 완전이 이해되야 합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통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일시적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모세오경 외에 구약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율법과 선지자 예수께서 칭하신 이 두 가지는 곧 39권의 구약 성경입니다. 구약 성경은 다양한 주제를 갖습니다. 많은 주제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리를 위해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이 내포되어 있기에 그 자체로 완전이라는 속성을 띱니다. 말씀이 완전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과거/현재/미래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은 받는 이스라엘에게는 현재적으로, 그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는 과거로, 반드시 이루어질 성취이기에 미래적 차원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예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미 그리고 반드시 성취될 것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미래적 차원은 보이지 않기에 완전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지 않던 미래적 차원이 성취됩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18절 말씀의 서두와 같이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하러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씀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굉장히 파격적으로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완성이자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시지, 폐하시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근거로 함께 십계명을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10개의 계명은 두 대상에 관한 명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명령입니다. 다음으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부모, 형제, 친구,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명령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외적으로 율법 흉내내었다면, 예수님은 유대땅의 고아, 과부, 병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묻습니다.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큽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보기>‘마37:37-40’ 예수님의 말씀은 시종일관 한결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과 선지자의 완전을 이루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의 명령이 자연스럽게 지켜질 것입니다. 나머지 계명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계명을 온전히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고심하며 성령님의 동행하심 가운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명의 외적 모양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 보였습니다. 그러나 계명의 참된 의미를 모르니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 의미를 알아도 능력이 없으니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모양만 남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외식! “척!”하는 거예요! 사랑의 모양도 없고 힘도 없으면서 하나님 사랑하는 척! 내 이웃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랑은 척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진심으로 믿게 되면, 바로 그때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가 연결됩니다. 여기서 ‘연결’을 ‘관계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성경의 언어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예수님도 그 사랑을 그대로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도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그대로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지켜야 해서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며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율법이 지켜집니다. 이것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내가 받은 넘치는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요13:34)” 이것을 말로 해서 간단해 보이는 것이지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이에나처럼 물어 뜯을 준비를 하는 우리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하고, 틈만나면 잔소리하는 부모님을 사랑해야 하고, 죽어라 말 안듣는 동생을 사랑해야하고, 눈만 뜨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난 형, 누나, 언니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라도 여러분 마음에 사랑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자녀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 정도일 것인데, 오늘날 그것도 많이 희석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행해야 할 때,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자 설득하실 것이고 그는 선택을 해야할 것입니다.

예수와 율법을 마치며

나의 믿음과 신앙 생활을 건강하게 만듦에 있어 예수님보다 좋은 멘토는 없습니다. 그분은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태초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유한한 세계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 전능하신 말씀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언어로 스스로 제한되셨습니다.(성경)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건 TMI인데, 19절과 20절의 말씀은 해석에 있어서 난해함이 있었습니다. 19절의 말씀을 보면 율법을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 천국에서 차등적인 상급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기에, 차등적 상급 때문에 엄청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차등적 대우와 계급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19절의 말씀을 저는 이렇게 여러분에서 전하고자 합니다. 66권의 말씀 중 내가 좋아하는 몇몇 말씀을 편식하듯 묵상하지 말고 모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달아 삼위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빠짐 없이 전하자라는 것입니다. 매해 송구 영신 예배에 우리는 말씀을 뽑습니다. 그러나 올해도 내년에도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한구절의 말씀이 아니라 66권의 성경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고 칭찬 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20절의 말씀입니다. 20절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바리새인보다 더 무언가 우리가 해야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앞선 17~19절의 말씀의 맥락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의’를 주목하여 해석해 봅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로 비난하셨지만 예수님 전에 그 누구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그들이 율법을 매우 잘 지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행위로서는 그들과 우리가 비등할 뿐이지 더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갈 더 나은 ‘의’는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을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면, 우리 삶 속에 말씀의 완전이 그리고 말씀대로 살게 하는 믿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을 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삼위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더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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