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이 아닌 사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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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2일 위니펙 우리교회 주일 설교
본문: 창 17:1-11
제목: 생존이 아닌 사명으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때가 86세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여만 주세요)
창세기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저는 저희 아버님이 38살때 막내로 태어셨습니다. 참 많이 저를 이뻐하셨습니다. 군대 제대하는 날 보라색 엑센트를 집 마당에 깜짝 선물로 준비해주실정도 였습니다. 당시 회사다니던 둘째 형님은 프라이드 중고차, 대학생이던 셋째 형님은 차도 없던 시기였습니다. 집에 돈이 많은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학후 내내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형님들은 아버님이 늘 저를 그렇게 대하시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셨습니다. 38살에 아들들이 이미 있는데도 막내가 그렇게 이뻐보이는데, 86세에 아들을 낳았으니 아브람의 눈에 얼마나 이뻐 보였겠습니까?
아마도 눈에서 하트가 매일 매일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것이 아브람에게는 다른것과 비교할수 없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그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5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7:15–16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의 마음가운데는 두가지 마음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것은 불가능한 약속이다. (보여만 주세요)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하고
사라는 여자로서 아이를 낳을수 있는 생물학적 기능이 멈춘지 아니 13년이 지났고 자기 자신도 아이를 낳을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어찌 이런 우리 부부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인가? 지난 24년간의 경험을 보아서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단정지어버렸습니다.
두번째 지금 이스마엘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보여만 주세요)
창세기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비록 정실부인인 사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아 태어난 이스마엘이었기에 아브람은 그 이스마엘로도 충분히 만족했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그런거 필요없고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우리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할지라도 때론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복이 아닐수도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몽골의 어느 대장간의 한 장인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멀리 출타를 하게 되어 대장간에서 일하는 똘똘한 종에게 말 발굽 100개를 만들도록 지시를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충성스러운 종은 밤낮없이 열심이 일을 해서 말 발굽 100개를 만들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은 충분치 않은 시간임에도 말 발굽 100개를 만들어낸 종을 보면서 크게 기뻐하며 칭찬했습니다. 네가 충성스러운지는 내가일찍이 알았지만 이렇게 까지 충성스러운지는 미처몰랐다 하면서 크게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말발굽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상하게도 모양이 다 달랐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주인은 종에게 어떻게 말발굽을 만들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종이 말합니다. 네 1번째 굽을 보고 2번째 굽을 만들고 2번째 굽을 보고 3번째 굽을 만들었고 98번째 굽을 보고 99번째를 만들고 99번째 굽을 보고 100번째 굽을 만들었습니다. 아이고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모양이 다 다르게 나왔구나. 아이구 이 사람아 그렇게 만들면 안되지, 첫번째 보고 두번째 만들고 첫번째 보고 세번째 만들고 첫번째 보고 99번째를 만들고 첫번째를 보고 100번째를 만들었어야지 그래야 모양이 달라지지 않지.이걸 어떡하냐 다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가장 오래된 새교회라는 책에 소개된 한 이야기입니다. (책 그림 보여주세요)
이 종은 맡은일을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틀렸습니다. 주인이 준 첫번째 말발굽에 기준을 맞추고 열심을 맞추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이 만든 말발굽에 기준을 두고 말밥굽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99개가 다 모양이 달라져버렸고 결국 다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해지지 위해 열심히 살지 않은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열심이었고 최선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13년동안 하나님은 철저히 침묵해 버리셨고 하나님은 어떤 임재로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람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창 15:4 를 눈으로만 한번 보시겠습니다. (보여만 주세요)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하나님에게 있어 부부는 한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 둘을 한몸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몸이라 말씀하심은 그래서 아브람 혼자가 아니라 사라를 포함한 두 사람을 의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사라는 부부가 한몸임을 전제하지 않고 아브람 한사람으로만 이해했고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 있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뜻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책망하거나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그리고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한번 해주십니다.
본문 창 17: 4-5 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7:4–5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아브람이라는 말은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는것 ,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아브람도 지금 그것을 누리고 있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저 좋은 아버지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브람이 만족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을 한 가정의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낚시를 갔는데 이 사람이 낚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좀 이상했습니다. 대게는 크기가 큰 물고기를 잡으면 좋아하고 작은 사이즈의 물고기를 잡으면 실망을 하는데, 이 사람은 반대인 것입니다. 큰 물고기를 잡으면 대단히 실망을 하면서 놓아줘버리고 작은 물고기를 잡으면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얼른 바구니에 담는 것입니다. 게속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왜 큰 물고기는 놔주고 작은 물고기가 그렇게 담는 겁니까? 물었더니 이 사람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아 네 우리 집 프라이펜 사이즈가 20cm 짜리여서요 큰 물고기는 구울수가 없어서요 하더랍니다. 20 cm 프라이팬이면 계란후라이 할때 사용하는 사이즈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자신을 단지 한가정의 좋은 아버지로 한정하고 그 속에서 그냥 인생을 살다가 마감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스케일은 한 가정이 아니라 열방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지구촌에 사는 70억인구중에 약 30억명이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아 바뀌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할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5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보여주세요)
이제 후로는 이라는 히브리어가 오드라는 단어인데 , 이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다시 2. 계속 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다시는 너의 이름을 아브람이라 부르지 않겠다로 해석할수도 있고, 계속해서 아브람이라 부르지 않겠다 라는 뜻도 된다. - 옥스포드 성경주석
후자로 해석하면 그 의미가 사뭇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12장에서 부르신 이후로 한번도 아브라함을 아브람이라고 생각한적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때부터 열국의 아비로 작정하시고 부르셨고, 그 이후로 아브라함이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함 모습을 보여도 한번도 아브라함을 한 가정의 가장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열국의 아비로 처음부터 계속해서 봐오셨다는 것입니다.
뱀잡이 수리라는 새를 아십니까? (그림을 보여주세요)
날개를 펴면 2미터에 육박하고 거대한 발톱과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하늘을 호령하는 독수리중의 독수리입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가 보통은 하늘을 활공하다가 땅에 있는 먹이를 보면 쏜쌀같이 날아와 먹이를 낙아채는 방식으로 사냥을 하는데, 가끔은 먹이를 찾아 땅을 걸어서 다닐때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때 사자나 표범같은 맹수가 이 독수리를 사냥하겠다고 덮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이 뱀잡이 수리가 순간 자신이 독수리라는 사실을 잊어먹고 두 다리로 뛰어서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두 얇은 두다리로 도망을 간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결국은 사자에게 잡혀서 먹잇감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날아가면 되는데, 날개를 펴서 하늘을 날아가버리면 사자든 호랑이든 더이상 두려울게 없는데 , 자신이 독수리인것을 잊어먹어 버리고 두 다리로 달려서 도망가다가 결국은 맹수에게 잡혀서 먹잇감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독수리인데 타조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아브람과 사라가 그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번도 아브라함과 사라를 영적 독수리가 아닌 타조로 생각해본적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땅을 가느다란 두 다리로 뛰어다니는 타조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니 인생의 사이즈는 그게 아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영적 독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날개를 펴면 2미터에 이르고 그 날개를 펴서 날기 시작하면 누구도 넘볼수 없는 하늘의 주인이 되는 독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너무 작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엘리멜렉이나 잘되기 원합니다. 이스마엘이나 잘되기를 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과 포기하는 마음은 결코 같을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자신의 의미와가치를 세우는 일에 쉽게 포기히거 절망해 버릴려고 합니다. 난 안돼 나는 높이 날려고 하면 안돼, 그냥 땅만 기고 살아도 감사해야되. 이것이 내 인생의 사이즈야 라고 말입니다. 어떨때 우리가 이렇게 됩니까? 사명을 잃어버리고 생존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생존의 위협속에서 늘 시달리면서 산다할지라도 우리의 삶에는 열국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비전이 담겨져 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면 우리는 열국의 아비가 될것이라는 약속을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는 이상하게 킹스턴에서 사는동안에도 위니펙을 좋아했었습니다. 제 아내가 증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 왠지 모르게 위니펙이 좋았습니다. 위니펙을 거쳐간 목회자들 중에 토론토에서 목회하는 목사 동료들이 그런 저를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위니펙이 뭐가 좋냐고. 그 말많고 다들 떠나지 못해 안달인 위니펙이 뭐가 좋냐고 이해 못하겠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위니펙이 좋았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한번은 가서 목회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가졌었습니다.그러다가 제가 목회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계획했던 일이 틀어졌고 저는 그 암흑과 같은순간에 제 삶을 위니펙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처음 위니펙에 와서 정상적인 담임목사의 삶을 살수가 없었기에 저는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육체를 사용하는 타일일도 해보았습니다. 초보라 타일은 만지지도 못하고 시멘트를 이기고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기술은 없고 그냥 몸으로 때우는 일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밤에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결리고 아파서 아이고 아이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잠에 들곤 했습니다 그러다 비지니스의 길이 열려 아내가 작은 치킨집을 시작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훌쩍 지났고 그사이에 저는 위니펙 우리교회 담임목사로서 새로운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와 사업을 병행하려고 하니 매일 매일 사는게 전쟁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제 속에서 속삭임이 있습니다. 생존만을 위해서 살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엄청 힘든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내 곧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그냥 오다가다 위니펙에 온것이 아니고, 생존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저의 삶의 전부가 아님을 하나님은 제가 분명히 알기를 원하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지난 일년동안 한국에서 제법 규모있는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부르는 콜링도 있었습니다. 갈까 망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저는 그냥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저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습니다.
황목사야. 너는 생존만을 위해서 위니펙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열국의 아비로 부름받은 존재다. 너는 영적 독수리다. 잠든 위니펙을 깨우고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우는 일을 위해 내가 너를 아픔가운데에서 위니펙으로 보냈다라는 내적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비전과 부르심의 꿈을 성도님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도 동일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은 단지 생존만을 위해서 이땅에 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자로 이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마음편한 교회 다니고 주중에는 생존을 위해 단지 그것만을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로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소중해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생존만을 위한 삶에는 하나님의 가치와 의미가 부여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권속들에게 할례를 받으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할례를 받지 않으면 언약에서 끊어질것이라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의 의미와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삶의 현장에서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미를 할례를 통해 몸에 새기듯이 그렇게 마음판에 하나님의 사명을 마음에 새고 무엇을 하든지 그 가치와 의미로 삶을 살아내는 자에게 하나님은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개인과 가정가운데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런 인생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찬양하나 하겠습니다. 예수 늘 함께 하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