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가 있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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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소설과 같습니다.
기욤 뮈소 “인생은 소설이다” 라는 책을 썼습니다.
소설은 사건을 미적으로 질서 화 하여 통일적인 의미가 구현될 수 있도록 산문으로 서술한 서사 문예 입니다.
쉽게 말해 작가의 의도에 따라 문학적으로 재구성하여서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의 사건들과 인물들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 소설을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인생을 소설과 비유를 할까요?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을때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소설이 마냥 현실에서 동떨어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인생에 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유의미한 사건들을 골라 문학적으로 정리하여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깨달음을 주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 입니다.
소설의 핵심은 바로 서사 입니다.
서사는 무작위로 나열된 인생의 수 많은 사건들을
작가의 의도대로 재배열하는 행위 입니다.
의미 있는 인물, 사건, 갈등, 대결구도, 극복과정이기도 합니다.
인생에서도 누군가는 서사가 있는 인생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인생으로 나뉩니다.
새털 같이 많은 나날들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 많은 사건들 속에서
영성생활하며 기도생활 하며 그 말씀을 따르다보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를 하나님의 서사 속으로 참여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종류의 인생이 등장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생에 의도하신 바가 있으십니다.
무의미하게 보낸 우리 하루에도 분명 하나님의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나를 향한 작가의 의도와 서사가 무엇인지 발견 하시기 바랍니다.
1.마음을 열고 따르는 인생에 서사가 있다.
2.전도자의 절망은 구원의 노래로
1.마음을 열고 따르는 인생에 서사가 있다.
사도 바울은 1차 선교 뿐 아니라, 오랫 동안 함께 했던 동역자와 헤어져 홀로 서기를 합니다.
초반에 바울은 1차 여행때 세운 소 아시아의 교회들을 둘러 보고 신앙을 공고히 하였지만
그리고 유럽으로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NKRV)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
1차선교 여행이 최초의 이방 선교의 의미를 갖는다면
최초의 유럽 선교가 시작 된 것이 2차 선교 입니다.
2차 선교 에는 사도행전의 지금까지의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 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살펴볼 인물은 한 여인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 잘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풍족한 헬라문화권의 세련된 삶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 하지 않고
물질이 지배한 세상 입니다.
디도서 3:3 (NKRV)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빌립보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런 사회와 인간상을 잘 보여주는 인물 입니다.
사도행전 16:16 NKRV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한 여종이 등장 하는데
이 여인은 몇가지 불행을 겪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사회적으로 노예의 신분이었습니다.
둘째로 악령에 눌려 있었습니다.
셋째로 주인들의 돈벌이 도구로 착취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련한 소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그 일행들도 큰 관심이 없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 악령이 무슨 이유에서 인지 계속해서 바울과 일행을 큰 소리를 지르며 따라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17 NKRV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전도단을 괴롭게 했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인이 괴기한 소리를 지르며 따라 다니는 것은 그 어느 것에도 도움이 되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 냅니다.
사도행전 16:18 NKRV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바울은 왜 괴로웠을까?
이 여인도 복음을 전하고 있던것이 아닌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17절)
딱히 문제가 될만한 구절이 없어 보입니다.
당시 문화와 언어학적으로 보면,
여기서 말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바울과 그 일행이 생각하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권의 다신교의 신들을 의미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구원” 또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단어와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신, 다신교의 수 많은 신중 누가 되었건 하나를 지칭하고
영적인 구원이 아닌 현생에서의 위기와 어려움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모호한 이름이 아닌,
분명한 이름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은 쫓겨 났습니다.
교묘한 철학과 가짜 신과 가짜 구원에서 그녀를 구원해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귀신에 홀려 끌려 다니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점궤를 말해주는 삶은 존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듯이 말입니다.
그런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개입하시길 원했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도 모르는 가련한 여인에게
참된 인생과 존귀한 영혼임을 알려 주시기 위해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 준 것입니다.
인생이 평범하게 흐를 수 있었으나
섭리의 하나님, 우리 인생에 분명한 목적이 있으신 하나님이
그녀의 인생에 파장을 일으키시고 서사를 시작 하신 순간 이었습니다.
너무나 잘된 결말 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만 같던 이야기가
심화된 갈등으로 향합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이 등장 하면서 긴장은 고조 됩니다.
대결구도와 갈등구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서사는 항상 대적을 통해 더 큰 은혜로 향해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주인들은 그 여종이 귀신 에게서 자유 했다는 것을 듣고 기뻐했을까요?
사도행전 16:19 NKRV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가 고소하고 결국 감옥에 갇히게 만듭니다.
귀신들려 있던 여종이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면 잘된 일인데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여종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면 어뗐을까요?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했겠습니까?
주인들은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말로 그 여종을 진정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물질주의 맘몬주의 팽배를 보여줍니다.
사람의 존귀함 보다 돈이 더 중요하고
모든 것은 이윤 추구를 정당하다 말하는 시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논리 앞에 많은 약자들이 눌려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주인 이라는 단어가 단수가 아니고 복수 라는 것입니다.
한 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점을 쳐주고 받은 돈으로 여러 명이 이익을 얻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맘몬의 노예로
서로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상이 되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명의 귀중한 영혼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전개이고 서사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서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사라진 것에 대해 소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할뿐 입니다.
만약에 주인들도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면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났을 것이고
그들도 구원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서사를 이해하고
누군가는 눈 앞의 고난과 손해만 바라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여기 또다른 인물이 등장 합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
빌립보 선교에 대한 본문의 기록에는 또 한명의 여인이 언급 되고 있는데,
이 여인을 만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점치는 여종을 도운 사건에서도 나오는 표현이 여기서도 나옵니다.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사도행전 16:13 NKRV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이곳이 유대인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 입니다.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를 했지만
이방인 지역에는 회당이 없었고
현재의 깅기티스 강(River Gangitis)입니다.
여기서 한 여인을 만나는데,
빌립보의 루디아 입니다.
루디아는 우리에게 자주 장사로 많이 알려진 여인 입니다.
당시 자주색 옷감은 귀족들과 왕족들만 입던 귀한 옷감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보라색은 희귀한 고둥이 극소량으로 분비하는 무색의 점액을 오랫동안 달이면
처음에는 노란색, 햇빝에 말리면 초록색, 그 다음에는 빨강색으로 변하고 마지막에 보라색이 된다고 합니다. 이 보라색 염료 1g을 만드는데 고둥이 1만 마리가 필요했다고 하고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싼 색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보라색 중에서도 빨간색을 더 많이 띄는 자주색은 초기 기독교 미술 등에서 예수님과 왕들에게만 허락되는 귀한 색이었습니다.
이 귀한 직물을 유통하는 루디아는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루디아에 대해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계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섬기던 여인에게 바울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의 인생에 개입 하십니다.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 따르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6:14–15 NKRV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앞에서 언급된 귀신들렸던 여인과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부분이 바로
회당도 없고 유대인들도 없는 막막한 외지에서
하나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고
전도자들을 후원하게 하십니다.
루디아는 이후로도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그의 전도 여행을 물심양면 돕습니다.
빌립보서 4:15–16 NKRV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아무도 돕는 이가 없을때, 루디아를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후원 하였습니다.
루디아는 아주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는 일도 안정적이고 부족한 것이 없는 지중해 유럽의 부유한 여인 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녀에게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가 없었다면
그녀는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두여인이 모두 하나님이 보내신 바울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귀신들렸던 여종은 여전히 주인들의 수익의 소망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주인들의 처우가 생각보다 좋아서 평안하고 풍족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루디아도 변함 없이 변고 없이 잘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불행한 일을 만났다면 어렵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들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그 인생이 풍족하던 평안하던 아니면 불행하던 두 경우 모두 마찬가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다 동일한 결론을 맞게 되어 있기때문 입니다.
귀신들렸던 여종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루기아는 마음을 열고 말씀을 따랐고
루디아의 이야기는 교회사에 남게 됩니다.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빌립보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할줄 아는 사람으로
그녀를 기념하는 교회가 남아 있습니다.
귀신들렸다가 자유를 얻는 영적인 체험을 한 여인의 서사는 미완성으로 끝났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돈버는 일에만 소망을 두던 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자들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 믿음의 여인은 부유하고 평범한 빌립보의 이름 없는 여인으로 남을뻔한 인생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헌신한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남는 서사를 남기게 됩니다.
2.전도자의 절망은 구원의 노래로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 주인들에 의해 고소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도행전 16:22–24 NKRV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그 과정에서 옷을 벗기고 매를 맞습니다.
손발은 차꼬에 묶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바울과 실라의 찬양의 기적으로 기억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어뗐을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옳은 일을 하다가 옷을 다 벗겨지고 흠씬 두들겨 맞은 상태 입니다.
그 마음은 저 깊은 심연으로 갈아 앉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좋은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고 욕을 직살라게 먹고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감옥에 억울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바울과 실라가 부른 찬양은 어떤 찬양 이었을까?
1.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2.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3.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 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많은 찬양시를 지어서 유명했던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rentiss) 는
결혼한지 11년만에 뉴욕을 덮친 전염병으로 자녀들을 모두 잃고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믿음을 지키고 살았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시를 쓰며 헌신했던 나에게
어떻게 이런 불행이 닥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낙망 하였습니다.
남편인 조지 프렌티스 목사는 깊은 실의에 빠진 아내를 위로했다.
“여보, 많은 가정들이 아이들을 잃고 슬퍼하고 있소. 지금이 우리가 성도들에게 늘 가르쳐온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시간인 것 같소. 우리의 기쁨과 소망은 하나님이잖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있을 것이오. 이럴 때일수록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아이들은 더 좋은 곳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있을 겁니다”
그때 남편이 믿는 하나님, 자신이 쓴 찬양시 속에만 있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순간 찬송가 가사가 떠올라서 지은 찬송가가 바로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입니다.
성도에게도 고난은 고통 스럽고 절망 스럽습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함과 동시에
빌립보서 1:29 NKRV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위해 고난 받는 것도 기쁘게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만날때, 믿지 않는 자들 처럼 상황과 조건 앞에 무릎 꿇고 원망하고
그 상황에서 믿음으로 기도하며 이기기를 포기한다면
그 인생에는 그 어떤 기적도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포기하기 보다
오히려 찬양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지진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6:25–26 NKRV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난 받을때
멀리 계시는 것 같아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하시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으로 다시 되살아 납니다.
이 소망은 생명의 소망으로 죽는 길밖에는 선택권이 없는 가련한 인생에게 소망을 주는 계기가 됩니다.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본 간수는 인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불명예스럽고 고통스러운 고문과 죽음 뿐임을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16:27–28 NKRV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는 바울을 통해 소망을 발견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사도행전 16:30 NKRV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누구도 여기에 “구원” 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간수는 바울에게 이 곤경을 어떻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묻고 있습니다.
순간의 위기를 벗어날 방도를 구하는 간수에게 바울은 영원한 해결책을 제시 합니다.
사도행전 16:31 NKRV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내하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단지, 우리가 고난을 벗어나는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한 영혼이 그 가족이 구원 받게 되는 역사를 경험 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 입니다.
이 서사의 흐름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기대 하지 못했던 엄청난 기적 입니다.

결론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의 아들을 못밖게 두신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뜻을 아시는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옷벗김을 당하고 매를 많이 맞음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수치를 당하고 매를 맞고
절망 가운데도 놓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 할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였던 이야기의 서사는
바로 여종을 귀신으로 부터 주인들로 부터 해방 시키고
루디아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바울과 실라의 희생과 순종 그리고 신령한 찬양을 통해
간수와 가족의 구원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확실함과 모호함이 혼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은 모호함으로 하나님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고
우리의 죽음은 언제 올지 몰라 모호하나 분명히 온다는 확실함 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면에서 소설과 같고
하나님은 섭리로 아름다운 인생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우리의 장래 이야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이야기는 서사로 남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 서사가 없는 평범한 인생으로 남을지
모든 순간이 의미 있고 곳곳에 하나님의 섭리와 개입이 발견되게 될지는
결국 우리의 인내와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믿는 믿음이 가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모호함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따르고 기꺼이 헌신 하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를 믿고 따르기로 작정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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