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나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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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이르는 회개
생명에 이르는 회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흑역사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의 순간이 있었는가? 전도사님 같은 경우는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 싸이월드라고 하는 무려 15년 전의 인스타그램 같은 SNS가 있었다. 그곳에 썼던 내용들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 당시에 전도사님이 철없이 내 미니홈피에 이상한 감성 같지도 않는 글들을 엄청 많이 썼던 때였다. 지금 인스타그램에 누군가 욕을 써놓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될 때 어린 시절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당당했는지 사람들에게 공개하면서 누구든 보라고 올렸는데, 지금은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고 조용히 없애고 싶은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다행이도 싸이월드가 서비스를 완전히 종료해서 더는 볼 수 없게 되어 가끔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고 싶을 때는 조금 아쉽긴하다. 이처럼 누구나 과거에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하지 말라고 말해도 자신의 고집이 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 과거를 생각할 때 잊어버리고 싶은 후회가 남게 된다.
오늘 함께 읽었던 말씀은 다윗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시이다. 시편 51편은 전형적인 탄식시이다. 51편을 쓴 저자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탄식한다. 표제를 보게 되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말하고 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한 후에 다윗을 찾아오서 다윗이 저지른 일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 나단의 책망한 내용은 이러했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서 키운 어린 암컷 양 한 마리 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양을 먹여 열심히 길렀다. 양은 가난한 사람의 아이들과 함께 자랐다. 양은 가난한 사람이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나누어 먹으며 자랐다. 양은 가난한 사람의 팔에서 잠을 잤다. 양은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서 마치 딸과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그네가 부자에게 찾아왔다. 부자는 나그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자는 나그네에게 음식을 주기 위해서 자기의 양이나 소를 잡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딸같은 양을 빼았았다. 부자는 그 양을 잡아서 나그네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부자에 대하여 크게 화를 내며 “살아 계신 여호와께 맹세하지만 이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을 한 대가로 양을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한다.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을 꾸짖는 이야기를 나단 선지자가 전해준 것이다. 그렇게 나단의 책망과 심판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보인 반응이 시편 51편이다.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부르며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여기서 보게 되면 “인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인자”는 기본적으로 ‘선함’, ‘친절’의 뜻을 갖고 있으면서 다양한 단어들 ‘인자, 자비, 변함없는 사랑, 긍휼, 인애’ 등으로 번역되었다. “자비”는 ‘깊은 동정심’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나타낸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근거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나의 죄과”는 다윗이 밧세바와 저지른 죄를 뜻한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동침했으며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는 죄를 범했다. 1절 상반부에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는 1절 후반부에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이다. 깨끗이 제거하는 것, 지워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다윗은 자신의 죄를 흔적이 없이 지워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은혜이며 복이다. 1절부터 3절까지 “내 죄악”, “나의 죄악”, “나의 죄”, “내 죄과”, “내 죄”라고 다윗은 고백하며 일인칭을 사용하여 밧세바와의 사건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죄를 알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여기서 “주께만”은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말한다. 죄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을 어긴 것이다. ‘주의 목전에’는 하나님의 눈을 의미한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했을 때, 완전 범죄를 꿈꾸었다. 사무엘 기자는 11장에서 다윗의 범죄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지적한다.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 같았던 그 공간에 여호와는 다윗의 일을 다 보고 계시며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서 그의 죄를 지적하시며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눈은 확실히 온 땅을 보고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악 중에서 출생했다고 고백한다. 다윗의 어머니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라기 보다는 지은 죄에 대한 깊은 자책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이 충성을 요구했고 또한 처음부터 그에게 지혜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그가 죄를 거부할 책임과 대응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7절에 우슬초가 등장한다. 우슬초는 이스라엘에서 양념으로 사용되며 또한 독을 제거하는데 사용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에 양의 피를 우슬초 묶음에 적셔서 집 문 안방과 문틀에 발랐었다. 또한 제사장이 집에 생긴 곰팡이를 제거할 때, 정결 의식 때 우슬초를 사용했다. 우슬초로 죄를 정결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볼 때,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우리는 죄를 씻을 수 없다. 다윗은 죄를 씻어주시며 용서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셔야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었던 모든 죄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고백한다. 정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 ‘정결한 마음’으로 죄로부터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정직한 영’은 ‘확실한 영’, ‘굳은 영’으로 굳게 결심한 영을 말한다. 죄로부터 벗어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확고한 영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 속에서 이미 죄를 짓고 난 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요한복음 8장을 보게 되면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 한 명을 끌고 와서 모인 사람들의 앞에 세우고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예수님을 어떻게든 고발하려고 시험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할 것이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자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시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멋있게 말씀하신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기 원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 율법의 완성자이신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끔찍하게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나 죄에 빠진 인간에게 와서 꾸짖거나 어떻게 인생을 그렇게 살았냐고 혼내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지, 순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성전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에게 뒤집어 엎으시며 화를 내셨었던 적이 있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회칠한 무덤같다고 혼내시는 장면들을 보게 된다. 예수님이 공통적으로 화를 내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신앙생활하면서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때이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자신에게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사람에게 따뜻하게 용서를 하신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자신의 의롭다고 자랑하고, 얼마나 내가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 뽐내려고 하는 모습을 굉장히 싫어하셨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느 누가 가식적으로 자신의 잘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이 좋은가? 아니면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 좋은가? 당연히 어느 누구도 가식적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아시고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겠는가? 다윗이 하나님께 마음이 합한 자라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다윗이 쓴 시편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정말 투명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의 마음과 말하는게 일치하는 정직한 모습을 보면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쁘겠는가? 그리고 다윗이 비록 밧세바의 스캔들로 넘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매우 그 모습을 악하다고 평가했지만, 결국 그의 삶은 다시 그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진정한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한다고 기도해놓고 다시 그 죄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회개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드림인 여러분, 우리 죄에서 날마다 돌이키길 소망한다. 죄라는 것은 살인을 했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돌이켜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앞으로 가길 소망한다. 큐티 생활 다시 회복하기 소망한다. 말씀 읽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을 바쁘다는 핑계 더 이상 그만하고, 늘 경건의 삶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