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4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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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함께 모여서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데요, 오늘의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인 모든 영혼들에게 크신 은혜로 부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저희가 함께 살펴볼 이 갈라디아서 말씀은 다른 바울의 서신서들과 마찬가지로 큰 기록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행동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이었죠.
당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나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필요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고, 꽤나 많은 성도들이 이에 대해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성도들이 믿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는다 하여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당연히 아니겠죠.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인 5장을 통해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에는 방종이 존재하지 않음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것은 서로를 향한 절제와 겸손함, 즉 서로 종노릇 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같은 선상에서 오늘의 본문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어쩌면 오늘의 본문은 두 구절의 짧은 내용이지만,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 이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서 그 은혜를 함께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첫머리에서 바울은 우리가 방금 보았듯이 선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선행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요, 선행을 하면 할수록 본래는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선한 일들을 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도 기뻐하고 감사를 표하고,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도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게 원래 선한 행동을 통해 나오는 은혜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선한 행동을 하면서 또 다른 이들에게 선한 행동을 유발하는 선한 영향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선을 행하는 이들이 낙심을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을까요. 그럼 우선 선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정의를 해야할 것입니다. 선한 행동이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까요. 남을 돕는 것? 희생하는 것?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죠.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대로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죄로 물들어 말씀을 지키는 것조차도 행할 수가 없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내내 이야기를 한 것이죠. 인간 자체는 죄로 물들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행동으로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믿음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믿음의 은혜로써 우리 안에 사랑을 채우고, 그 넘치는 사랑으로 부족하지만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더라도, 받은 사랑으로 나누고자 하더라도 그조차도 쉽지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는 선물로 행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 모든 선행을 이루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어려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공격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장 본문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만 하더라도, 이미 바울을 통해 믿음의 은혜를 누렸는데,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죠.
갈라디아 성도들의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도로서 살아가기에, 다른 이방인들로부터도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크게는 대대적인 로마의 핍박도 있었구요, 작게는 생활 속에서 많은 편견들 속에 차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한 것이겠죠. ‘너희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선을 행하겠지만, 그 안에서 낙심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일들은 예수님께서도 이미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야기였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직 주님을 믿겠다고 다짐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살기만 하는데도,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핍박이라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비단 갈라디아교회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2000년을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 말씀은 적용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제일 잘 아시겠죠. 믿음이 있기에, 그것을 따라 살려하기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있으신가요. 차라리 믿지 않았다면 지금 내 모습은 더욱 편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믿음을 부어주셨기에, 나를 그리스도의 피로써 다시 살리시고 거듭나게 하셨기에, 우리는 그 어려움을 앎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여기 계신 모두가 아마 다 그러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굳센 믿음이 있지만, 사실 힘든 것은 힘든 거에요. 그 힘든 일들은 우리를 어렵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낙심하게까지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어떤 마음이 오나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왜 도대체 주님, 저한테 이렇게 행하십니까. 왜 제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까. 왜 저들은 저렇게 승승장구 합니까. 이러한 마음들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한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처럼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라.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저 혼자서만 힘든 일을 하는 것 같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고. 열심히 머리로 생각해서 따져봐도 그러한 결론만 맺어져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고와 상식을 뛰어넘어 주님의 가장 적절한 때에 놀랍게 그의 일들을 행하십니다.
요즘 저희가 새벽에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서도 그 내용이 잘 나타나죠. 요즘 열왕기하 말씀을 보고 있는데, 거기에 아합의 자손들이 어떤 말로를 걷게 되는지가 등장하죠.
당장 아합이 전쟁터에서 죽은 후에는 남북이 결혼으로 거진 동맹을 맺으면서 두 왕국에 모두 아합의 자손들이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후가 반역을 일으키고, 북이스라엘의 왕 뿐만 아니라 아합의 자손인 유다의 왕마저도 그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죄악의 시작이었던 이세벨도 예후와 그의 부하들로 인해 나봇의 포도원으로 던져져 개에게 먹히게 되죠.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예언 그대로 모든 죄악이 갚아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가 있고 난 후,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헀습니다. 아합도 죽고, 여러 왕들이 죽은 후에야 그 심판이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것을 지연된 정의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이 지연된 정의는 정의라고 부를 수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 시선에서의 ‘지연됨’일 뿐입니다. 모든 시간을 거슬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는 이 모든 일들이 지연된 것이 아니라, 가장 알맞은 때에 이루어진 것이었죠.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서도 그의 정의를, 그의 뜻에 가장 알맞게 이루어내십니다.
죄에 대해서도 가장 적절한 때에 갚으실 것이고, 선에 대해서도 가장 적절한 때에 그 열매가 맺어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우리가 말씀대로 살고 그로인해 실제적인 어려움들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 가운데서 결실이 맺어지지 않는 것 같아 또 어려움이 가중되더라도 절대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때가 임한다면, 하나님은 그 결실을 반드시 이루시고 거두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바로 이어지는 10절에 기록되어있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말씀대로의 삶을 모든 이에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얕은 상식과 시선으로 우리 행동의 바운더리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이끄신다면, 우리는 모든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인도선교를 통해 그 경험을 했습니다. 이번 여름 11차 힌두권선교의 이야기인데요, 저는 두번째 힌두권 선교를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인도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요.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이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처음 힌두권 선교를 가게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인도는 힌두교국가였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유교 믿듯이 문화로써 믿는 것도 아니고, 정말 열심히 모든 삶을 다해 믿는 것이 바로 인도의 힌두교였기 때문에, 저는 이 선교가 정말 어떤 일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도 모르게 그저 늘 가는 비젼트립의 하나로써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힌두선교의 특징이 뭐냐면, 다른 어떤 것들을 준비하지를 않는다는거에요. 오로지 딱 두개입니다. 간증과 사영리.
그냥 현지 사역자들을 따라 처음 그리스도에 대해 듣는 이들을 향해 선포를 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의문이 있었죠. 공연을 해도 들을지 의문인데, 딱 저것만 해서 뭐가 있을까?
그런데 첫 선교 때도 그렇고, 두번째 지난 선교때도 그렇고, 정말 신기한 것이 딱 그것만 하는데도 그들이 열심히 듣고 믿는거에요. 우리의 별거 아닌 간증과 떠듬떠듬 영어로 하는 사영리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하는거에요.
그리고 심지어는 스스로 고백을 해요. 내 안에 무언가가 느껴진다. 큰 위로함을 얻었다. 아픔이 나아졌다.
물론 이것이 힌두교를 열심히 믿는 것처럼, 그들의 기본적인 종교적 열심이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지난 두번째 선교를 통해서 확인해본 결과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첫 선교때 가서 예배 공동체를 이루고 나서, 지난 두번째 선교때 같은 곳을 방문했는데, 여전히 열심히 예배의 자리를 지키시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번의 힌두 선교를 통해 크게 느꼈습니다. 정말 주님이 하시는구나. 주님은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뛰어넘어서 역사하시는구나.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인도는 힌두교가 너무 강해서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했다면,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경험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렇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역사하실 주님을 믿고 주의 일을 행하니, 정말 주님의 계획, 주님의 때에 맞게 거두시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도니까 가능한 것은 아닐겁니다. 물론 그 형식과 방식은 다르겠지만, 저는 분명히 우리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역도 오늘 말씀처럼 기회 있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거 올린다고 얼마나 보겠어. 이거 요렇게 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겠어? 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우리의 시선으로 사역의 바운더리를 세워버린다면, 낙심하고 포기해버린다면, 우리는 놀랍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들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하심은 믿는 우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에서 우리는 나타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쉽진 않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분명 고난과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이끌어주셔서 포기하지 않게 인도하실 것이고, 그렇게 일어선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정말 놀라운 일들을 우리를 통해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해야 할 사명, 선교적 삶일 것입니다. 선교라는 것이 꼭 이렇게 인도 가서 교회를 일으키고 이런 거창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하는 하나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선교를 행할 수 있습니다.
당장 우리의 삶을 보자구요. 어떤가요. 우리의 세상을 볼때마다 희망이 넘치고 기쁘고 다가올 미래가 기대되시나요? 아마 그렇지 않은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리도 이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상식이 실종되고, 가치들은 무너진 채, 서로 자신들만의 즉각적인 유희만을 따르고, 그 결과로 세상에는 분쟁과 증오만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당장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우리 젊은 청년세대들에게는 희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살하면 그만이야’라는 것이 유행어가 되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 사회이겠습니까.
그러한 세상 가운데 우리가 보여주어야 합니다. 무엇을요? 바로 주님의 사랑을요.
우리가 살아갈 원천이요, 앞으로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이요, 방향이 되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 앞에 들이대고 가져가라고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삶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저 모진 세상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말이죠.
그러면 분명 그들도 발견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말이죠. 그것만으로 우리는 엄청난 선교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계신 여러분, 말씀대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들겠지만, 낙심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손해보는 것 같고, 나만 바보되는 것 같고, 그렇지만, 함께하시는 주님을 붙잡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때에 반드시 반드시 그의 뜻대로 거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 모든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혼자서는 분명 힘듭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셨고, 함께 예배하고 사역하며 동역함으로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낙심하고 포기할 것 같을 때, 우리 공동체를 통해 힘을 더하여줄 것이고, 그 힘으로 또 다른 이 낙심한 이들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든 온라인선교부 팀원 한사람한사람 모두가 그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역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또한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주님께서 보내주신 우리의 팀원들, 또한 우리의 목장원들, 이 교회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때까지 달려나가 세상 속에서 거두시는 주님의 아름다운 역사하심을 경험하시는 모든 지체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에 고난과 고통이 있지만, 주께서 반드시 그의 때에 거두실 것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게 해달라고.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을 전하는 선교적 삶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우리의 사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 지금의 사회는 불신과 분열이 가득하고, 희망보다는 절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여주셔서, 우리를 통해 이 사회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주님 사랑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시다. -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서야합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되게 하셔서, 서로 낙심할 때마다 일으키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여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주님의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