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거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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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240925 수요예배 [레위기 19:2]
설교 240925 수요예배 [레위기 19:2]
제목: 여러분, 거룩하십시오
제목: 여러분, 거룩하십시오
본문: 레위기 19:2
본문: 레위기 19:2
찬송가 342 459
거룩이라는 부담
거룩이라는 부담
오늘 예배로 함께 모인 성도여러분을 모두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 예배 가운데 모인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제가 방금 인사를 드리면서 이곳에 모인 분들을 ‘성도’라고 지칭했지요. 잘 아시는 것처럼 이 말은 ‘거룩할 성’자에 ‘무리 도’자를 사용해 ‘거룩한 무리들’을 뜻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말을 ‘기독교 신자들을 높이 부르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성도’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성경에서는 크게 세 단어를 ‘성도’라는 말로 번역해두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쓰는데 사용된 히브리어에서는 ‘하시드’와 ‘카디쉬’라는 단어가 제각기 ‘성도’로 번역되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시드’는 신실한, 열심을 내는, 이런 뜻이고, ‘카디쉬’라는 말은 ‘거룩한’이라는 뜻이어서 우리가 ‘성도’라는 번역과 잘 어울리지요.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어 ‘하기오스’가 ‘카디쉬’와 마찬가지로 ‘거룩한’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옆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과 같지요. 다시보니 ‘성도’라는 말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하다’라고 말하기가 민망한 마음이 들지요.
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키지만, 실제 쓰임은 어떠했을까요? 어떤 사람을 ‘성도’라고 불렀을까, 하는 것이지요. 살펴보니 구약성경에서는 생각 외로 ‘성도’라는 말이 드물게 사용됩니다. 주로 다니엘서에서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지요. 그런데 이 말이 흔히 구약성경을 읽으면 떠오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그 의미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고난과 박해 가운데, 불의한 권력자들 아래 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신실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이들을 일컬어서 ‘카도쉼’, 곧 ‘성도’라고 부르고 있지요.
신약성경에서 ‘성도’라는 말은 설명보다 먼저 본문을 인용해보면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7절과 고린도전서 1장 2절, 편지의 인사말에서 이렇게 씁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곧 이 인사말처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 거룩한 무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흔히 말하는 ‘칭의’와도 비슷하지요.
이렇게 보면 우리가 서로를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은혜의 표시입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라고 불러주셨다’는 신앙고백인 것이지요. 우리의 ‘성도됨’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다시 이렇게 서로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성도님, 오늘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받았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또 다시 슬그머니, 부담감이 올라오게 되지요.
레위기, 그리고 19장의 구조 속에서의 ‘거룩’
레위기, 그리고 19장의 구조 속에서의 ‘거룩’
레위기 19장 2절은 두 개의 명령과 하나의 설명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을 전하라’며 모세에게 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백성, 성도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하신 명령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이지요. 마지막 세번째 설명은 그 명령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인데 이렇게 씁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이 우리가 거룩해야 할 이유인 것이지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성도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하신다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를 향한 기대대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거룩’이라는 말, ‘거룩하라’는 명령을 크게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거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거룩’이라고 하면 상상하는 어떤 성스러움, 환한 빛, 한점 흠없는 어떤 ‘상태’로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거룩하기란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을 ‘사랑’처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사랑’은 단순하게 의미를 구분해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상태’이지요.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고, 마음이 향하고, 무엇이든지 주고싶고, 그를 위하는 사랑의 상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상태는 동시에 다른 미덕이나 행위로 이어지지요. 이를테면 어머니는 갓난 아이를 사랑하기에 밤잠을 설치며 기저귀를 갈고, 젖병을 삶고, 자신의 몸 돌보지 못하고 품에 안고 재우곤 합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은 조막만한 손으로 삐뚤빼뚤 쓴 편지에 사랑을 고백하고, 부모님의 무거운 어깨를 주무르고 두들기곤 하지요. 우리는 슬픔을 당한 친구를 사랑하기에 그의 곁에서 어깨를 내어주고, 눈물을 닦아줍니다. 특히 바울은 사랑의 미덕을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등등으로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마다의 사랑의 상태가 그 색깔과 빛과 향기와 밀도가 다를 수는 있지만 사랑은 어떤 행동과 실천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거룩’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거룩’은 어떤 ‘상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행동과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비록 우리의 ‘거룩’이 한점 흠 없는 하나님의 거룩함처럼 완전치 못하고 그 색과 빛과 향기와 밀도가 흐릿하고 옅고, 낮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삶을 순종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거룩의 실천은 어떤 것일까요? 이를 위해 두번째로 ‘거룩’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카도쉬’라는 이 말은 사전에서 ‘떨어트려놓은 어떠한 것’, ‘분리해놓은 것’, ‘그리하여서 종교적으로, 신과 관련하여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나 레위기, 신명기와 같은 책들에서 ‘제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라’는 표현을 종종 보지요. 이것이 ‘카도쉬’입니다. 다른 것과 구분해두는 것으로 ‘거룩’은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구별’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구별’을 행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건강검진을 앞둔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평소의 자기 생활과 자신을 구별하지요. 그는 평소에 먹던 것을 절제하거나, 아니면 식사를 하지 않곤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열심히 몸을 만들어서 사진으로 남기곤 합니다. 바디프로필이라고 하는 것을 찍기 위해 몇달간 자신을 일상적으로 이어온 생활습관에서 구별해 그 시간을 전혀 다르게 사용하지요.
우리는 종교적으로도 간혹 자신을 ‘구별’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 새벽기도를 다니거나, 금식을 하는 경우가 그렇지요. 자신의 일상이나 다른사람들의 평범한 생활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구별’의 한 예를 찾아보자면 ‘삼손’을 들 수가 있지요. 그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보통의 일상과 자신을 구별하여 일평생 머리털을 자르지 않도록 서원을 합니다. 이것이 곧 ‘거룩’은 아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무엇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곧 ‘거룩’이라는 것이지요.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의 삶의 모습으로서의 거룩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의 삶의 모습으로서의 거룩
그렇다면 그 ‘무엇’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의 구별을 ‘거룩’으로 만드는 ‘무엇으로부터의 구별’은 어떤 구별일까요? 우리는 세번째로 이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 이하에는 38절까지 많은 규례들이 따라옵니다. 다 살펴보기 어렵지만 내용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다른 한 묶음은 우리가 타자를 대할 때 지켜야 할 규례들이지요. 여기 ‘타자’에는 우리의 이웃들 뿐만이 아니라 ‘창조세계’와 그 피조물들이 모두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이 내용들에는 ‘무엇으로부터 구별하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대신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있지요. 우리가 ‘거룩’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인용해야 할 본문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그가 이렇게 쓰고 있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은 우리의 전인격적 존재, 곧 우리 삶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19:2처럼 ‘거룩하라’는 명령과 다름없지요.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씁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하자면 ‘이 세대를 따르지 말고, 이 세대에서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잠시 곁길로 새긴 하지만, 중요한 내용을 덧붙여야겠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바울의 말은 ‘이 세대를 미워하라’거나 ‘세상을 배척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적대시하거나 타자화하라는 말은 더더욱이 아니지요. 바울은 ‘세상’을 진정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서 주님게 드렸지요. 심지어 그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유대인도 이방인도, 종도 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세상이든 세대이든, 우리가 용어를 엄밀히 구분할 필요도 있지만 최소한 성경은 세상과 무조건적으로 담을 쌓고 멀리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매우 잘 아는 요한복음이 이미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세상을 먼저 사랑하신 것이지요.
거룩하라, 그 명령
거룩하라, 그 명령
다시 세번째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이 말은 레위기의 수많은 규례들과 ‘거룩’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거룩’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라면, 이 ‘규례들’이 바로 ‘무엇’으로부터 성도들을 구별시키는 행동들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바울의 편지처럼 ‘이 세대가 하는 이 일을 본받지 말고, 너희는 이렇게 행동하여라, 이렇게 살아가라’는 말이 곧 레위기 19장의 규례가 아니겠냐는 것이지요.
흔히 이런 것을 ‘반명제’라고 합니다. 어떠어떠하다,하고 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반대되는, 그것을 뒤집은 말들이라는 것이지요. 레위기 19장이 ‘반명제’라는 것은 레위기 19장의 규례들이 어떤 규례들을 반대하는, 반대되는 규례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3절은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는 모든 날들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날을 노동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너희는 그러지 말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4절은 또 이렇게 읽을 수 있겠지요. ‘너희가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는 헛된 것에 절하며, 자신들을 위해서 신상을 부어 만든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아라.’ 계속해서 본문에 숨겨진 맥락을 살펴 다시 읽어볼까요? 9절 이하는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밭에서 거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 톨도 남김없이 다 거둔다. 가나안 사람들의 그런 행동에는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나 긍휼은 전혀 없고, 자기들의 탐욕만 드러난다. 그러나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그들처럼 행동하지 말아라. 밭 모퉁이는 너희 중의 가난한 이들이 거둘 수 있도록 남겨두고, 이삭이 떨어진 것은 너희 중의 나그네들이 그것으로 한 끼를 취할 수 있도록 남겨두어라. 포도원의 열매도 그러할 것이며’ 13절이하는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는 빚진 자들을 종으로 삼고,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취하고도 힘있는 자들이 제 때 임금을 주지 않는 일들이 있지만, 너희는 그러하지 말아라. 네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일을 시킨다면 그 삯을 결코 다음 날로 미루지 말고, 장애가 있다고, 신들에게 저주받았다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가나안 사람들처럼 행하지 말고 너는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행동하는 것처럼 그들을 존귀하게 여겨라. 왜냐하면 나는 거룩한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너희도 나와 같이 거룩하여라.’
어떠십니까? 이렇게 읽으니 레위기 19장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는지 조금은 다가오지 않으십니까? 19장의 모든 규례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거룩을 위한 규례들은 지금 애굽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아직 땅에 정착하기 전에 광야를 유랑할 때 받은 말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땅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실 때, 가나안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크고 강한 나라들의 질서와, 철학과, 종교와, 탐욕들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어라, 이러한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가 거룩에 관하여 나누는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거룩함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여, 무엇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거룩하여야 할지 윤곽이 잡히시지 않습니까?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하나의 사례입니다. 이 말씀을 살아냈던 한 공동체의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광야생활이 아니라 약속된 땅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위한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노예들에게, 아직 정착하지 않은 광야 여정 중에 전해졌지요. 그리고 이 레위기의 가르침이 재조명되고, 회자되고, 기록되었던 시기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무렵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옛 가나안으로 불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보이는 것은 폐허와 잿더미 뿐인 땅 위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 때, 그 때 레위기는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삶의 지침으로서 다시 가르쳐지고, 낭독되고, 또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문자 그대로 각자도생해야 했던 시기, 자신의 손으로 성벽도 세우고, 논밭을 갈고, 집을 짓고, 날마다 외적에 맞서야 했던 시기, 그때 있던 한 일을 느헤미야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느 5:2-5)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절에 사람들의 아우성이지요. 자녀가 많아서 먹일 양식도 많이 필요한데, 흉년이라 거둔 수확도 적고, 어쩔 수 없이 눈물 흘리며 밭과 포도원을 담보 삼아 빚을 졌더니, 더 이상 갚을 길이 없어 밭도 빼앗기고 심지어는 자녀들도 부잣집의 종으로 팔아야 하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돈이 많아지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지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이 세상과 다름없이 그렇게 예루살렘의 폐허 가운데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것이지요.
그 때 느헤미야가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느헤미야가 하는 말은, 왜 남들처럼 똑같이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이자를 받고 꾸어준다고 해서, 그렇게 계약서에 써있는데로, 철저하게 경제논리대로, 사람의 눈물도 탄식도 보지 않고, 피도 눈물도 없이 그렇게 저당 잡은 것을 다 빼앗아 가고, 심지어는 형제를 종으로 삼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아니냐,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런 시절에, 풀려난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공동체를 재건할 때 회자되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 곧 성도로서 살아갈 그 삶의 기준으로 레위기를 삼은 것이지요. 최소한 그것은,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탐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대세라든지, 절대 다수의 질서라든지, 그런 것에 편승하거나 핑계삼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자신을 구별하여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한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진 삶을 살자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레위기 19장 2절에 이렇게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우리는 이런 유혹을 더 많이 받지요. ‘남들도 다 하는데, 남들도 그렇게 사는데’ 그런데 레위기는 우리에게 현실에 떠밀려 살지 말고, 하나님을 닮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각자도생하는 삶의 어려움 속에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유익만 쫓아 가지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신 하나님을 닮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하자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불러주시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남들과는 다르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 답게,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그것이 이 땅에서 어리석고 때로 불편한 길이라 하더라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좁은 문, 좁은 길로 걸어 생명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건내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기도제목
말씀을 생각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소서.
날이 갈 수록 우리가 거룩하여지고,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 선한 삶을 살게 하소서.
교회를 위하여
총회가 은혜중에 잘 마무리되게 하시고, 담임목사님과 홍창기 장로님의 오고 가는 길의 안전을 지켜주옵소서.
다음주 있을 노회 체육대회가 기쁨의 교제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성도간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2025년 한 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교회될 수 있도록 정책당회 가운데 은혜와 지혜를 허락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