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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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말라
본문 말씀: 누가복음7:11-17
‘바넘 효과’라는 말을 아십니까?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포러 효과라고도 하는 이 바넘 효과는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요. 바넘 효과란, 일반적이고 모호해서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성격 묘사 또는 개인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바넘 효과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성도님들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떠오르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사기꾼’, ‘점쟁이들’, ‘이단 전도자들’, ‘도를 아십니까?’와 같은 ‘사이비 도쟁이들’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들의 사기 전략, 전도 전략, 접근 멘트들을 알아보았는데요. 그들의 접근 멘트, “얼굴이 좋아보여요.” “기운이 좋아 보이네요.” 와 같은 멘트와 더불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멘트가 무엇인고 하면, ‘힘들어 보이세요.’ ‘괜찮으신가요?’와 같은 누구나 공감하고 누구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사용하여 접근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힘들어 보이세요’라는 멘트, 크게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문장이 어째서 많은 사람들의 반응과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본 바넘 효과를 떠올리며, 이렇게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지쳐 있다. 많은 슬픔과 좌절, 낙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제가 너무 일반화 시킨 것 같으실까요? 중고등부 주일 설교로 계속 룻기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 룻기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게 된 한 위인의 말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의 말인데요.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 shot.” 번역하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통계 지표도 하나 보았는데요.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9세~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현대인의 정신건강을 조사했는데, 10명 중 7명이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답을 한 바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이를 불문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과 좌절, 슬픔, 불행 속에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과 관계, 여러 눈 앞에 있는 어려움과 문제로 인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있어야 그들이, 또는 나 자신이 이 지독한 암흑과도 같은 좌절, 낙심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 ‘위로’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또는 나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그냥 보통의 위로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괜찮니?” “울지 마!”, “힘내!” “내가 너와 함께 할게”와 같은 일차원적인, 표면적인 위로, 순간적으로 약간의 효과를 내는 진정제와 같은 위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성도님들과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치료제와 같은 위로인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 즉 희망을 주는 ‘위로’”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어떤 위로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일어날 힘, 극복할 힘을 주는 위로인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본론1
오늘 본문 말씀 11절은 예수님의 행렬을 묘사하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성으로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나인이라는 곳은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로부터 약 40km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인데, 나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아름다움, 기쁨이라는 뜻으로 작지만 아름다운 동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고 아름답고 기쁨의 동네에 모든 사람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할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한 과부의 독자, 유일한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보다 먼저 죽는 것,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가족의 죽음은 무엇에 비할 수 없이 큰 슬픔이지만 그중에서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가장 참혹한 비극입니다.
흔히 아내 잃은 남편을 홀아비, 남편 잃은 아내는 과부, 부모 잃은 자식은 고아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를 일컫는 단어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한자로 자식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가리켜 ‘참척’이라고 합니다. 참혹할 참, 슬플 척. 참혹한 슬픔. 그런 참혹한 슬픔이 기쁨의 도시, 아름다움의 도시 나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슬픔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그녀가 ‘과부’였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은 슬픔, 남편이 있다면 그래도 같이 아파하며 서로를 보듬어주며 회복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마저 없으면 이 여인의 아픔을 누가 같이 나눠질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사회는 여성이 경제적 활동 하기가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남편이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부양했습니다. 만약 남편이 없는 경우에는 아들이 부양했던 것이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같은 경우는 남편을 일찍 잃었기 때문에 자신의 앞으로의 생계, 삶을 누구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들에게 의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까? 아들이 죽었던 것입니다. 이 아들의 죽음은 그녀로 하여금 앞으로의 삶마저 포기하고 싶게 만들만큼의 어마어마한 슬픔이자 고통이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본론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잠깐, 우리가 나인 성의 마을 사람들이 되어보길 원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 이 안타깝고 불쌍한 여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위로를 해주어야 그녀가 조금이라도 힘을 받고, 용기를 얻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저에게 던지면서 “참 어렵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위로도 그녀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만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녀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 “울지마… 괜찮아질거야… 이럴수록 더 마음을 다 잡아야 해…”라고 한다면 이 위로가 그녀에게 위로가 됐겠습니까? 더러는 누군가 그녀에게 와서 “우리가 당신의 힘이 되어주겠습니다.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며 같이 극복합시다!”라고 위로의 말을 건넸을 때, 그 위로가 진짜 그녀를 일으켜세울만한 위로가 됐겠습니까? 혹 누구는 그녀 옆에 와서 그저 엉엉 울면서 같이 울며 동감하고 아파하는 위로를 건넸을 때, 그 위로가 그녀에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만큼의 위로로 다가왔을까요? 아니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 위로들의 가치, 효과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위로들은 분명 그녀에게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힘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잠시간의 아픔을 잊을 정도의 ‘진정제’는 됐을지 몰라도 ‘치료제’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녀 앞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많은 무리들과 함께 그녀 아들의 장례 행렬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녀를 보사 불쌍히 여기시며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울지 말라…’” 이 한 문장의 말. 그녀가 가장 많이 들었을 법한 위로의 한 문장이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 말씀, 이 위로는 달랐습니다. 왜 달랐는지를 다 함께 본문 말씀 14절에서 15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14절: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아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한 후 관 앞으로 가십니다. 여기서 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관이 아닌 널판입니다. 기름을 바르고 수의를 입힌 죽은 아들을 실은 널판 앞으로 주님께서 가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온전히 살아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인을 향해 “울지 말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위로, 다른 사람과 같은 평이한 위로, 공허한 위로, 잠깐의 진정제와 같은 위로였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위로는 그저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위로는 다른 이들의 위로와는 완전히 다른 위로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주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말씀드리며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절망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치료제와 같은 위로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 즉 희망을 주는 ‘위로’다.” 아들을 잃은 과부 여인에게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녀의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을 이기사 3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요! 훗날 우리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사 온전한 몸으로 부활시키실 분이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4절은 우리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아멘!
이런 주님이시기에, 우리 주님의 “울지 말라”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따뜻한 말이었고 큰 위로였으며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본론3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참으로 많은 어려움들과 안타까움, 좌절되고 낙망할 만한 상황들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이미 그 시기를 겪고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실 것이고 혹여나 앞으로 그러한 상황들이 닥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울지 말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그 암울한 상황을, 그 절망을 역전시킬 만한 주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위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누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넘어졌을 때, “으엥” 울며 부모님의 품 속으로 뛰어들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 “주님 나 아파요! 주님 나 괴로워요! 주님 이 억울함, 이 슬픔, 이 고통, 이 좌절, 위로해주세요.” 토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애곡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대충 봐주시고 “그래, 됐다! 그만 가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시는 주님,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울지 마렴. 내가 너의 아픔, 고통 다 안다. 내가 있잖니. 내가 너와 끝까지 함께 할게. 내가 그 고통 싸매어 줄게.”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더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일부 성도님들께서는 아시겠지만, 목사가 되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여야 하고, 신학대학원 졸업 후에는 시험을 봐야 합니다. 이 시험이 ‘강도사 고시’라는 시험인데요. 총 6가지의 과목이 있습니다. 논문, 주해, 강도, 교리, 교회사, 헌법 이렇게 6개의 과목인데요. 이 6과목 중 한 과목이라도 떨어질 경우 1년 뒤 재시험을 봐야 합니다. 여기서 그나마 인간적인 것은 떨어질 경우 모든 과목 재시험이 아닌, 그 떨어진 과목만 1년 뒤 재시험을 보면 됩니다.
여기서 부끄러운 고백, 솔직하게 고백할 것은 저는 이 강도사 고시에서 ‘주해’라는 과목에서 떨어져 내년에 강도사 고시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솔직히 자신이 있었습니다. 다른 전도사님들과 함께 스터디도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모의고사도 잘 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특별한 선배님들 빼고는 거의 다 통과되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나는 떨어지지 않겠지!’ 생각하며 시험을 치뤘고 시험 치룬 뒤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결과 발표 당일이 되고 홈페이지에 들어가 합격자 명단의 제 이름을 찾는데 제 이름이 없는 겁니다. 그 순간 완전 제 마음이 덜컹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결과 발표 당시,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충격이어서 그 즉시 운동을 멈추고 집으로 와서 방으로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결론
한 성경구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길 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이 세상에서의 삶, 울지 말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위로 속에 희망을 갖고 걸어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혹여라도 이 세상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위로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국 이 세상 끝날에 주님께서 나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는 궁극적 소망을 갖고 일어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이 시간 찬양하고 기도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