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7 금요기도회: 아모스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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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2:6-16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모스 2:6–16 NKRV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풍성히 누리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먼저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모스 2장의 말씀으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름받은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북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경고의 말씀인데요. 오늘 이 말씀을 살펴보고 북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경고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 이 말씀을 두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하여 6-8절에서 북이스라엘의 범죄를 고발하십니다. 6절부터 보시면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고발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북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입니까? 바로 정의롭지 못한 죄입니다. 특히 세상의 정의라기 보다는 의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는 성도를 불의하게 다루는 하나님 앞에서 정의롭지 못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의인들을 어떻게서든지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이라는 존재를 세우셨습니다. 국가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불의한 처우를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당시에 이스라엘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의한 처우를 애굽인들로부터 받았습니다. 고된 노동에 시달렸고 갓 태어난 아이들은 죽음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의함 가운데 있었던 이 이스라엘을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정의를 행하셨기에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똑같이 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북이스라엘은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완전히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불의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의인을 은을 받고 팔고,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판다고 합니다. 신 한 켤레가 비싸봐야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그런데 고작 얼마 되지 않은 값으로 가난한 자를 파는 아주 극악의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불의함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7절에서는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비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라고 합니다.
“힘 없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를 도와야 함에도 이스라엘은 그들의 머리를 짓밟았습니다. 또한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고 나몰라라 하고 내가 고통받는 것이 아니니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서 나타날 모습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내 주변에 있는 형제들, 자매들이 힘이 없고 고통받고 있다면 짓밟거나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한 형제요, 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몸인 공동체로 부르셨기에 다른 몸 한 구석이라도 문제가 있거나 아프면 몸 전체가 그 영향을 받아 아프듯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가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 있다면 우리도 아파야 합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7절 끝을 보시면 이들의 불의함은 극치에 다다르게 됩니다. 한 젋은 여인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강간합니다. 바로 아무런 죄도 없는 여인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강간하게 되는 너무나도 끔찍한 범죄를 보여줍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과 성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금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악행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북이스라엘이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약자들을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방식으로 불의하게 다루었습니다.
8절은 7절에 등장하는 약자들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추가적인 범죄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약자들의 옷을 저당으로 잡고 약자들을 희생시켜 얻은 불법적인 포도주를 즐기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저당 잡힌 옷을 해가 질 때까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고, 과부의 옷은 아예 저당으로 잡아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의 옷은 밤의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추위가 찾아오는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자가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옷이 간절히 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생명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저당 잡힌 옷을 해질 때 돌려주거나 과부의 옷은 아예 저당으로 잡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아예 무시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에게 부당한 벌금을 매겨 얻은 수익으로 포도주를 사서 즐겼습니다. 가난한 자를 희생시켜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북이스라엘은 즐기고 있었던 겁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너무나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8절을 더 자세히 보십시오. 이들은 모든 제단 옆에서, 그리고 그들의 신전에서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무단으로 제단을 마구마구 늘려가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예배 방식을 택하면서도 자신들의 예배 방식은 잘못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고, 이들이 세운 모든 제단들은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신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과 무관한 예배임을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이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니 자연스레 하나님의 명령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싫어진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약자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착취하였으며,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의 쾌락을 즐기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불의한 모습을 보이는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전에 하나님께서는 맥락에 맞지 않는 어색한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 북이스라엘을 어떻게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셔야 하는데, 갑자기 과거에 있었던 이방 민족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9절에서는 먼저 아모리 족속을 멸하셨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아모리 족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셨던 것을 말씀하십니다.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모리 족속은 백향목처럼 장대하고 상수리나무와 같이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갓 종살이를 마치고 나온 유목민일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신들도 정탐하고 나왔을 때 가나안 족속들은 네피림 같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다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강한 아모리 족속을 꺾으시고 9절의 표현대로 열매와 뿌리를 진멸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차지한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을 차지했으니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 11절에서 선지자와 나실인을 세우셔서 보호하시고 이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이스라엘이 불의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선지자와 나실인을 세우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누가 있습니까?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선지자이자, 태어날 때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이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중간에 갑자기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11절 끝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라고 질문하면서 이들의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을 북이스라엘에게 기억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 선지자와 나실인을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선지자와 나실인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이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실인이 지켜야 하는 규정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포도주, 특히 독주를 마셔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시게 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깁니다. 또한 선지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바로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동인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의로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경험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과는 반대로 불의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움과 북이스라엘의 불의함을 하나님께서는 대조시키시면서 북이스라엘의 불의함을 다시 한번 꼬집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불의한 북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보이실 반응은 무엇입니까? 바로 심판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실 때 심판을 불로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전쟁은 불을 전쟁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횃불로 어둠을 밝히기도 했고, 불화살을 사용하고, 투석기로 불덩이를 날리기도 했습니다. 불로 성과 건물들을 파괴하였고, 모든 사람들을 불로 공포에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불로 묘사되었다면,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쟁으로 묘사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족속을 멸하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분이 되십니다.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가 흙을 짓누르는 것 같이 자신의 백성을 짓누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짓누름으로 인해 신음하고 고통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시는데요. 바로 북이스라엘의 군대가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공황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14절부터 보시면 아무리 빠른 사람이라도 도망치지 못하며, 강한 사람이라도 자기 힘을 쓰지 못하며, 용감한 용사라도 자기 목숨조차 구할 수 없게 될 것이며 활을 가진 사람이라도 서 있을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고, 말을 타더라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용사인데도 하나님의 심판 날에는 갑옷과 무기를 모두 버려두고 벌거벗은 채 도망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북이스라엘의 군대는 이제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하여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불의하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불의한 행동으로 인해 이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라고 결코 봐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백성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엄히 벌하시며 심판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비춰본다면 어떨까요? 혹시나 우리도 북이스라엘과 같이 우리 주변에 있는 약자들을 불의하게 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것들을 빼앗으며 나의 쾌락을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삶의 자리에 갔을 때 북이스라엘과 같이 불의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백성 다운, 교회의 성도 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언제나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에 우리는 집중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북이스라엘과 같이 막을 때 우리는 불의한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불의한 죄가 결국 남일이 아닙니다. 나의 일, 심지어 지금 내가 범하고 있는 죄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교회 내에 있는 약자를 돌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범죄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항상 적극적인 자세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약자들의 생명을 지켜주어야 하며 그들이 우리와 같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게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구제합니다. 우리와 같은 한 형제요, 한 자매이기에 그들을 우리는 돌봅니다.
또한 우리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힘써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북이스라엘과 같은 길을 걸어선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유익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불의한 북이스라엘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약자들을 돌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키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교회가 되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두고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북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나라였습니다. 약자들을 억압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가 이 북이스라엘과 같은 교회가 되지 않고 교회 내에 있는 약자들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지키는 의로운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시간 이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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