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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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스톱 기도회
논스톱 기도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랑합니다! 논스톱 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기쁜 순간이 언제인가? 보통은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졌을 때, 얻고 싶었던 것을 얻었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었을 때, 놀러갈 때 등등 사람들마다 기쁜 순간이 다르다. 그렇다면 관계 속에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건데, ‘내 마음을 알아줄 때’라고 생각한다. 보통 아무 관계에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고 좋아하고 친밀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나의 마음을 알아줄 때 사람은 가장 관계 속에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반대로 관계 속에서 힘든 순간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에 관계 속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힘들어보이는 친구를 위해 특별한 이벤트로 집도 예쁘게 꾸미고,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친구가 “고마운데 내가 뭐라고 이런걸 해, 이런거 별로니까 다음부터 하지마”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겠는가? 열심히 준비한 만큼 마음이 아픈 것이 없다. 그러나 친구가 “우와, 나를 위해서 이걸 준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 때문에 정말 내가 행복한 것 같아. 너가 이미 내 삶에 선물인데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줘서 너무나 고마워”라고 말한다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뿌듯한 마음과 동시에 행복한 마음이 들게 된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면 상대방이 또는 둘 다 만약에 자기 중심적으로 상대방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관계는 어려워지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 상담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친구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남편이, 아내가, 이성친구가, 부모님이 등등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내 마음을 몰라줘서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상담하러 오는 그 사람은 정작 상대방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문제가 문제를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역지사지를 할 줄 알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기 마련이다. 나를 중심적으로 내 위주의 생각으로 가득찬 관계는 문제에 문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교리를 쭉 설명하고 난 후에 성경 위에 굳건하게 서있음을 강조하며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뜻한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쓰는 표현이다. 이 표현에는 어떤 마음이 있겠는가?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그 마음으로 권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권하는 것은 명령하는 것과 요청하는 것 중간쯤되는 뉘양스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권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가 구약에서 제사를 보게 되면 제물을 어떻게 드리는가? 번제로 드리는 제사는 가죽을 벗겨 각을 토막토막내서 내장과 피를 다 버리고 나온 고기들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제사를 드린다.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는 내장과 피만 제거해서 완전히 불태우고 살코기는 제사장들이 먹는 제사이다. 소제로 드리는 제사는 곡식의 제사인데 이렇게 드려진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가루 한 움큼과 기름과 그 모든 유향을 가져다가 기념물로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제의 예물은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는다고 한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아주 찢고 빻아서 밀가루처럼 부드럽게 될 때까지 만들어서 그것을 전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 움큼을 집어서 기름과 유향과 함께 제단에 불태워 올려드리는 제사이다. 남은 가루는 제사장이 빵을 만들어먹는데 사용해다. 그러니 번제와 소제로 드리는 제사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불로 태워서 잿더미가 될 때까지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레위기에서도 그렇게 드릴 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아주 흡족하시고 기뻐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제사는 끝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도 화목제목을 내 몸으로 드려서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그 모든 제사를 끝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 12장 1절을 읽었을 때 어마어마한 감격이 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거룩하게 살 수도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태였던 우리를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시고, 거룩의 자리로 부르셔서 초청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어마어마한 정체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1절을 다시 읽으면 이제 새로운 정체성으로 영적인 삶을 살게된 자로써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로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너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드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 생각, 내 감정, 내 뜻, 하나님과 가까이하려고 하는 모습에서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모두 내려놓으며 순종의 예배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왜인가? 예수님 조차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는게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와 복들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예배를 드리라고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한다. 여기서 보게 되면 ‘영적’이라는 단어를 보통 성령을 뜻하는 단어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로고스’라는 헬라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쓰인 뜻으로는 한글 성경은 영적이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번역과 헬라어 단어를 살펴보면 ‘합당한, 이성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말은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는 사람만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예배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미련해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일, 예배하는 것은 가장 이성적인 행위이다. 왜인가?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는가? 누가 우리를 구원하시는가를 아는 사람은 예배와 기도를 안드릴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평생토록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은 사람들 중에 있는가? 심지어 나 자신도 내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없는 영역들이 많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도우실 수 있으시며, 죽음에서도 건져내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일만큼 이성적이고 확실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오히려 영원하지 않는 것인 썩어질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이성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하여 2절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베스트셀러 책에서 빠지지 않는 장르가 ‘자기개발서’이다. 참 재밌는 것은 자기개발서를 처음 썼던 부류의 사람이 미국에 개신교 목사님들이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내용들로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불과 10년 전에 2년이나 넘도록 베스트셀러였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며 훈계하는 내용, 부정적인 것 같은 내용을 싹 지우고 위로와 격려만 하는 글들로 전략해버렸다. 그러면서 스님들도, 무당들도 자기개발서를 써서 결국에는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은 허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으로 만든 것이기에 허상이라고 말하는 내용을 넣는다. 그렇게 자기개발서가 유행을 할 때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어느 목사님이 쓴 책이 있다. 책 제목은 <거대한 사기극>이다. 책 내용 중에서 사람들은 학교에서 중학생 때부터 좋은 대학을 가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다.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서 대기업이나 연봉 높은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다가 자산이 30억도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가르친다. 결국 30억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낳게 만든다. 이러한 한국의 교육에서 잘못된 점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로 30억이 없으면 불행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큰 복인데 지금의 내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개발서의 폐단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서 미디어나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그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는 영향을 안받을 수가 없다. 세상의 말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것에 따라 선호하는 것이 달라지고 미의 기준, 재벌의 기준 등등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어느 것도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기에 진리라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오늘 읽었던 로마서 12장 2절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이 등장한다. 이는 이전에 나를 위해서, 나의 영광과 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았던 죄악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인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길 힘쓰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육체를 입고 있어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나는 어떤 비싼 스포츠카를 몰고 있는 헤어 디자이너에게 인터뷰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이 차를 살 수 있게 되었냐고 물어보자, “뇌가 시키는 것을 반대로 하면 된다”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했다. 또 김창옥이라고 하는 유명 스타 강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갈 때 좋은 것을 하지말고 갈 때 싫은 것을 좋아하라고 하는 강연을 잠시 듣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사람들은 돈을 잘 버는 법이나, 성장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아는 것 같다. 인간의 육체가 원하는대로 살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들이 되기에 결국 공허하게 만든다. 우리가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다 먹고나면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행복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나를 채울 수 없다. 또 세상에서는 그런 말이 있다. 편안하게 살려면 혼자살고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야한다. 근데 여러분 주변에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행복해보이는 사람이 많은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은가? 그렇다. 결혼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혼이라는 제도는 언제 완성되는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교회가 신부되어 진정한 결혼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다. 무엇을 이루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인생의 선배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두 남녀가 만나서 주님 다시 오심을 꿈꾸며 서로 사랑할 때 그 가정에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복하려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삶에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나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면 힘들다. 내가 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잘되기 위해, 내가 평안을 누리기 위한 신앙생활은 금방 무너지기 쉽다. 그 모든 신앙생활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신앙생활하는게 체력적으로 너무나 힘들 때가 많다. 매일 새벽기도를 가야하고, 수요예배에 금요기도회, 주일 예배 등등 이렇게 살다보면 피곤할 때가 많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다면, 교제할 수 있다면 그 피곤함도 오히려 즐겁고 기쁘게 된다. 이전에 찬양인도 했을 때에는 내가 사람들에게 믿음 좋아보이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멋있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지치고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할 때 비로소 체력적으로 힘들어도 계속해서 기쁨으로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은 이전에 나를 위해 살았던 삶에서 완전히 돌이켜 결국 하나님을 위해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분명한 것은 달달한 말씀, 위로의 말씀도 좋지만, 그것보다 쓴 말씀 마음을 찌르고 나의 죄된 모습을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을 기뻐하길 소망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 물들어 더이상 회생이 어려운 상태가 오게된다. 그리하여 영적 나태함에서 벗어나길 소망한다. 이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안주하고 더 하나님을 알기를 싫어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길 소망한다. 남녀간에 사랑에서도 적당히가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는 적당히가 없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더 알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그 말씀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그 말씀에는 나를 바꾸는 능력이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는 신앙생활이 피곤하고 지치더라도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감동으로 살아가고 사랑할 때 매일의 삶 속에서 기쁨이 넘칠 줄 믿습니다. 그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