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칼리지-갈라디아서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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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앙, 거짓 신앙(갈 5:2-15)
나는 모태신앙, 그런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 전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생명력이 없는 죽은 신앙이었다.
교회 안에 생명과 관련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생명과 관련 없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다.
하나님은 그걸 구분하신다.
<바른 신앙의 특징>
1)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유하다. (갈라디아서의 5장 1절을 다시 보자.) 이것은 다중적인 자유이다.
갈라디아서 5:1 (NKRV)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가) 하나님의 호감을 사려고,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뭔가 해내려는 율법의 압제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스스로 어떤 노력이나 자격이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 호감을 얻는 것이 불가능함을 율법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다.
율법 앞에 섰을 때, 율법을 완전히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 죄인이다.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 호감을 얻기 위해 우리의 업적과 공로가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알려준다.
이걸 아는 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나) 하나님 앞에서 참 자유를 얻으면 자기로부터 자유하다.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고,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던 것으로부터 자유해진다.
아무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자기를 가치 있게 만들려고 하는 자기중심적 자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다) 이런 자유를 얻으면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이 땅의 돈과 명예와 사람의 평판에서 자유를 얻는다.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으신 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명예를 얻는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예를 위해서 살아선 안 된다.
성경은 땀흘려 돈을 버는 것을 절대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위해 살아선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얻으면 이 땅에서 자유를 얻는다.
라)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자유를 얻는다.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가지고 태어난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떼어낼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그 모든 죄를 해결해주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다.
우리 성도는 이 귀한 자유 위에 굳게 서야 한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선 안 된다.
만약 우리 신앙생활이 기쁨이나 자발적인 게 아니래 매여서 하거나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거라면, 아직 바른 신앙에 서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신앙이 어리고 연조가 짧아서 자발적으로 할 수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훈련을 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연조가 있고, 예수를 분명히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신앙 생활을 매여서 하거나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면,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유가 없는 신앙은 참된 진리를 따르는 신앙이 아닐 수도 있다. 위험한 자리다.
바른 신앙은 자유를 가져다주고, 그 자유는 우리가 자원함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와 기도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거짓 신앙에 대한 경고>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른 신앙에 굳게 서는 것을 방해한다. 그들의 방해전략은?
갈라디아서 5:2 (NKRV)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한다.
예수를 믿는 것도 좋고, 은혜를 따라 구원받는 것도 좋은데 그게 전부가 아니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금식을 행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믿음과 은혜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위험은 갈라디아 성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찾아온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값없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다가 왜곡된 종교성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면 은혜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 외적인 표시를 갖추고 싶어한다.
그런 잘못된 신앙은 어떤 결론을 도출하냐면, 2절의 후반절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예수님을 믿는 것에 외적인 행위를 더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은,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온전한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찾아오는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고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한다.
갈라디아서 5:4 (NKRV)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할례를 받는 것과 같은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건, 예수님과 자신은 상관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구원은 아무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이다. 예수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뭔가 율법을 더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뭔가를 더하려고 하면 은혜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자들은 믿을 구석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여기며 산다.
자신은 남들과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니까 자기 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값없는 은혜로부터 멀어진다.
그렇게 계속 살면 생명이 없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1) <성령으로 사는 것>
갈라디아서 5:5 (NKRV)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바른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을 내세우는 게 아니다. 바로 성령의 감동과 인도와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생활이다.
사실, 할례는 바로 내면의 표시였다.
할례는 받은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표시였다. 그런데 어느새 할례가 모든 사람에게 외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지난번에도 읽어드린 로마서 말씀.
로마서 2:28–29 (NKRV)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마음에 할례를 하는 것이다.
2) <믿음을 통해 사는 것>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믿음을 의지하는데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어쩌면 자기 감정을,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금식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런 믿음을 의지하는 건, 자기 의를 의지하는 길로 샐 수도 있게 한다.
믿음은 나의 연약함을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평판을 붙들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나같은 걸 사랑하시고 쓰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는 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바른 신앙 3) <의의 소망>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의롭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할 때가 참 많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에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이 계속 싸운다.
의와 죄가 계속 싸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날을 소망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해주신 것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말과 행위로 의로워지는 그 날을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한계 때문에 넘어진 순간에도 그 날을 소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인생이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란다.
그런데 무엇이 더 나은 방향인지 바르게 분별해야 한다.
노후가 보장되고 더 건강해지고 자식이 잘되는 것을 뛰어넘어 내가 의로워지고, 나의 가정과 공동체가 의로워지는 방향을 사모해야 한다.
바른 신앙 4)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라디아서 5:6 (NKRV)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6절에서도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무슨 믿음인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
사랑이 무엇인가?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한정돼서 하는 게 사랑이 아니다. 상황이 될 때 하는 사랑이 아니다.
남을 때 일부분을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꺾는 것이다.
사실 본성적으로는 할 수 없는 사랑이다.
자기가 직접 낳아 기른 자식에게 마음을 쏟으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본성적인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이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성적으로 거부하고 싶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 잔을 옮기실 수 있으시면 옮겨달라고 기도하셨다. 본성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그 본성을 부인하시고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정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육체가 끌리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사랑하셨다.
6절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는 효력이 없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인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인가? 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인가? 후원을 많이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저 사랑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통해 이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 안으로 달음질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유대주의자들에게 흔들리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바울이 말한다.
갈라디아서 5:11 (NKRV)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바른 진리는 할례를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해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이 십자가 복음은 걸림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오해해서 들으면 안 된다. 십자가 복음이 우리 성도가 바른 길로 가는 데에 걸림돌 역할을 한다는게 아니라, 우리 속에 죄 된 본성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라는 말이다.
십자가 복음은 항상 우리의 본성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그러면서 우리 본성을 고단하게 하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 실망시킨다.
나의 만족을 위해 욕심 부리지 마라.
대접받고 싶은만큼 남을 대접해라.
도움이 필요한 자를 모른척하지 마라.
너 자신을 부인하라.
남을 위해 희생해라.
우리 본성이 이 복음을 마주하면 어떨 것 같은가?
성가시다. 귀찮다. 짜증난다. 우리 본성에게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이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흐릿하게 만들고 장애물처럼 여겨지지 않을 만큼 그 높이를 깎아내린다.
예수를 믿으면 돈 잘 벌고,
병이 무조건 낫고,
명예를 얻게 되고,
만사가 형통할 것이고,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말한다.
우리 본성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바울은 이런 거짓말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한다고 할만큼, 이 나쁜 권면이 큰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5:14 (NKRV)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할례를 받고 여러 조항을 행하는 것에 있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지 않은가?
마태복음 22:37–40 (N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를 치장하고, 나의 육체의 욕심을 위해 애쓰며 살아야 할까?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까?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 위해선 성령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럼 육체의 욕심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육체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른다. 그 인생에 찾아오는 결과는 이렇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갈 5:16-26)
육체에 속한 삶의 결과
갈라디아서 5:19–21 (NKRV)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첫 번째는, “성적 타락”이다.
성령을 거스르고 육체를 따르면 성적 타락에 빠지기 쉽다. 음행하고 더러운 것과 호색을 즐기기 시작한다.
음행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모든 성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런 음행을 일삼으면 사람이 더러워진다. 이렇게 더러운 죄로 얼룩지게 되면 결국 호색에 이른다.
호색이 뭔가?
이제 완전 드러내 놓고 거리낌 없이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성적인 유혹에는 나이 고하가 없다. 나이가 많아도 성적 욕구가 계속 쫓아다닌다. 죽을 때까지 성령을 따르며 성적 욕구를 제어해야 한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는다.
두 번째는, “우상 숭배와 주술, 술 취함과 방탕함”이다.
우상 숭배는 자기중심성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우상은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것을 허용해 주는 자신만의 신이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생각하는대로 살고 싶어서 만든 허상이고, 자신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주술 또한 자기를 위한 것이다. 자기를 위해 악한 것을 이용한다.
악귀를 내쫓기 위한 목걸이를 메고 다닌다. 결혼 날짜를 잡는데 무당을 찾아간다. 점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쓰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술 취함과 방탕은 어떠한가?
자기 자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자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술과 방탕함에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세 번째는, “관계의 깨어짐”이다.
육체의 일을 따라가면, 부부 관계, 가족 관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진다.
육체의 일은 자기 자신의 쾌락만 중요하다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생들은 외적으로 볼 때는 멀쩡하게 보일지 몰라도 속은 아주 썩어 문드러져 있다.
사람의 속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 뿐이다.
2. 성령의 열매
성령님을 따라가면 썩지 않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갈라디아서 5:22–23 (NKRV)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게 있다.
19절에서, 육체의 일은 원어상으로 보면, 복수형으로 돼 있다.
하지만 5장 22-23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단수형이다. 여러 가지가 열거되지만, 이 모든 게 하나의 열매라는 것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일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부조화스럽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하나다.
일관성 있다. 통일성 있다. 좋은 의미로 단순하다.
성도의 가정 생활, 직장 생활, 교회 생활을 다 둘러보아도 일관성 있고 통일성 있는 태도가 나타나보인다.
성령의 열매이니까 맛과 향과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그래서 직장 동료들이, ‘어우, 교회 사람들 안 좋게 봤는데, 철수씨 보면, 영희씨 보면 교회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럼 성령의 열매를 한번 살펴보자.
첫 번째는, “사랑”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랑, 자기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이 우릴 먼저 그렇게 사랑하셨다.
이 사랑을 알면, 삶에 “희락”이 찾아온다.
기쁨이 생긴다는 것이다.
육체를 위해 뭔가를 해줘도 기쁨이 생긴다.
그런데 그 기쁨은 인스턴트다. 일시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그 조건없는 사랑을 누리는 이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누린다.
내 죄 때문에 넘어진 순간에도 그 기쁨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 기쁨은 “화평”으로 이어진다.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자는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다.
다른 이를 돕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가득한 곳에서도 그들을 화평케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만든다.
이런 자들은, “오래 참는다”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오래 참는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이다.
내가 짠 시간표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시간표가 더욱 확실하다는 것을 믿고,
그 시간표가 저 사람에게도 신실하게 적용될 것을 믿고 오래 참는다.
오래 참는 자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자비”의 눈으로 다른 이를 바라본다.
이 눈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본다.
누군가는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을 볼 때도, 저 사람 속에 있는 상처를 본다.
영혼을 꿰뚫어 보는 자다. 이런 자는 다른 이의 영혼을 치료할 줄 안다.
“양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선은 말그대로 선행이다.
자기의 물질과 시간을 써서 이웃의 아픔을 만져주고, 회복시켜준다.
이런 자의 삶에 대한 태도는 “충성”스럽다.
이 세상에 재능 있는 사람은 많지만, 충성스러운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충성스러운 자는 진실되다. 진실된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기에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워간다.
이들은 또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온유는 그냥 성격 좋고, 착한 거랑 다르다.
온유한 자는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강인하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줄 안다.
그리고 거친 방법이 아니라 부드럽게 그 분별한 것을 정리한다.
그럼 한 사람도 칼에 베임을 당하지 않고 회복한다.
그는 “절제”할 줄 안다.
자기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다스린다. 그래서 다른 이를 살린다.
이와 같은 것을 어떤 율법이 금지하겠는가?
어떤 율법도 금지할 수 없다.
이 귀한 성령의 열매를 어떤 자들이 맺을 수 있는가?
갈라디아서 5:24 (NKRV)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다.
우리도 십자가에 나의 육체의 정욕이 못 박힌 귀한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
그러니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이 귀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다.
#짐을 서로 지라(갈 6:1-10)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힘써야 될 일은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6:2 (NKRV)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 짐을 져야 한다.
다른 이의 짐을 져줄 줄도 알아야 되고,
나의 짐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자존심 때문에 내 짐이 너무 무거운데 다른 성도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면, 무너질 수 있다.
그러니 서로 짐을 져 주어야 된다. 그 곳이 교회이다.
서로 짐을 져 줄 줄 아는 성도가 믿음이 강한 성도다. 말씀 한 구절 보자.
로마서 15:1 (NKRV)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세상은 다른 이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지만,
성도는 약한 자의 약점을 직접 담당한다.
책임져 주고, 도와 주고, 회복할 때까지 함께 있어준다. 절대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그 성도의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을 괴로워 한다. 귀한 마음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 다 보면, 혼자 힘으로 절대 질 수 없는 짐이 있다.
그런데도 다른 지체들과 함께 나눌 줄 모르는 것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증거다.
홀로 서려고 하는 태도는 자기중심성의 또 다른 양태이다.
다른 지체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고 맡기지 않으면 자기의 고통과 상처 때문에 공동체가 병들 수도 있다.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서로 짐을 하께 나누어 주는 공동체가 교회다.
짐을 나눠 지기 위해선,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6:6 (NKRV)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같은 셀원들끼리 바이블 칼리지를 함께 수강하거나, 함께 목요영성집회에 참여하거나, 함께 셀양육플러스를 수강하거나, 함께 셀전도를 하고, 함께 심방을 가서 기도해주자.
셀은 그런 곳이다.
자기가 들 수 있는 가벼운 짐을 한 손에 들고, 혼자 들기 무거운 짐은 옆 지체와 양손으로 함께 들고, 좋은 것이든 힘든 것이든 함께 하는 공동체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육체를 위한 것이고, 육체를 위한 일은 반드시 썩어질 것을 거둔다.
하지만 성령을 위하여 서로 짐을 지는 공동체는 영생을 거둔다.
9-10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6:9–10 (NKRV)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남 좋은 일만 하면 나는 누가 챙겨주냐고..
남을 위해 좋은 일 해봤자 알아주는 사람 없고, 눈에 보이는 결과도 없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한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이르고 놀라운 복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즉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갖춘 사람이든, 내가 미워하든 사람이든,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더욱이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서,
그 선한 영향력이 교회 전체로 흘러가게 하라고.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시길 축복한다.
#생각해볼 질문
나는 하나님의 호감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업적과 공로를 쌓으려고 하는 성도인가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열매를 맺는 성도인가요?
나는 다른 성도의 약한 점을 품어주고 그들의 짐을 대신 지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가정, 셀과 공동체가 나 자신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서로의 짐을 대신 지며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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