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5:16-26 성령을 따라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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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방금전 안수집사님들이 특송했던, “선한능력으로” 이 찬양은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 시로, 그가 2차 대전 당시 감옥에 갇혀 쓴 시입니다. 본 회퍼는 교회 공동체는 성령을 통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성도의 교제를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인격이 서로에게 부단히 헌신함으로써 새로운 인격이 실현되며, 이와 함께 새로운 인격들의 교제가 실현된다. 자신의 생명을 잃기를 원하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직 그리함으로써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인격들의 삶은 참으로 하나님이 만든 성도들의 교제로 인도한다. 각자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 실현을 위해 봉사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전서 12장 4-7절을 인용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교회 안수집사님 헌신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안수집사 헌신예배를 설교를 맡으면서, 우리 집사님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교회와 공동체는 다른 것은 없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인간의 방법과 힘으로 움직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을 통해 자격없는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우리는 이미 죽었지만,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격 없는 우리를 부르셔서 이렇게 놀라운 신분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 사실을 놀랍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사는 것이, 내 안에, 내가 육체 가운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이 “나”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바울은 이제 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바울을 위해서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분이 이루신 일을 정말 믿고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못 박혔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별로 한 것이 없는데 그의 신분은 완전히 바꿨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분들이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직분이 이런 의미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나의 혈기와 나의 생각, 내 중심의 삶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수집사로 세우셨습니다.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을 위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분을 위해 사는 것뿐이라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존재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우리들에게, 즉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우리들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받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 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구절을 보면,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신분을 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분이 바뀐 것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 속에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그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가르치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는 주체적인 역할을 하신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나는 일이 객관적인 사실이고 진리라고 한다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주관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이론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 속에서 새롭게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자신이 떠나고 다른 보헤사가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헤사가 누구이십니까?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라는 단어는 “우리를 변화시는 분, 도와주시는 분, 대언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변호하시고 도와주셨던 것처럼 또 다른 보헤사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변호하고 도와주신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제 성령님이 우리 속에 와서 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변화된 신분을 확실하게 이야기 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용어는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얻은 용어입니다. 헬라어는 “크리스티아노스”인데, ‘그리스도께 속한 자’ ,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입니까? 이제 예수를 따라가는, 그분께 속한, 그분의 소유된, 그분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이제 우리가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지배하던 정욕과 욕망과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욕과 욕심 다음에 나오는 ‘자기의 육체’라는 표현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몸을 뜻하는 body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self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죄 된 성품’, 즉 하나님 없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맘대로 하고 있는 성품을 말합니다. 이 육체를 못 박는다고 말합니다. 왜? 죄 된 성품을 못 박습니까? 우리의 죄 된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정욕과 욕심과 죄 된 성품은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서 그런 것들이 올라오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내적 욕망을 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에서 분노가 올라올 때, 속에서 시기와 질투와 음란한 생각이 들 때 환영합니다. 분명히 죽은 것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버린 것인데, 하나님이 거절하시고 끝내신 것인데, 사도 바울처럼 못 박지 않고 환영합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지은 죄를 짓고 또 짓고, 반복해서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리심을 입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 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속에는 여전히 두 가지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변화된 신분은 영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삶의 현장에는 두 가지 욕망이 공존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신데도 우리는 아직 육신을 입고 있어서 우리 몸속에 죄 된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26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두 가지 욕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두 가지 욕망이 공존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욕망’이라는 단어는 보통 나쁜 뜻을 함축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육체의 욕망’ 과 ‘성령이 바라시는 것’이라고 대조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어로 보면 이 단어의 의미는 중립적입니다. 그냥 ‘육체가 바라는 것과 성령이 바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욕망이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욕망과 함께 살았고 그것이 하자는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옛날에는 내 속에 계시지 않던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일하시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평안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완전히 주저앉고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시는 상태가 되기 전에는 우리 속에는 계속 갈등이 생깁니다. 예전에는 거짓말을 하면 쾌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예수님이 마음속에서 그러한 것들이 잘못되었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전 육체의 욕망이 늘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육체의 욕망이 성령이 바라시는 것을 거스르고 성령과 서로 대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육체의 욕망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 욕망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입니다. 그 다음은 원수 맺음, 다툼, 시기, 분냄, 분쟁, 분열, 파당, 질투입니다. 마지막으로 술 취함, 흥청망청함, 먹고 마시는 놀음입니다. 첫 번째, 육체의 욕망은 도덕적인 해이, 도덕적인 죄를 가져옵니다. 음행은 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건강한 성의 테두리를 넘어선 것들을 음행이라고 합니다.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같은 것들을 다 도덕적인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원수맺음에서 질투’까지의 긴 목록은 관계와 관련이 있는데, 모두 관계를 깨뜨리는 것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술취함, 흥청망청함, 먹고 마시는 놀음’은 생활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육체의 욕망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음행, 방탕, 우상숭배, 서로 분내고 분쟁학고 분열하고 파당을 짓고, 질투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이 관계와 관련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같이 다른 사람의 권위와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또한 술취함,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도 있습니다. 이런 생활방식은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전에도 경고했지만, 또다시 경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수많은 행위들을 가볍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까 좀 놀아도 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재차 경고하는데, 너희들 그러다가는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수 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줍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신분을 바꾸셨기에 우리를 이제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을 무시하거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 끝에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은 아주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성령의 욕망을 따르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22절부터 성령을 따를 때 맺는 열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가져오는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성령에게서 왔는지 육체적인 욕망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려면 이런 열매를 내는지를 보면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사랑, 기쁨, 인내, 친절, 절제와 같은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성령을 쫓아 해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23절은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대조되도록, 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고, 성령께서 이런 열매를 맺고야 마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간다면 그렇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기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랫동안 다녔어도 성령을 좇아 행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어도 여전히 인간적인 모습이 마구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그러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우리 속에 거룩한 모습과 변화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것을 배우지 않고 연습하지 않으면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으면 옛날 것들이 나와서 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오래 믿으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더 성령을 따라 행해야합니다. 더 온유해지고, 더 절제하고, 더 친절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제대로 믿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2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원어를 보면, “성령과 함께 걷어라. 성령으로 살아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것, 성령에 의해서 사는 것, 성령을 따라 가는 것,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 이 말씀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성령이 지도해주심에 따라 갈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에는 “따르다, 동의해서 따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과 함께 보조를 맞추자, 성령님과 같이 발을 맞추어 걷는 것처럼 걷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들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들, 우리가 가진 가치관, 습관들, 과거의 정신적인 상처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성령께서 우리를 지도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지도를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본문은 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군대에서 쓰는 용어처럼 “나를 좇아라”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연인이 손깍지를 끼고 걷는 것처럼, 함께 손깍지를 끼고 같이 걷는 모습, 잠깐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평생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이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모습입니다. 바라기는 안수집사님 헌신예배에 오신 모든 분들이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육체의 욕망이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 다니며 우리를 유혹하고 정죄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한다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신 일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놀랍게 이루어진 일들을 부인하면 성령님과 동행할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일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성령과 함께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야, 내 인생은 형편없을 거야, 나는 잘 하는 하는 것도 없어”가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어”라고 선포하는 삶을 사시기 소원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감당할 때,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동행하고 함께 살아는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특별히 안수집사님의 삶과 가정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