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6-1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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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
로마서 1장 16-17절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럽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 인터넷 기사나 신문을 보면 교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으로 싸우는 모습, 아들에게 세습하는 모습, 불투명한 재정, 화려한 건축, 성직자의 불륜, 성적인 타락, 목회자의 도덕성, 그리고 연일 보도되는 큰 사건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2022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 국민일보와 사귐과 섬김 부설 코디연구소에서 “기독교에 대한 대 국민 이미지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18.1% 였습니다. 가장 호감이 가는 종교는 천주교이고, 그 다음은 불교였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같은 현상들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존 맥아더 목사님은 1993년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세상의 거의 모든 유행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방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공이라는 이름아래 교회 성장주의, 실용주의, 세련된 마케팅을 교회 내에 도입했고 그 결과 교회들은 영적인 굶주림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과 똑같아 졌다.” 그러면서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만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을 기록했던 바울은 어땠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방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이 미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2천년 전 바울이 이 증언을 한 이 시대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음에도 라틴어보다 헬라어가 더 통용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즉 헬라의 철학과 전통이 여전히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철저하게 권력과 무력을 신봉해 힘의 철학이 병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유대 땅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자라 활동했던 30세 정도의 목수 출신 유대인 청년이 전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 로마 사람들은 처형하지 못하는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범죄자가 “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을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말하는 것은 로마 사람들, 이방인들,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어 보일게 뻔한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복음이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이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울은 이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왜 복음이 자랑거리입니까?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뿐더러, 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까지 증거하려 했던 복음, 이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입니까?
먼저 바울은 복음이 부끄럽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우리는 거의 대부분 구원을 미래적 개념 정도로 만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이 마치고 난 뒤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어 천국 가는 것, 그 정도로 생각합니다. 정말 구원이 그런 것입니까? 만약 구원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죽음 직전에 예수 믿으면 되는 것에요.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잘 믿어 천국가기 위한 도구가 구원이라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복음은 지금 이 시간에 꺼내서,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어려운 삶속에 사용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는 “칭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의 완전한 영광은 미래에 나타나겠지만, 바울은 자주 이 구원이 단지 미래에 일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구원은 현재를 향하면서 사람들을 죄의 상태에서 구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로움과 박해에서 구출한다. 구원은 미래의 소망인 동시에 현재의 실재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구원이 사람들의 삶속에 침입할 때 그 구원은 그들이 뒤돌아볼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이 된다. 그들은 구원 받았고 구원 받고 있으며 구원 받을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 받았고 구원 받고 있으며 구원 받을 것이다” 이 설명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 성화, 영화” 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칭의란 구원의 과거적 개념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이미 의롭다 함을 입었다. 우리는 이미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칭의가 과거형인 반면, 구원의 현재형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현재진행형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 땅에서 매일 매일 죄와 싸워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현재적 개념인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복음의 감격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 현재의 내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현재적 개념인 성화를 추구하기 위해 이 땅에서 죄와 죄를 부축이는 세력과 날마다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이 집요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나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때가 되면 우리를 괴롭혔고 우리를 억눌렀고 우리를 계속 공격하는 죄의 존재 자제가 없어집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가 주는 여러 가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입니다.
이 세 가지 시제로 구원을 이해할 때, 칭의는 이미 우리가 구원 받은 과거형이고, 성화는 현재 진행형이고, 영화는 미래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렇게 말합니다. “Already, But not yet”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주일예배 때 담임목사님께서 하신 마가복음 강해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받은 구원과 지금 받고 있는 구원 또 미래의 받을 구원 사이에 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죽어서 천국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삶속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 삶 가운데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영국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책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죄라는 외국 주둔군의 그늘 아래서 살고 있다. 아무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다. 그 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멀리서 전투가 있었고 전세가 뒤 바뀌었다. 이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주둔군은 혼란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나치는 유럽 전역에서 추출 될 것이다. 다만 그들은 아직 이 나라에 주둔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완전히 뒤 바뀌었다. 승리와 해방의 기운이 퍼져나간다. 이미 해방된 듯한 기분이다. 언젠가 싱가폴에 포로 수용소에 있었다는 한 남자를 만난적이 있다. 그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적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용소내 분위기가 일시에 돌변했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이후 1년 만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전에 유럽 전역에서 이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승리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이미 승리했다. 적들의 등뼈는 부서졌다. 우리는 이제 승리의 감격 속에서 기나긴 압제의 밤이 끝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면 된다.”
눈으로 보이는 이 세상은 악한 것들이 득세하는 시대입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나는 적들에게 잡혀 포로 수용소에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단파 방송을 통해 들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연합군의 승리소식입니다. 몸은 포로 신세인거 같지만, 연합군의 승리 소식 때문에 이제 이겼다는 소식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가 승리하셨기 때문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구원의 감격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멀리 죽기 전에 천국가는 도구가 아니라, 현재 우리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이 복음을 부끄럽지 않게 여긴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 “디카이오쉐네 데우” 라는 단어를 사용한데, “하나님의 의롭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위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 혹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도 없는 산에 올라가 고행을 하거나 몸부림치는 행위를 합니다. 중세시대가 이러한 시대였습니다. 불행한 것은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날마다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지난주 십일조 안했더니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두려움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때문에 고행을 하면 할수록 절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일반적인 명제나, 하나님의 속성이나 인간의 도덕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자력으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안으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수용하면 받아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을 읽다가 깨달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우리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현할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안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루터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열심히 신앙생활도 했지만 오히려 그의 신앙생활은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가르쳤던 하나님의 의는 정의였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7시간 기도하고 고행도 행했지만 더 불안하고 공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두려움이 생기면서 하나님에게 분노가 생겼습니다. “어차피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말했던 자가 루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진정한 복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롤렌드 베이컨 “마틴 루터의 생애”에서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 위해 몹시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나에게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였다. 그것은 내가 의라는 말을 하나님의 의로운 분이고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는 털끝만큼 흡잡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투정하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나는 바울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져 있을까 계속 고민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의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열린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성경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내 속은 증오로 가득 채워졌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것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다. 더 큰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완전히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자들,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는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신 사건, 즉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의 죄가 다 사라졌을 뿐 아니라, 죄로 물든 하나님과의 삐뚤어진 관계가 다시 세워진 관계가 되는 것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이 바로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이제는 과거의 삶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런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자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믿음에서 믿음으로” 여기서 믿음이란? 헬라어로 “피스티스” 이란 단어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로마서 3장 3절에서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에서 “하나님의 미쁘심” 이 “피스티스”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된 곳이 있는데 로마서 3장입니다. 22,25,26,27,28,30,31절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미쁘심, 신실하심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이 사실을 17절 마지막 절에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다시 말하면, “오직 의인은, 성도는 하나님의 미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호야김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야김은 폭압적인 정치를 일삼아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탐욕적이고, 부패한 왕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하박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폭정으로 다스릴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까? 왜 의인들이 고통을 당합니까?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은 답하시는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의인이 고통 당합니까?” 묻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박국 1장 6절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여기서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박국은 “지금 악인들은 자기 욕심으로 땅을 넓히고 부당한 이익으로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언제까지 참고 계십니까?”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 하박국에게 상상도 못할 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 갈대아 사람,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정복하고 포로로 잡아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다시한번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2장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민족을 통해 하나님 백성 안에 있는 악한 자들을 징벌합니까? 말도 안됩니다.” 이렇게 질문하자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장 3-4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 본문을 사도바울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깨달은 것처럼 “믿음으로”는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이 뜻은 신실함, 확고함, 견고함을 의미합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으로”가 무엇이었습니까? “피스티스” 그 뜻은 신실함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신실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실함이 무엇입니까? 신실함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약속이 비록 더딜 지라도, 비록 지체된다 할지라도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성도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2022년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아도, 정치와 경제를 보아도 참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으로 평생을 살아가기도 하고, 배우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홀아비나 미망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학에 떨어질 수도 있고,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자리를 얻지 못해 백수가 될 수도 있고, 직장을 얻은 후에는 언제 실직할지도 모릅니다. 건강한 부부에게서 선천적인 장애우가 태어날 수도 있고, 부부사이에 갈등이 커져 이혼의 아픔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아이들이 학교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고, 성폭력과 성추행으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수많은 고통 절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우리가 구원 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비록 여전히 악한 것들이 득세하고 있고, 눈에 보기에는 감옥 안에 있는 것 같지만,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승리하는 비결임을 깨닫고 날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강함을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래서 진짜 승리를 경험하기 원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