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8-25 진노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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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노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1장 18-25절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말씀인 로마서는 다른 서신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은 서신서는 대부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특정 목적을 위해 쓴 편지들입니다. 하지만, 로마서는 어떤 문제나 분쟁에 있어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단순히 편지라고 말하기보다는 “구원의 복음에 관한 완벽한 논문” 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로마서를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로마서가 없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바울은 지금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 로마서를 처음 기록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말하고 로마서를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1장 1-1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18절부터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본론으로 들어가는 첫 문장부터 심상치가 않습니다. 마치 암흑의 터널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흔히 로마서를 생각할 때, 로마서는 구원의 책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가장 복음을 잘 설명하는 책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의 책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잘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잔뜩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놓고 난 다음 본론에서 하는 말이 “진노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서론에서는 17절의 말씀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 뒤, 왜? 하필 진노의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 생각하면,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씀을 우리는 즐겨 고백하고 찬양하기를 좋아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진노하시는 하나님, 즉, 화를 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본능적으로 가까이하기 싫어하고,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을 처음부터 부정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사랑의 하나님과 진노의 하나님은 서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면 사랑이고, 진노면 진노지 어떻게 사랑하면서 진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노하는 자로 보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죄인을 심판하려고 준비한 지옥까지 부정해 버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든 간에 진노, 지옥 같은 말을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초대기독교교회 시기에 이렇게 생각했던 집단이 있었습니다. “마르시온” 이라는 이단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성경에서 진노의 내용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어디입니까? 구약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중에서도 바울서신만 인정했습니다. 이 이단 때문에 교회가 모여 성경 66권을 정경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대한 바른 이해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노”는 고대 영어사전에는 “깊고 강한 분노와 의분”이라고 정의되어 있고, 분노는 “손해를 당하거나 모욕을 당할 때 생기는 불쾌하고 강한 적대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 진노라는 단어를 약 450번 사용하였는데, 대부분 “격한 분노, 흥분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가 “진노” 라면 이 단어가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단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손해를 보는 것이 있습니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시고 영이십니다. 그래서 진노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은 진노”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 거룩은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는 절대로 가까이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 19장 22절에 “또 여호와께 가까이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더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죄를 지은 인간은 누구도 가까이 갈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있으면 가까이 하지 않으시고 죄가 보이면 자연히 거룩한 반응이 일어나는데, 그 반응이 진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하박국 1장 13절에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 아닙니까?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란, 책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 하나는 ”의“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 즉, 하나님의 의에 근거하여 인간을 판단하시고, 그에 따른 보응을 하신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면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해 본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분에 합당하게 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자녀를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화를 냅니다. 사랑하면 징계합니다. 구약에서 가장 많은 진노를 받은 백성들이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들이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는 자녀라 죄를 범하면 가차 없이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이 징계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래서 잠언 3장 12절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녀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화내고 혼내고 징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방탕하고 패역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녀를 보고,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진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멸망의 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는데,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버려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내 자식이 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방탕하고 패역한 삶을 살아가는 자식을 보고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화를 내야죠. 화를 내고 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데 정당하고 정직한 진노가 없다는 것은 그 아이를 타락시키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 있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면, 바꾸어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고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감격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보배로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깨달을 때, 사랑으로 나를 감싸 주시는 그분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 있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는 퇴색되고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나타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세 가지 경우에 나타나는데, 첫째는 경건하지 않고 불의할 때입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서 쓰인 “경건”은 헬라어로 “아세베이아”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불의”는 “아디키아”라는 단어인데, “부정한 행위, 불공정, 절도, 사기 같은 범죄 행위”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의로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불경건한 사람이 사람 앞에서 절대로 의로울 수 없고, 사람 앞에서 불의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정에 불충실한 사람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고,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정이 충실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한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우리의 의로움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나게 됩니까?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핑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핑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9-20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인격과 속성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 땅을 떠나 본향을 항해 가야 하는 것을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일깨워 주셨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법칙 속에서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이타적으로 살아갑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주고, 공기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나뭇잎은 공기를 정화시켜 줍니다.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법칙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능적으로 자기 욕심만 챙겨야 합니까? 아니면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힘과 권력을 탐하고, 본능을 충실히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지 않은 것입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안에 본능과 욕망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밖의 것을 보려하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때입니다. 21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자기 욕망, 자기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부류와는 달리, 자연 현상이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에 “나는 지은 죄가 많아서.... ”라고 대답만 하는 사람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 할 때, 인정하지 않고 화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면서도 멋지다고 여길지언정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마약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약을 하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약을 자기 몸에 투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찰나의 쾌락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몸에 마약을 주사합니다.
내가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이 있는 줄 알면서, 육적으로 얽히고 설켜 있는 미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면, 이것은 자기 몸에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본문은 “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허망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말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신 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우상을 섬길 때입니다. 본문 22-23절 읽어보겠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멋진 돌로 상을 만들어 그 상에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이 상이 나에게 복을 주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돌을 조각하여 그것에 절을 한다면, 결국 누구에게 절하는 것입니까? 그 돌을 조각한 자신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우상숭배를 눈에 보이는 장승이나 특정한 물건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나 자신을 믿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나를 높이고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인가? 나인가? 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숨 막혀 합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아야 하는데 왜 다른 존재의 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가?” 말합니다.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무서운 형벌이 있다고 말합니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그 형벌이 무엇입니까? “내어버려두사”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막지 않고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진노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가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전달하다. 넘겨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4,26,28절에 같은 동사를 3번이나 반복되어 사용합니다. 누구에게 넘겨준 것입니까? 24절에 “더러움”에 26절에 “부끄러운 욕심”에 28절에 “상실한 마음”에 내버려둔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욕대로 살면 멋지게 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고급 술집에 드나들고, 욕심대로 사니 의롭게 사는 사람들보다 돈을 더 벌 수 있습니다. 비인격적인 모습으로 온갖 술수를 다 부리니 출세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남보다 앞서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진노가 전혀 임한 것 같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러지 같은 삶속에 내버려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대로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문을 보면, 뉴스를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에 들어와 있음에도, 하나님이 보여주신 모든 것을 다 보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될 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5절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찬송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영원히 찬송해야 합니까? 왜? 경배를 해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짐승 같고 버러지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잘못을 주님은 사랑으로 징계해 주심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상, 우리를 더 이상 짐승 같은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다시 옛날의 죄 된 삶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우리를 야단치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칼 브라이트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주님께서 나를 징계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생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12장 7절 이하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회초리를 들고 매를 치시면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그 분 앞에서 늘 깨어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더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사시길 소원합니다.
<마무리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고, 의롭다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만을 찬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특별히 남전도회 위에 삶과 가정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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