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1:19-21 무명의 그리스도인 - 안디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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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1장 19-21절
여러분 길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도 외딴 곳에서 의지할 사람도 없을 때 길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스마트폰이 있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릴 일은 전혀 없지만, 옛날에는 길을 자주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지도책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잠시, 새로운 도로가 생기면 또 다시 지도책을 사야하는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중고등부의 연중 행사 중 빠지지 않는 행사가 있었는데, 바로, 등산입니다. 당시 작은 교회에 다녔던 저는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서 등산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간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산 이름은 금산에 있는 서대산입니다. 정산을 올라가는 길이 외길인데, 내려오는 길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친한 동생과 함께 겨우겨우 길을 찾아서 내려오긴 했는데,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전도사님만 남아 계셨어요. 교회 중고등부 행사에 2명이 실종됐으니, 담당 전도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아무튼 그 때,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다리에 쥐도 나고.... 길을 잃는다는 것은 매우 당황스럽고 초조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산에서 길만 잃어버려도 초초하고 두려운데, 한번 생각해 보기시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 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언을 듣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조언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믿어보지만 삶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방향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살 소망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의미 있는 삶을 위해, 값있는 인생을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올바른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면 되지, 어느 분야이든지 내가 앞서면 되겠지”
그러나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실존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바른 방향을 가고 있습니까? 오늘 사도행전 11장에는 안디옥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작은 미미했지만, 이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교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가장 잘 알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던 것일까요?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 인생의 방향 역시 조금 선명해 지리라 생각됩니다.
사도행전 11장 18-26절은 안디옥 교회가 시작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이 됩니까? 별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 같지도 않고, 흥분될 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은 마구 뛰었을 것입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이 역사적 순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주목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잔뜩 긴장하여 일어난 일을 주목했을 것이고,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의 위대한 소식이 유대인들의 벽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아주 담담하고 평범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통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을 통해 메시아가 나오게 하셔서 그 메시아를 통해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축복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직 민족은커녕 후손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전 세계 모든 족속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 후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세상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실 때,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처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땅 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다른 종류의 삶을 살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안디옥은 교회가 세워질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은 지중해 연악 북서쪽에 위치했던 이방 도시입니다. 주전 300년에는 시리아의 행정수도였고, 사도행전 당시인 주후 1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 큰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성적 타락으로 얼룩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도 이방인의 의한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곳곳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그냥 한 순간에 생긴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세우신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그 시작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시작합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고 성령님이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 때부터, 예루살렘에는 성령이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3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2-6장까지 교회가 어떻게 성장해 나갔는지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만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7장에 이르러 과격한 설교를 했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사도들만 남겨놓고 교회는 전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로 인해 복음은 사마리아 땅에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도, 베드로를 통해 가이사랴의 백부장에게도 복음은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지만,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구나”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을 19절에 “그 때에”라고 하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9-21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 일이 일어난 때는 주후 45년 경으로 추정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된 때를 주후 30년쯤으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음으로 교회가 흩어진 때를 주후 32년경으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회심한 사건을 주후 33년경으로 있습니다. 그로부터 15년쯤이 지난 이후에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때에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구레네와 구브르 출신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이방인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이 일은 이름도 밝혀지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제자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놀라운 중요한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일은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들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람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몇 사람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구브로와 구레넷 몇 사람이라고 출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으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그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루기오라면, 이 부분에서도 이름을 밝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잘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유명한 사람들,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역사 속에 잊혀진 사람들, 알려지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을 사용하셨고, 또 오늘날도 사용하신 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를 시작한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인정을 바라며, 자기 이름이 알려지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들이 아니라, 역사를 기획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첫 번째로 이들은 준비된 자들이었습니다. 19절을 보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한 이들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해 일어난 환난은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2-3년 정도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박해가 시작되어 그냥 흩어진 자들이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2-3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준비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떤 준비를 하였습니까? 사도행전 2장 42-4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먼저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더 온전하게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인생에 잘못된 부분, 부정확한 모습을 확인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경영하시는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동안 이런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꿨습니다. 또한 이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통해 어떻게 내적인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지,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을 보면 그들은 함께 나눠주고, 서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함께 모여서 떡을 떼고, 교제하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함께 사는 법,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이들은 전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았고 또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준비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이수하거나 필수 과목을 이수하는 것이나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배우는 보고, 또 배우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듣고, 그것을 행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듣고 배우고, 보고 배우고, 행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준비되는 삶은 우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일 년이면 52번의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등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많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기도모임도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항상 감동을 받습니다.
문제는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매주 좋은 말씀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가 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귀로 말씀을 들었다면, 그 다음엔 가슴으로 와야 하고, 손발로 나가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준비입니다.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은 그렇게 예루살렘 교회에서 2-3년 훈련되었고 10년 동안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면서 준비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준비된 일꾼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삶으로 준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이들은 무엇보다 고정관념을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19절 끝을 보면 흩어진 자들이 여전히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절에서는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 몇이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독특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후 30년에 교회가 세워지고 주후 45년이 되기까지 15년 정도 이 기간 동안 이들은 일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해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다 이 사람들이 헬라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정관념입니다. 스데반 사건이 일어나서 다 흩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10년이 넘도록 유대인 의식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 그 선민의식을 뛰어 넘어선 것입니다.
고정관념이 무엇입니까? 고정관념이란 우리 주변의 사물 혹은 관계 등에 대해 자기 속에 굳어져 있는 어떤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아이는 이렇게 키워야 하는 거야. 성공은 이렇게 하는 거야. 세상살이는 다 이렇게 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정관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나 외 다른 잣대로 끊임없이 나를 새롭게 보고 배울 때 가능합니다. 또 그 잣대가 나보다 훨씬 월등한 권위를 가진 잣대일 때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고, 자신을 보고 여러 가지 이슈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고정관념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야 가져야 할 덕목은 바로 겸손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더 나아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하나님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 때 심각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자세가 바로 겸손입니다. 이러한 겸손의 자세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길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새로운 관점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겸손이 필요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세 번째는 이들은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일을 통해 교회가 세워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자기들이 그 귀한 일을 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스데반 사건이 일어난 다음 10-11년 기간 동안 예루살렘 이곳저곳을 전진하며 다녔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한 군데 정확해서 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10여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안디옥에 다다른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큰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10년 동안 충성된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이 작은 일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어쩌면 수십 명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별로 한 게 없어요”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지도 모릅니다. “네가 그때 외로이 싸우면서 한 일로 인해 수 많은 생명을 구원하였어. 넌 아주 귀한 일을 한거야”
우리가 세상의 구조를 위해서 고민하고 제도도 바꾸어야 하지만 제도를 아무리 바꾼다 할지라도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작은 일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 주변에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우리에게 찾아온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이런 작은 일들에 바른 기준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가꾸는 사람들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1900년대 무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디는 원래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구두를 닦고 고쳐주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학교 선생님이 이 무디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를 통해 훗날 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디만 기억합니다. 무디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름없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었음을 나중에 역사가들이 밝혀냈지만 그는 지금도 유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디와 무디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름없는 주일학교 선생님 중 누가 더 가치있다고 하실까요? 우리는 언뜻 무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무디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름없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 실 것입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구두 수선공 무디에게, 그 더러운 아이에게 복음을 전했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없었다면 1900년대 초 유명한 전도자 무디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값진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죽고 난 다음 우리 인생을 달아보았을 때 무게가 나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 그러기 위해 준비하는 것, 또한 나도 모르게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하나씩 버리는 것. 그러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일들을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되이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매일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조금씩 더 깊어지고 그 의미가 우리 속에 확연하게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은 혹시 인생이 끝났을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으로 남을지 모릅니다. 사실 무명의 인생을 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기억할 실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잊혀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은 받지만 하나님께 잊혀지는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하나님에게 잊혀지지 않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요약>
준비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내 인생을 어떻게 경영하시는지 배우게 하옵소서.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배우게 하옵소서. 행사면서 배우게 하옵소서.
나의 고정관념이 변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겸손의 덕목이 있게 하옵소서.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나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내가 섬기고 있는 작은 일들, 매일 만나는 사람들, 주변에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 나에게 찾아온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이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 잊혀지지 않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안디옥교회를 세운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섬기기를 다짐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영역위에, 나라와 이 민족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