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11-32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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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누가복음 15장 11-32절, 로마서 8장 15절
지난 2주간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최초의 이방인의 교회인 안디옥교회의 시작을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안디옥은 교회가 세워질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것도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안디옥교회가 사도들의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무명의 사람들의 의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디옥교회는 구브로와 구레넷 몇 사람의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비록 무명의 사람들의 의해 세워진 교회이지만, 이 교회는 충성되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빛을 비추었던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안디옥 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준비된 자들이었고,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도 충성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불완전한 삶의 방향을 폐기하고 예수님께로, 하나님께로 돌아갔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 굳건한 마음으로 붙어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배운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순종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세상은 진짜 그리스도인을 원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받는 축복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평생을 가난하게 살던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집안을 정리하다가 구들장 밑에서 거액의 돈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제일 지독한 구두쇠로 알려진 사람이 있는데, 그 이름은 1916년에 죽은 히티 그린(Hity Green)이라는 할머니입니다. 이 할머니는 얼마나 돈을 쓰지 않고 인색하게 살았는지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것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데워서 먹는 것조차 전기가 든다고 일평생을 차갑게 먹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외아들이 다리를 다쳤는데도 조금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병원비용 때문에 계속 미루다가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평생 불구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히티 그린 할머니는 늙어서 영양실조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놀란 일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집 옷장에서 통장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히티 그린의 이름으로 무려 1억불이라는 거액이 저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억불이면 한국 돈으로 1,300억원 정도나 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히티 그린은 평생 돈을 모으고 쌓아 두고 누리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혜택과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꺼내 쓰지 않고 있는 거 같습니다. 아니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아놓고도 진정 자기 것으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쓰지 않고 쌓아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고, 무너져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고, 풍성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예수님께 속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로 인해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받는 가장 큰 축복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새 번역 성경에는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즉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왜? 엄청난 특권입니까? 이것을 로마서 8장 15절은 우리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입양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양자의 영”을 다르게 표현하면 “입양해주는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입양되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래 고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아 같은 우리를 입양하셨습니다. 그냥 입양한 것이 아니라, 아주 모진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부활의 사건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이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던 그 하나님을 우리도 “우리 아버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아였던, 버림받았던 노예와 같았던 우리를 불러 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놀라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가부장적인 가정이라면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더욱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고 권위적이고 화를 잘 내고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우리를 되살리신,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묵상하면 할수록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에서 누리는 사랑, 아버지와 자녀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 이 사랑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쉬운 성경으로 말하면,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바울은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반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아버지의 사랑은 육신의 아버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때론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실패하고 형편없이 살아가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격 미달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두 번 생각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냥 안아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그냥 받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용납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으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하나 없습니다. 쓰러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받아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나서요?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 받아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는 우리를 이렇게 완벽하게 용납하셔서 그의 것, 그의 소유 삼으시기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알려줍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들이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인인 것을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가 주인 행세를 하여 죄에 팔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전부 “내 꺼”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는 영어로 SIN 인데, 영어에서 보는 것처럼 가운데 “I” 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거절하고, 내 삶이 “내 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온갖 거짓말, 사기, 도둑질 같은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들은 관계에서 서로 고통을 주고 하나님 없는 사회를 만들고, 하나님 없는 사회를 발전시키고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늘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수많은 문제와 고통을 야기 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고통과 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문제의 대가는 죽음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라고 말합니다. 죄는 곧 죽음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 우리 각자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값을 지불하고 되 사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당신은 얼마짜리 입니까?” 그러면 나는 “연봉 3000만원 짜리다. 나는 연봉 얼마다” 라고 제 각기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가격을 붙인다면 과연 얼마일까요? 우리는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우리에게 가격을 붙일 수 이는 없겠지만, 구지 붙인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까지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짜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되사오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격은 “예수 그리스도”짜리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신 양자로 삼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집을 팔아서 최고급 승용차를 한 대 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따로 여윳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집을 팔아서 차를 샀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밖에 나가서 일하고 있을 때도, ‘그 차 누가 건드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고, 밤에도 차 주변에 텐트를 치고서 차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산 물건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눈을 떼실 수 있겠습니까? 눈을 떼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고 우리를 되사실 만큼 우리가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눈을 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대가를 다 지불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14절에 놀라운 복음의 축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이 구절은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죄 사람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받을 것이다’ 가 아니라 ‘받았다’입니다. 즉, 이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아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더러운 모습이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더군다나 이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이제 하나님의 완전한 용납을 경험하고, 그분의 선하신 다스림 아래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게 완전히 용납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고, 또 하나님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것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축복이고, 이것이 놀라운 은혜라고 한다면, 이 축복을 받은 우리들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를 잘 나타내는 구절이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이 있으면 미리 나에게 주십시오” 아버지는 둘째아들의 요구에 들어줍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먼 타국에 나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립니다. 결국 먹을 것이 떨어진 둘째 아들은, 너무나 배가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데, 차라리 아버지의 종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때,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달려갑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금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끼고 동네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다면, 이 축복을 경험했다면 돌아온 둘째 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전보다 더 효도하고 더 충성하고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리면서 살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때론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우선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집에 나간 자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수년 동안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옛 습관들은 쉽게 지어지지 않습니다. 가끔씩 옛 모습이 나타납니다. 죄를 짓습니다. 이럴 때 이 아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버지 옆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잘못된 길로 간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지적해 줄 것이 아닙니까? 때론 아버지의 잔소리도 들어가면서 아버지와 계속 동행하면서 순종하고 나아갈 때 그의 인생이 변화 게 될 것입니다. 그게 1년이든, 아니면 3년이 되어야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변화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 이후의 삶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자기 자신을 여기면서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속 동행하다보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합니다.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의 칭의 부분에서 C.S 루이스는 마태복음 6장 주기도문을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죄 성이인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된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의 죄악을 바라볼 때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하고 이것이 무엇이냐 괴로워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로마서 6장 1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나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변화가 됩니다. 형편없던 자식이라도 아버지와 동행하다보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C.S 루이스는 어떤 못생긴 남자를 예를 들었습니다. 아주 못생긴 남자가 있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괴롭고 머리도 없고, 눈도 작고, 누가봐도 아무 못생긴 남자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잘생긴 남자의 가면을 본을 떠서 얼굴에 붙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가면을 벗었더니 자기 얼굴이 진짜 그 가면의 잘생긴 얼굴로 바꿔졌습니다. 그러면서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장이 현실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이라는 가면을 쓸 때, 우리는 여전히 냄새나고 더럽고 별 볼일 없는 존재이고, 의롭지 못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면,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가면의 모습과 같이 변화가 되듯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받는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동행하며 주님 오시는 날 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 자녀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고,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영역위에, 나라와 이 민족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실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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