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1-8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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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고린도전서 13장 1-8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교회 만큼 사랑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곳도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 말씀은 성도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많이 들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마태복음 5장 44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두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에 대해 구분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교회라고 부르는 성도간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지만, 대상의 차이는 실천에 있어서 강조점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은 잘 아는 대로 사랑장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주 길게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장을 쓰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사랑이라는 주제를 딱 떼어 내서 사랑을 논한다면, 고린도전서의 맥락과 전혀 무관한 사랑의 정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굉장히 역동적인 교회였습니다. 유난히 은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너도나도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예배 중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너도나도 하나님께 받은 은사나 은혜를 나누려고 엄청난 경쟁을 벌였습니다. 문제는 은사가 많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구별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과 받은 사람과의 구별, 은사를 한 가지 받은 사람과 두 가지 이상 받은 사람 등 교회 안에서 등급과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 이것이 시기가 되어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교회 안에 뿌리 깊은 구분과 분열의 마음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성찬을 가지고도 그 못된 심리가 드러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배불리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근근이 살아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 할 때, 음식을 못 먹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 지도자들을 따라 교인들이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누구편이냐? 넌 누구 파야? 교회 안에 4개의 당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 파, 그리스도파...
이런 상황에 빠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 유명한 사랑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정의 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은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얼마나 대단한 영적인 권위입니까?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 둘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소리가 일정하게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를 무엇이라 부릅니까? 소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수사와 화려한 꾸밈으로 떠들어도 결국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소음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통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모든 것이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지식도 믿음도 우리가 대단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한 다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또다른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구제가 가능할까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온몸으로 무엇을 한다고 합니까?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사랑에 대한 더 큰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보다 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정의 합니다.
4-7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에 대한 바울의 정의는 어떻습니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입니까? 아니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 입니까? 바울이 정의한 사랑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문제에 관심이 가서 이것이 본질이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이론의 여지가 없을 수 있습니다. 정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는 각양각색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주장에 동의하여 따라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해 두어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선을 그어 버리고 반대자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랑은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사랑보다 휠씬 더 어렵습니다. 열정적인 사랑은 사실 어떤 면에서 관심이 갈 때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견디고 참고 인내하고 끊임없이 기다리는 사랑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어디서 훈련 받을까요? 자녀을 양육할 때입니다. 자녀들은 그저 자기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눈높이밖에 보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그게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양육할 때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때 나오는 사랑이 무엇입니까?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속아주고, 참아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마치 두 사람이 함께 뛰는 2인 삼각경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2인 삼각경기는 두 사람이 발을 묶고 결승점까지 반환점을 돌아 들어오는 경기입니다. 이 때, 구령에 맞추어 천천히 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빠르게 간다면 금방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안 되는 사람을 기다리고 같이 가면 답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보조를 맞추어 간다면 결승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여전도회가 이와 같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4개의 여전도회가 있습니다. 여전도회 회원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협력하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원하는 사랑의 수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물론, 적극적이고 불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휠씬 어려운 사랑은 견뎌주고 인내해 주고 기다려 주고 참아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삶뿐 아니라 가정 공동체도 마찬가지고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실천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랑은 초월적이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전부를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적인 사랑 이면에는 더 깊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면서 예수님의 인내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왜? 십지가를 지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참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랑을 정의할 때,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이 ‘오래참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참으신 사랑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동체에서 사랑을 논할 때, 그 기초는 “오래참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많은 사랑의 표현들이 있음에도 그 출발은 참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연약함을 다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 성격,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우리를 동정합니다. 우리는 동정하면 마지못해 적선하는 태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동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동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경험하셨고, 거기에서부터 나오는 긍휼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실 수 있습니까? 저 높은 곳에서 고고한 태도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겪는 처지까지 낮아지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여기에 형제 사랑의 기초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형제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에게 공감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잊을 때 자꾸만 높은 마음이 듭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기다려주는 것이고, 이해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공동체 안에 이러한 사랑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두 번째로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5-26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누가복음 10장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러 나온 일이 소개됩니다.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묻습니다. 이 율법교사의 질문 속에는 그가 영생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행위에 기반을 두어 인간의 의가 쌓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와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는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지 다시 물으십니다.
누가복음 10장 27-28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교사는 아주 자신감있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옳다. 네가 말한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이상합니다. 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야지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네가 가진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답변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이 이야기의 초점은 그 다음 질문에 있습니다.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는 사실 영생을 얻을 방법에는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것입니다. 자신의 질문에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는지를 보고, 만약 율법과 어긋나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야?”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에게 별로 말씀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러 왔다가 결국 스스로 시험에 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무엇을 정당화하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사랑하는 이웃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지만, 자기가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향하는 길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입니다. 천만다행으로 길을 가는 중에 그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신앙과 경건을 가진 레위인과 제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지나갑니다. 반면 사마리인은 이 사람을 발견하고 응급조치를 하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 돌봐줍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라고 취급하였습니다.
왜?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을까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인의 동기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33절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심정을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먹지 못하는 이들, 병중에 있는 이들,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 가졌던 예수님은 심정을 이 단어로 묘사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겨”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향한 동정과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웃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긍휼이 느껴지지 않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멸시하고 천대하였던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사랑은 곤고한 백성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같은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 앞에 주저할 수 있습니까? 더 이상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고고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아무런 감동도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 깊숙이 찔러 그 사랑이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공동체는 과연 동정이 충만한 공동체인지, 나 자신은 세상의 이웃들에게 긍휼과 애통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여,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진짜 사랑이 넘치기 원하고 소원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특별히 남전도회 위에 삶과 가정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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