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1-16 하나님의 판단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 views
Notes
Transcript
하나남의 판단
로마서 2장 1-16절
어떤 4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야고보서 5장 16절 말씀을 듣고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그래서 이들은 서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들의 약점을 정직하게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친구가 먼저 말합니다. “나는 사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담배를 끊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자기에게 있는 복잡한 이성관계가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도벽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회에 와서도 슬쩍 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친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왜 너는 말하지 않느냐? 너만 통뼈냐?” 네 번째 친구가 자꾸 말을 안 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했는데 너만 안하면 어떻하냐고 했더니 그럼 할 수 없이 애기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약점은 남들의 흉이나 결점이나 약점을 알게 되면 불고 다니는 것이 나의 약점이야” 먼저 애기한 세 사람은 이제 큰일 났습니다. 다음날 그들의 소문이 교회에 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타락한 인생의 대부분은 네 번째 친구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남의 약점을 드러내고 남을 판단하는데 묘한 쾌감을 느낍니다. 저만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판단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이 진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언제 나타났습니까? “경건하지 않고 불의할 때, 자신이 죄인인 줄 알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때, 우상을 섬길 때”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진노중의 진노는 “내버려두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버림받은 자들의 모습을 로마서 1장 26절 이하의 열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과는 “이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 주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살고 있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를 논술하고 있는 동안, 이 편지를 읽고 있었던 로마의 성도들,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런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에요. 그런 이방인들이야말로 정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바울의 이 고발 앞에 “아멘 아멘”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얘기를 계속 하다가 갑자기 이 논지의 대상을 바꾸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2장 1절에 “그러므로” 로 시작합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이 단어는 보통 전 구절의 논리적 결론을 내릴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미 1장 28-32절에서 이미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론을 내렸는데 갑자기 바울이 또 “그러므로”라고 2장 1절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장 18-32절까지 계속되어 사용되는 인칭이 무엇입니까? 3인칭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19절에 “그들 속에 보임이라” 20절에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런데 2장 1절부터 사용하고 있는 인칭이 무엇입니까? 2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방인들의 죄악성을 이야기하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갑자기 “그러므로 이 사람아” 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러므로”는 이제 말하는 상대의 변화에 따르는 이어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화 상대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 당시 1장에 나오는 행동들, 특히 28절 이하에 열거된 죄악 목록을 정죄하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이 사람아” 는 무슨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이 사람들아! 여러분들은 다른 줄 아느냐? 여러분들도 이방인들과 본질적으로 똑같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느냐?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너희들을 판단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계속해서 4-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무서운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고 놔두시는 것을 하나님이 심판할 능력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계신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판단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신 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심판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마치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 되새기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밀한 것까지 다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아무로 모르는 비밀까지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통해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2장 1절의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죄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같은 일을 행하는 동일범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2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 판단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대로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었던 로마 교회 성도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1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우상숭배와 대체로 상관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현상만으로 판단한다면 유대인들은 극도의 성적인 타락은 만연되지 않았습니다. 동성연애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었고, 이웃에 대한 파괴적인 잔인한 범죄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보편적 사회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현상 때문에 그들은 “우리는 이방인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저 로마인들,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을 본 것입니까? 현상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현상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실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체를 파악하면서, “당신들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살인의 죄는 없었지만 그 살인의 죄를 야기 시키는 동일한 미움의 죄가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간음의 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간음을 유발하는 동일한 동기인 음욕이 그들 안에 있는 것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동성연애는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성적인 타락성을 바울은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이 사람들아, 너가 판단하는 그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적어도 그 실체에 있어서는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상만으로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판단이든, 마지막 최후의 심판의 자리이든, 전능자, 창조자,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판단을 받을 때 그의 판단은 “진리대로 ”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바울은 4-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게 참으심에 대해 비웃으냐? 그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그것을 하나님이 그냥 넘어가실 줄 아느냐? 진노의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 하나님은 “행한대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보응 하시는 분이십니다. “보응하다” 무슨 말입니까? 이 단어는 “아포디도미”라는 단어인데, ‘값을 치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정확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의를 세우는데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행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판단하시겠어요.?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들의 행함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상당히 의롭다’는 이 특별한 자부심으로 도취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의 행함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은 행함에 있어서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율법을 날마다 듣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함에 있어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율법을 따라 산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모세를 통해 받은 말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율법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대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2절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말입니다. “그것대로 살지 못할 때, 당신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 율법이 당신을 판단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심판의 날, 당신들이 자랑하는 그 율법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그 율법의 의해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특권입니다. 거룩한 특권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특권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대로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말씀을 듣는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율법을 자랑하며 율법을 경청하며 날마다 율법을 읽으며 살고 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행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들은 항상 율법을 많이 듣는 분위기 속에 살다 보니까 자기의 삶이 그렇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들음은 반드시에 책임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매일 말씀을 듣고, 늘 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들은 대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반응하여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주 앞에 서는 날 이 말씀에 비취어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그는 우리가 성경책을 얼마나 갖고 있었느냐는 그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평생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는 것으로도 판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 앞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13절에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기를 소원합니다.
또 바울은 1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하나님은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밀한 것은 문자 그대로 은밀-비밀입니다. 숨기고 싶은 것, 부끄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를 만든 배후에 있는 우리의 동기를 판단하시고 우리의 사고와 생각까지 판단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을 추구할 때, 내면의 경건을 추구하기 보다는 외면적인 경건을 추구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도하는 모습, 옷 입는 것, 겉으로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쓰면서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기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 가장 신랄하게 책망했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창기나 세리에게 책망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화를 내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을 장식하는 사람, 무덤 같은 내 삶의 표면을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하고 과시하면서 살지만 그 속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의 외면에 의해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은밀한 것을 꽤 뚫어 보시며 판단하시며 심판의 그 날,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고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비밀까지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이와 같이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피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나를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 밑바닥에 숨어 있는 내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행한 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양심을 저버리고 내게 주신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는 불순종의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비밀까지 헤아리시는 은밀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감출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 사람아, 정신차려라. 너나 잘하고 살아라.”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 원칙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행위의 선함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지 않고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절대로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인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 다시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바와 같이” 나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