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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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설교 제목: 삶은 ‘어디’보다 ‘누구와’가 중요하다.
설교 본문: 룻기 2:17-23
설교 핵심:
설교 내용:
도입
제가 존경하던 신약학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교수님께서 자신의 일화를 얘기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교수님은, 독일 마인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독일 유학 당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유학을 가신 것이 아니라, 교수님 혼자 먼저 유학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낯선 타지에서 홀로 유학생활을 하시다보니, 그 독일이라는 아름다운 땅조차도 고통과 외로움의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교수님의 가족들이 독일로 오셨는데, 그때부터, 독일의 삶이 너무 행복해지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룻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타지에 왔습니다.
그리고 낯선 사람의 밭에서, 가난한 자들만이 하는 이삭을 줍는 일을 통해, 끼니를 연명해야만 하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실제로 룻도 자신의 비참한 신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장 13절의 말씀을 보면,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그런데, 그녀는 그런 비참한 상태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2장 14절에 보면, 보아스의 식탁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하고, 17절에 말씀을 보니까,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곡식을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19절 말씀을 보면, 나오미가 룻에게, “오늘 어디서 주었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라고 질문하는데, 룻의 대답은, 어디서 일을 했다가 아니라,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대답합니다.
그리고 룻은, 자신이 보아스에게서 일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서, 20절에 “우리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부릅니다.
고엘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무고히 살해되었다면, 그 살해된 사람과 가장 가까운 가족, 가족이 없다면 가장 가까운 친척이 그 피에 대해서 복수를 할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또 가난으로 인해서 부요한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리게 되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그 사람을 자유하게 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또는 가난으로 인해 땅이 친족 외의 사람에게 팔렸을 경우에 이를 고엘, 즉,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이를 다시 사와야 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이처럼, 그 사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을, ‘고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엘’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창세기 48:16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표현은, 히브리어 어순대로 다시 바꿔보면, “사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낸 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건져낸 분”이 바로 ‘고엘’입니다.
그래서 고엘은, 환난에서 건져내는 자를 가리킵니다.
나오미는, 바로 보아스가, 고엘, 즉 남편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 모두 죽은 상황에서, 보아스가 자신들의 대를 이을 책임을 지는 고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들 모두 죽고, 이방 며느리 한 명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의 가문이 다시 회복될 기대를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서 그의 가문을 다시 회복하시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즉,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절망의 환난에서 건져내는 자라는 것입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절망 그 한 가운데서도, 보아스와 함께 함으로 인해서, 은혜를 누리고, 풍요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룻의 모습이 마치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참 많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삶을 살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어느 기업이나 회사에 속해서 일을 합니다.
때로는, 알바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장을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우리 중에 누군가는, 바쁘고, 누군가는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만족할만한 수입을 얻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만족스럽지 않은 수입을 받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큰 회사에서, 또 누군가는 비교적 작은 회사에 속해서 일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일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일하느냐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참 고엘이신 하나님과 함께 일하십시오’
우리는 대기업을 다녀도 절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엄청난 수입을 얻어도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세상의 돈도, 세상의 인기도,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절망의 늪에서 구원해내지 못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우리의 고엘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놀랍게도 ‘고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출 6:6)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종과 노예로 고통받고 있을 때, 그들을 그 고통에서 구원하신 ‘고엘’이셨습니다.
그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에 고엘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는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곳에서는 멈추는 것입니다.
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때로는 위로를 얻고, 때로는 힘을 얻고, 때로는 말씀의 채찍 앞에 나를 굽히는 것, 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1-22절의 말씀처럼, 보아스의 사람들과 함께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직장 안에서 믿음의 동료들이 될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과 가까이 하십시오.
그들을 통해 때로는 도전을 받고, 또 때로는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또 때로는 고민되는 부분을 나누고 그들의 지혜를 얻기도 하며, 내가 그들에게 지혜를 주기도 하면서, 서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전도서 4:12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함께 할 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