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9-31 그러나 이제는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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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는
로마서 3장 19-31절
지난달 우리사회에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온라인 과외 앱으로 만난 20대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 한 사건이었습니다. 흔히 사이코패스 사건으로 더욱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은 끔찍한 사건이후 가해자의 태도입니다. 살해 이후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은 모든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같은 사건들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이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왜? 증가할까요? 무엇때문일까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로마서 1장 28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우리는 로마서 1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이 어떠한 지를 아주 자세히 알려줍니다. 그리고 1장에서 이러한 자들의 죄가 무엇인지 리스트를 보았습니다. 2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범죄를 살펴보았습니다. 3장에 들어와서 바울은 전반부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죄 아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 아니라고 변명을 늘어놓아도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 죄 아래 있다” 오늘 우리는 꼼짝없이 죄인으로서 정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죄인인 우리에게 이 죄를 넘어서서 죄를 극복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희망은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 이 사실을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여기에 613가지 세부 항목을 더 첨가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을 지키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체는 좋은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왜 이 율법을 주셨는지에 대한 근본 정신은 잃어버리고, 613가지의 지키려는 행위에만 치우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니깐 애쓰고 있으니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테지” 이런 보편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앞에, 율법 아래 서 있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을 보면, 야고보는 율법을 가리켜 거울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아침이 일어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봅니까?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고 나서 소감은 어떻습니까? “야, 볼수록 너는 참 멋지구나!” 이렇게 말하시나요? 아니면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진 모습을 발견하시나요? 그렇습니다. 거울을 본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거울을 본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압니다. 거울을 본 사람은 자신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잘 압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담대합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거울은 우리의 외적인 모습만 보여줍니다. 만약 우리의 속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한 동기와 사고 그리고 생각, 욕망, 찌꺼기 까지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우리가 그 거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무엇을 느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형제를 향하여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그것은 살인한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읽을 때, “아 내가 살인자 이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여인을 보며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 “아 내가 간음한 자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애써서 부인하고 퍽 괜찮다고 착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아래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율법 앞에 선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토해져 나올 결론은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1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 아래 서 본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이 다 닫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율법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니깐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율법 아래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들의 모든 입은 닫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당신을 위한 로마서”라는 책에서 이런 비유로 설명하였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것은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가려는 것과 같다. 세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수영을 못한다. 또 한 사람은 수영을 좋아하고 수영 실력도 좋다. 또 한 사람은 국가대표 수영선수이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이다. 첫 번째 사람은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익사했다. 두 번째 사람은 처음에는 꽤 가더니 얼마 못 가 허우적거리다가 바다에 가라앉았다. 국가대표 수영선수는 4.8키로미터 지점에서 지치기 시작하더니 6.4킬로미터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8키로미터 지점에서 익사했다. 수영 실력은 다르지만 태평양을 건널 수 없다는 점에서 똑같다. 이것이 율법으로 지켜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과 상관없이 의롭다 함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능한 길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의 어떤 노력도, 어떤 최선의 노력도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이것이 23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을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완전하십니다. 조금의 어두움도 용납될 수 없는 거룩하시고 절대자 이신 하나님 앞에 서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 절망적인 상태, 아무런 가능성이 전혀 없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소식이 21절부터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 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성경에는 “이제는” 로 되어있지만, 성경 원문을 보면,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말입니까? 전에는 율법에 매여 있었는데, 전에는 종으로 살고 있었는데, 전에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는데,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인간들이었는데, 이제는 율법이라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았던 의롭다함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계속해서 24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율법의 기능을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소극적 기능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라. 하지 말라” 하는 이 말씀 앞에서 하라는 것을 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 버린 나의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소극적 기능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표준이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표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필요하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율법의 요구하는 의가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코 율법을 폐기하나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면, 결국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함, 의롭다함이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율법의 요구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24절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값 없음”이란 우리 편에서 볼 때는 값이 없지만,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하나님께서 이미 지불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 대가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거룩한 보혈을 흘려주시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셔서, 우리에게는 값없이 죄사함 얻고,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해 놓으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하게 자신의 행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하셨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느 부자 청년이 어느 날 예수님 앞에서 나와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얻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질문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 주시고 그를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시고 보혈을 흘려주신 것입니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놀라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율법으로 불가능했던 의롭다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결론을 강조합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절과 26절 그리고 28절에서 계속적으로 바울은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장을 공부하던 마틴 루터는 카톨릭에서 요구하는 그 모든 수행을 통해서 참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을 읽으면서 그의 가치관이 깨졌고, 2장을 읽고 3장 28절을 읽다가 이 말씀 앞에서 그는 “믿음으로” 앞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읽었다고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에서 우리가 받는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시면서, 혼인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혼인잔치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예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절을 당합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잔치에 들어가기 앞서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기의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잔치석상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합당한 의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잔치석상에 온 사람은 헌 옷, 더럽혀진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러나 벗기만 하면 안 됩니다.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 헌옷을 벗은 사람들에게 주인은 이제 예복을 입고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사람에게 희고 아름다운 예복을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줍니다. 선물로 값없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럽혀진 옷을 벗을 뿐만 아니라 그 희고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 앞에 나온 사람마다 우리를 그의 보혈로 씻어 죄사함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의 예복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기서 예복은 의,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내가 성취할 수 없었던 나의 의, 내 어떤 노력도, 내 도덕적인 수준의 어떤 몸부림도 가져올 수가 없었던 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나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드리는 믿음,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자랑이나 공로가 아닙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언제나 두 가지의 단계를 필요로 합니다. 첫째 단계는 구원의 필요를 자각해야 합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구원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구원의 필요를 느끼려면 먼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상태를 알아야 합니다. 답답한 사실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전도해 보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라고 전도하면 겉으로는 고개를 꺼떡이지만 속으로는 “죄인은 죄인이지만 내가 너보다 더 죄인일 것은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만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죄인됨을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는 오순절의 자리에 섰던 사람들처럼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이 안타까움이야말로 구원의 필요를 자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를 자각한 다음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때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보기만 해도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까? 자기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이 아직도 자기 자신이 탈출 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물속에 뛰어든 구조자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아직도 자기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살 수 있다고 믿는 한, 구조자가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꼼짝없이 내가 죽는다라고 허우적거릴 때 그리고 자신의 소생에 대해서 거의 절망적인 마지막 단념을 해 버렸을 때 그 순간 내 앞에 구원자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감격일까요? 그 때에 할 일은 내 앞에 다가오는 구원자 앞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선행이, 행위, 윤리적인 자존심이 아직도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흥분이 없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내 어떤 최선의 노력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이 진리를, 그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위해 보내신 주님을 향해 “주님만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절망과 내 속에 있는 불가능을 아시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참으로 의지하고 그분이 나를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이 감격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찬송가 536장
죄 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나오라
주 말씀 의지 할 때에 곧 평안 얻으리
의지하세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구하시네 구하시네 곧 구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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