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8 화평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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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을 누리자. 환난, 인내, 연단, 소망, 사랑
로마서 5장 1-8절
바울은 로마서 5장 1절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의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1-4장까지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누군가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고 다 끝난 애기인데, 무슨 말을 더 해야 합니까? 질문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장 이하, 우리들에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이 완성되기까지 기다리며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장에서 바울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배경으로 들어가고, 5장부터는 “소망” 이라는 주제를 등장시킵니다.
로마서 5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5장 1-2절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한번씩 사용된 후, 8장 39절까지 ‘믿음’, 또는 ‘믿는다’ 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소망’ 과 ‘소망한다’ 라는 대체되는데, 우리말 성경은 명사 ‘소망’을 ‘바란다’ 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5장 1-11절은 믿음에서 소망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됩니다. 헬라어 “엘피스” 소망은 “바라다, 기대하다, 예상하고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의 현재 삶을 이끌어 가는 능력임을 설명하는 도입 부분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 접속사에는 1-4장까지의 전체 내용을 함축하고 종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으므로” 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개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단어를 대할 때 단순히 인간이 믿는 것 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라고 말할 때, 이것이 단순히 인간이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생각으로 동의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가 되는 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복음이 그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그 사람에게 선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죽음을 경험하고 어떻게 살아나셨는지 등의 역사적 사실들이 전달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죽게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실들이 복음의 내용으로 제시됩니다.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여셔서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이해하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셔서 이 세상 무엇보다 귀한 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성경은 바로 그 순간을 우리에게 믿음이 생긴 때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생기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다, 죄가 없다” 선언해 주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해서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게 하시고, 그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믿음으로 죄 없이 서게 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덧입어 의로운 자로 서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갖게 된 새로운 관계의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그 복이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 라고 하는데, 샬롬입니다. 새롭게 설정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극적으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전에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원수 된 관계를 벗어나 전혀 새로운 화평의 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전 성경에는 “화평을 누리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화평을 누립니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화평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화평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평을 누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울은 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아서 평화로운 관계를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은혜 안에서의 삶!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 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는 성경에서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로운 말“입니다. 누가복음 4장 21-22절을 보면, 주님은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 자체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고 싶어 합니다. 왠지 모르게 말씀이 자꾸 생각나고, 찬양이 생각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교회 청년 이야기 – 함아영, 30세)
말씀과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 안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들어나게 됩니다. 말씀이 나를 계속 변화시켜 내 삶이 이전보다 더 진지해고, 더 거룩해지고, 더 실재가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은혜 받은 사람이라면 말씀이 나의 삶에 들어와 있어야 하고,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둘째 성경에서 은혜의 사용은 누가복음 2장 52절에 나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여기서 ‘사랑“이 카리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은혜 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흠없는 거울이라도 캄캄한 어둠을 비출 수 없습니다. 반드시 빛이 있을 때에만 무엇이든 비추어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로부터 사랑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사랑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어져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이렇게 말슴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여기에서 “잠잠히 사랑하시며” 이 말은 내가 주님을 배신하더라고, 내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라도, 심지어 내가 주님을 부인한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내 삶 속에 사랑으로 계셔 왔다는 것입니다.
(모래위에 발자국)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끊임없이 배신하는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랑이 나를 지배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지배하면, 삶의 방식과 모습이 변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에 가득차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 번째 은혜 안에서의 삶은 찬송입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찬미하여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여기에서 “칭송”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칭찬과 격려를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나 자심을 잊고 살아갈 때는 스스로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말씀을 펴놓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 썩고, 어둡고 흉측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격려해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되는 기적을, 문둥병을 낫게하는 기적을 보여주셨고, 이에 하나님의 부름앞에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가 위대한 일을 해낸 것입니까? 모세가 홍해를 갈랐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격려와 도우심 속에서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네 번째로, 은혜 받았다는 것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1장 7절에는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세서 “기쁨”이 “카리스”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기뻐하지 못할 일이 많은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비결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ksksla의 기쁨이 나에게 전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받아 주어 하루 끼니를 해결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를 보고서, 옷을 갈아입히고, 가죽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니 함께 즐기고 기뻐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기쁨은 탕자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전이되었습니다.
죄인 한 명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구원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더 기뻐하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그 기쁨이 전이되면, 항상 기쁘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던 불평과 불만은 기쁨으로 덮여 어느새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영화나 소설을 본다할 지라도, 감동은 사람은 거듭나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감동을 초월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랑, 기쁨이 위로부터 주어지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절 하반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을 삶 가운데 드러내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라는 구절은 미래에 하나님의 영광이 도래하는 것을 대망한다는 의미입니다. “즐거워하느니라” 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면, “내가 만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은혜는 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아서 평화로운 관계를 누린다는 것이 바로 은혜 안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안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고 다니면서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은 학식많고, 고상한 사람 뿐 아니라, 죄인도 포함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장 18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현재의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또한 미래에 나타날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든지 화평을 누리고, 은혜 속에 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영광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