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11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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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장 1-11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 찬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5장에서 살펴본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릴 수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6장에 넘어와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다시 말해 “거룩한 삶의 의무”에 대해서 사도바울을 말합니다.
5장 20절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니”
6장 1절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증가한 곳에 은혜가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내 죄가 인식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느껴집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죄인 됨을 더 잘 아는 사람일수록 은혜를 더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에 관하여 말하면서 이 부분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깐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강력하게 나타나니깐, 은혜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하겠구나. 그러면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것이 아닌가?”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바리새인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습니다. 이 때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바리새인일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7장 39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 하거늘”
이러한 바리새인의 마음을 아시고 비유 하나를 말씀합니다. 각각 500데나리온과 50데나리온 빚진자의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 빚을 채권자가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고 둘 다 탕감해 주었을 때, 누가 더 채권자를 사랑하겠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때 제가 시몬이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내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아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게 와서 눈물로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부었다” 그러면서 7장 47절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큰 죄인이었던 여자가 죄 용서함을 받고 은혜 가운데 나아갈 때 그 감격이 더 큽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주 심각한 죄를 짓고, 방탕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에게 구원의 감격은 엄청나게 큰 선물로 다가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함이 많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큰 은혜를 받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은혜를 더 얻기 위해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한다는 말 자체가 틀린 가설입니다. 가령, 부모의 사랑은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아무 사람의 아이를 가져도 됩니까? 또 부모가 죽고 나서야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식이 부모님이 빨리 돌아가시게 해 달라고 기도해도 됩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속에 거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를 2절 하반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가운데 더 살리요” 당연한 것입니다. 은혜 받고 구원받고 난 다음에 변화된 인생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은혜인지 모르는 사람만 은혜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오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고 살아가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아드을 되찾는 아버지 비유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탕자가 어느날, 자기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께 말합니다. 이에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15장 13절을 보니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이에 이 아들은 가진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 <탕자 이야기>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집 나간 자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보시기 바랍니다. 해외에 나가서 3년 되었든 5년 되었든 수년 동안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자기 삶의 패턴이 바뀌게 될까요? 마음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때 탕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버지 옆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잘못된 길로 간다 할지라도 아버지가 지적해 줄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아버지와 계속 동행하면서 순종하고 나아갈 때 그의 인생이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게 1년이 되든 2년, 아니면 3년이 되어야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은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여기면서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계속 동행하다보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삶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서 6장에는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길을 걸어가면 동일한 능력이 나타나 동일한 권세를 행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3-8절 까지 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4,5,6,8절에 “함께, 연합”입니다. 9번 등장합니다.
여기서 연합이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어로 유나이티드(United)에 해당하는 의미로, 서로 다른 물체가 자기의 형체를 유지하며 합쳐지고 분리될 수 있는 결합이 아니라, 용해되어 분리되지 않는 결합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흡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속에 설탕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물과 설탕은 각 각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물에 설탕을 넣는 순간, 설탕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분리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물이 어디를 가든지 설탕도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연합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며,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것입니다.
둘째는 ‘접붙이다’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앞에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이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실한 가지는 잘라 버리고 새 가지를 접붙여야 합니다. 부실한 가지를 쳐 내지 않는 그 나무는 계속 나쁜 열매를 나올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옛 삶이 죽으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께 접붙임되면, 예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통해 열매 맺는다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조금 부족하다 할지라도 시간을 가지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한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탕자가 언제 탕자가 되었습니까? 아버지를 떠났을 때, 즉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떠나갔을 때 탕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돌아왔다하더라도 100% 만점짜리 인생을 살지는 못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번 실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의 자녀라는 인식을 가지고 아버지와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여기다” 라는 말은 헬라어 “로기조마이” 라는 동사입니다. 신약성경에 약 40번 정도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계산하다, 간주하다, 평가하다”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내가 지금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11절은 말합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변증가이자 신학자인 C.S 루이스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 에서 마태복음 6장 주기도문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같이 죄투성이인 사람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된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나의 죄악을 바라볼 때 가슴을 치고 안타까워하고 이것이 무엇이냐 괴로워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에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고 그렇게 행세하고 살아가는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간주하라고 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삶이란? 나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면서 살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형편없던 자식이라도 아버지와 동행하다보면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품에서 3년이 지나면 변화가 많이 될 것이고 5년이 지나면 더 많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C.S 루이스는 어떤 못생긴 남자를 예로 들었습니다. 아주 못생긴 남자. 거울 볼 때마다 괴롭고 머리도 없고, 눈도 작고 아주 못생겼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다가 어느날 잘 생긴 사람의 가면을 본 떠서 만들고 얼굴에 붙이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년을 살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를 멋있게 생긴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가 가면을 벗었더니 자기 얼굴이 진짜 그 가면의 잘생긴 얼굴로 바꿨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도 오래써서 가면에 눌러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위장이 현실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의 본질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복음이라는 가면을 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답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주해주시고 인정해주실 뿐이지, 내 삶은 여전히 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계속 주님과 동행하다보면, 가면 쓴 사람이 수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 가면의 모습과 같이 변화가 되듯이 성화의 과정을 통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식하고 살아갈 때 우리 가운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삶이고 은혜받은 자의 삶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2-14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