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6-7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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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로마서 14장 6-7절
짝퉁이라는 속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짜 명품을 말하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짝퉁을 '진짜와 거의 똑같이 만든 가짜 상품'으로 정의합니다.
'진품명품'이라는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1995년부터 지금까지 1000회가 넘는 장수 프로그램인데, 전문가들이 출연해 골동품의 진위와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해 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연애인들도 감정 평가단이 되어 골동품의 가격을 매기는 프로그램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골동품 소장가들에게 그 물건을 소장하게 된 사연을 직접 들어 보고 연예인들이 나름대로 가격을 정합니다. 출연자들이 집에 있는 골동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격은 얼마인지 감정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맞추는 프로그램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출품작 가운데 고가의 골동품으로 추측되는 것일수록 대부분이 가짜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어떤 중년 신사가 오래 되어 보이는 붓글씨를 한 점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직접 쓴 글이라고 했습니다. 소장자는 애국자의 붓글씨를 소장한 것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연애인 감정가들 역시 감탄을 하면서 매우 비싼 가격을 매겼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전문가의 평가만 남아 있는 상태. 숨을 죽이고 전광판을 지켜보는데, 단돈 500원이 나왔습니다. 소장자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금세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가짜였던 것입니다. 소장자는 지금까지 가짜를 보고 기뻐하고 있었고, 가짜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교회에 다니고,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예배를 드릴 때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고, 찬양도 하고, 때론 눈물도 흘리고, 감격도 있고, 내려놓음도 있고, 열심히 봉사와 교제를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태 신앙이면, 즉 엄마 배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모태신앙이 아니더라도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영접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세례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예전에 어떤 세미나에서 옥한흠 목사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등록해서, 목적을 가지고 직분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모든 예배를 빠지지 않고,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 드리고, 가끔 눈물도 흘리고, 목사님 설교에 고개도 흔들고, 때때로 헌금도 티나게 하면, 그 사람은 직분을 받을 수 있다고 하신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정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주 본질적인 문제,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무엇인지 오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창조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과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모든 인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나의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대의 표현으로 바꾸면,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존재하실 뿐 아니라, 그가 주인, 곧 왕이라는 사실을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까지 성경 전체에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빠져버리면 성경의 가르침이 다 무너져버립니다. 이것은 성경의 척추와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주 만물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며 왕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것이 삶의 기본 전제가 되어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주인이신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물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진지한 물음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인 로마서 14장 7-9절을 통해 우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7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 중에’라고 할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같이 있었던 그의 팀원들과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 전체를 말합니다. 즉, “우리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중심성에 더 이상 매여있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표현을 쓰고 난 다음, 바울은 8절에서 그것을 다시 풀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입을 열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인생의 삶의 목적이 선명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합니까?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8절 후반부에서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누구를 위해서 산다.’라는 표현과 ‘누구의 것입니다.’ 의 표현은 약간 다릅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말은 훨씬 더 강력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를 위해서 사는 어떤 남자가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내를 위해서 설거지도 하고, 아내를 위해서 밖에서 열심히 일해서 받은 급여를 아내가 관리하는 통장으로 이체하는 것, 이런 삶을 아내를 위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싫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설거지 안 할래. 급여 통장은 이번 달부터 내 통장으로 바꿀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산다는 것’은 이런 자발적인 선택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것’이라는 뜻의 헬라어, 투 퀴리오스(tou Christou)라는 단어는 ‘주님께 속했다’는 뜻입니다. 앞의 예로 이야기하자면, 이 남편이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당신, 좀 들어와야 되겠어요. 지금 설거지가 밀렸어요.” 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아내가 있습니까? 아내가 재정신이 아니죠. 그러나 아내에게 속한 사람은 그냥 하던 일을 멈추고 가야합니다. 그 남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달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속했다’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최상의 뜻이고,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쫓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참된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고백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때부터는 그 예수님이 주인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의 진정성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사람이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결정할 때, 직장을 옮길 때, 청년들은 이성교제를 할 때, 자녀들이 대학을 결정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아이들을 키울 때 이것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은 무슨 가치에 의해서, 무슨 목적으로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정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특별히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고 축적하고 쓰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보면, 즉 이 과정에서 정말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분의 가치관과 뜻에 순종하는지, 진정으로 예수님이 주인인지 아닌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세상에서 하나님과 경쟁할 만한 존재로 ‘재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돈을 섬길 수 있다는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회심은 반드시 지갑의 회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라면,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돈의 문제는 물론,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렇게 모든 영역에서 정말 예수님이 주인인 것처럼 따라가지는 못하잖아. 무슨 결정을 내릴 때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너문 많이 받고 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순간순간 그 기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꽉 들어찹니다.
이럴 때, 육군훈련소의 훈련병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훈련소에 갓 들어온 훈련병은 총기 분해나 조립은 고사하고 총도 한번 쏴보지 못했습니다. 제식훈련이나 겨우 하는 수준입니다. 군대에 갔다고 해서 곧 바로 총도 잘 쏘고 전투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사람은 군인입니다. 아직 특전사와 같은 존재는 아니지만, 군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정성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과 우리 자신은 압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삶을 살고, 여전히 성장해야 하고, 아직도 미성숙한 부분이 많습니다. 과거에서 오는 여러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주님,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일단 군에 입대하면 비록 총 한번 제대로 못 쏘고, 제식훈련이 몸에 베어있지 않았어도, 주님은 나의 주인 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확신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까?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양도하셨습니까? “하나님 이제부터 내 인생을 인도해주십시오. 당신이 내 주인이십니다.” 진심으로 양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를 위해서, 그와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제 우리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다 못 따라간다고 할지라도 그분이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더불어 그분의 뜻을 따라 성장하면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고백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았다면,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 해도 그것은 가짜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거나 문화적으로 기독교가 익숙해서 아직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분이 있습니까? 아직 한번도 진정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일주일 내내 힘들게 살았는데 일요일이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가족들이 다 다니니깐 가족의 평안을 위해서 교회를 다닙니다.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고 헌금도 하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메시지에 정직하게 반응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의 인격에 부딪혀 일으키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나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두 번째는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라고 말하면, 거짓말 하거나, 사기, 도둑질 같은 행위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행위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SIN 인데, 가운데에 있는 알파벳이 말해주듯, ‘나 자신’이 중심인 상태, 즉 ‘나 자신’이 주인인 상태가 바로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전부 “내 꺼야”라고 주장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갖 거짓말, 사기, 도둑질 같은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로마서 3장 11-18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죄라는 개념은 단순한 도덕 개념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들은 관계에서 서로 고통을 주고, 하나님 없는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고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들은 늘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수많은 문제와 고통을 야기 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고통과 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절하여 겪고 있는 우리의 실존의 문제가 아닙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대한 반역의 대가는 죽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라고 말합니다. 죄는 곧 죽음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 우리 각자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에 기초한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6장 23절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표현은 조금 약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정확한 표현을 말하자면,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악한 세상에서 악에 물들어 살아가는 그런 존재, 하나님의 심판만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지셨다는 사실에 또한 감격하며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를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세 번째 정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나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어떤 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 우리 각자를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짧게 요약하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그저 감사합니다. 예수님, 하나님 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도의 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졌다가 구조를 받은 사람이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고마워요.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살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접이란, “제가 죽을 목숨인데 당신이 생명을 걸고 나를 살려주셨으니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영접은 하지만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겠다고 말합니다.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나중에 신앙이 성숙하고 난 다음에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접이 아닙니다. 영접이란, 죄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자신이 주인 노릇하는 것이 죄라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나중에 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직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지 않으며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것은,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 가겠다고 결단하고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한 자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 이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까?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모두 내어드려, 그 안에서는 누리는 자유함과 평안함을 경험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것” 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나의 삶의 영역에서 모든 결정의 순간에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아내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받은 구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고백할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전 인격적으로 받아드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