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11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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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11절
즐거워 하느니라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은혜 아래 살아 갈 때 가능합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삶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다” 헬라어 “카우카오마이”는 고난을 즐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은혜의 자리에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다시 말해, 교만하게 어떤 것을 내세우고 자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차 있다“ 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어떤 확신이었습니까?
장차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니깐,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그 목적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already, but not yet입니다. 우리가 의미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기다리며 견뎌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 때문에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 있기에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국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의 책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죄라는 외국 주둔군의 그늘 아래서 살고 있다. 아무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다. 그 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멀리서 전투가 있었고 전세가 뒤 바뀌었다. 이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주둔군은 혼란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나치는 유럽 전역에서 추출 될 것이다. 다만 그들은 아직 이 나라에 주둔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완전히 뒤 바뀌었다. 승리와 해방의 기운이 퍼져나간다. 이미 해방된 듯한 기분이다. 언젠가 싱가폴에 포로 수용소에 있었다는 한 남자를 만난적이 있다. 그는 단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적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용소내 분위기가 일시에 돌변했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이후 1년 만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전에 유럽 전역에서 이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승리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이미 승리했다. 적들의 등뼈는 부서졌다. 우리는 이제 승리의 감격 속에서 기나긴 압제의 밤이 끝날 것을 기대하면서 살면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이전의 삶은 우상숭배자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고 그 신실하심으로 인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승리가 보장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 바울은 환난이 어떻게 소망을 갖게 해서 자랑하는지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환난 – 인내 – 연단 – 소망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환난 중에서도 자랑하고 즐거워 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그 환난이 인내를 낳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모네”입니다. “심한 악밥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오래 견디는 힘”을 의미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자들에게, 경건하게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살고자 할 때, 박해를 받는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가치대로 살려고 할 때, 세상은 비웃을 것이고, 그 가치대로 살게 되면 이 세상에서 박해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사는 길은 세상이 볼 때, 성공하지 못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실패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계셨고,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었습니다.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말 몇 마디로 사람들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찾아올 때면, 예수님은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쫓아다닐 때 그것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제자는 겨우 12명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실패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십자가에서 쓸쓸이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가치대로 살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실패한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결말이 아니라 더 중요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평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알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 는 말은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인해 어려움을 참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하나님의 복음대로 살고자 할 때 받는 어려움입니다. 그런 환난이 반복되면서 인내가 생긴 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연단입니다. 인내는 “도키메” 라는 단어인데, 원래 철을 가공할 때 쓰이던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장관에서 철을 가공할 때, 망치로 쇠를 내리 칩니다. 그리고 찬물에 넣다가 다시 빨갛게 달군 다음 망치로 내리칩니다. 이것이 연단입니다.
바닷가 해변에 가면 둥근 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돌은 처음부터 둥글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의해서 깍이고, 모난 곳이 없어지고, 마침내 매끈한 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과 인내와 연단으로 인해 둥근 돌로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상으로 만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우리를 연단 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단은 우리를 소망으로 안내합니다. 소망은 “엘피조” 라는 단어인데, 바울이 의미한 소망의 의미는 “하나님이 반드시 건지실 것이라는 확신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미래의 확실성을 근거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잘될지, 잘못될지 모르니 소망한다“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확신에 대한 소망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구원이 매우 확실하기 때문에 갖는 ”소망“ 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11장 1절은 소망과 믿음의 관계를 잘 말해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바라는 것들 “소망”입니다. 실상은 “휘포스타시스”, 확신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이 확실히 나타난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소망과 믿음을 바꾸어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4장에서 믿음은 주로 과거형이지만, 소망은 미래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환난을 통해 인내가 생기고, 인내를 통해 깍여 나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을 거쳐 우리 마음에 점점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삶은 여전히 어렵고, 힘이 듭니다. 매일매일 환난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역경, 핍박, 가난, 질병, 실패 등 모든 곤고와 아픔을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도 인생의 고통에서 면제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어려운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요?
사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병이 안 납니까? 교회를 다녀도 병들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모두 풍족합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재난을 모두 날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환난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비록 환난을 당하나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의 자녀가 환난을 당하면, 인내하게 되고, 인내하다 보면, 연단을 받게 되고, 연단을 받다가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더 커지게 됩니다. 환난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더 밝아지기 때문에 환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을 맛 볼 수 없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루마니아가 공산 치하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1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죄수가 독방에서 혼자 견디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목사님은 감옥에서 14년의 시간을 버텼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 [하나님의 지하운동]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옥에서 보낸 햇수가 저에게는 너무 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홀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기쁨, 하늘이 주는 그 기쁨, 장차 돌아갈 영원한 천국에 대한 기쁨이 있었기에 그가 거했던 지하 감옥도 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바꿀 수 있음은 마음에 하늘의 기쁨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의 기쁨, 기쁠 것 없는 상황에서 기쁨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찬양은 죽음에 대한 승리의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가 감옥 밖에서 지낸 사람들보다 휠씬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은 발견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이 구절은 미래에 하나님의 영광이 도래하는 것을 대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느니라” 는 현재에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삶 속에서 현재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미래로부터 계속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고 다니면서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학식많고, 고상한 사람 뿐 아니라, 부도덕한 사람, 우리처럼 소망이 없는 사람, 죄인들을 모두를 포함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꽃 한송이가 있다고 할 때, 시인은 그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과학자는 그 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그 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합니다.
찬송가 79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이것만 보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음 소절은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이 사람에게는 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지막 소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하나님의 찬양하는 자리 기쁨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지라도 비관하지 않습니다. 세상 일이 뜻대로 안 풀려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환난을 통해 우리가 연단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가까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하기에 우리는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결국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