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1-13 아브라함과 다윗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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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다윗
로마서 4장 1-13절
한 분야를 전공하고 수료할 때 논문이라는 것을 쓰게 됩니다. 논문을 써 본 사람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논문 작업에 있어서 실질적인 작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용입니다. 어떤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맞게 연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가 맞는 것인지, 이 논문을 통해 무엇을 보기 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선행 연구들을 찾아보고 이론적 배경을 기술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용을 하게 됩니다. 인용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보다 더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이나 연구 결과를 인용해서 내 주장이나 나의 연구 내용을 보완하고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장에 들어오면서 바울은 마치 논문에서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누구를 위한 편지입니까? 로마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편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 일차적인 독자는 로마에 살고 있는 소위 유대인 크리스찬들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권위 있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두 사람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함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살펴볼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은 한 가족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라는 장소에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주한 사람입니다. 불모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개척을 한 사람입니다. 평생의 삶을 통해 흠이 없는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그를 부를 실 때, 하나님의 약속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 질 것이다”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사람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놀라운 이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가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부여될 수 있는,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이 모든 놀라운 타이틀과 화려한 삶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을 대표하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행위를 가지고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행위나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절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1절에 나오는 ‘육신으로’라는 말은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어떤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들고 나가는 자랑거리를 의미합니다. 2절의 ‘행위’는 선행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창세기 15장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아직까지 그리고 15년의 시간이 흘러 지나갔습니다. 15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의 마음은 암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나이 80에 자식도 없는 사람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이 많아지리라”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아멘”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신지 2천년 전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오실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창세기에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아브라함은 모호하게 알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후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직 나지도 않은 예수, 수 년 후에 오신다는 그 예수를 내다보고 믿었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씨를 통해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기뻐했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 때문에 의인으로 인정받고 구원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뿐입니다. 다른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선한 행위를 들고 나오지 않기 바랍니다. 과거의 무슨 공로를 세웠다고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좀 다녔고, 성경을 좀 안다고, 기도 좀 한다고 자랑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랑할 것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가 우리가 착하거나 인격이 탁월하고, 도덕적이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냥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예수 믿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미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보다 휠 씬 더 잘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아브라함은 할례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받은 후 14년이 지난 뒤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9-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구원은 할례받기 전에 받은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할례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합니다. 할례는 형식이고 표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아 의인이 되었다고 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할례를 받았으니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이점을 우리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우리 시대로 말하면 세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결코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 세례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영세를 받아야 죄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성당에서 영세를 줄 때, 성인을 본받으라는 의미로 세례명을 줍니다. 성인들의 이름을 본받으라는 의미는 아름다운입니다. 그런데 세례명을 주는 카톨릭의 신학적 배경은 다른데 있습니다. 가톨릭이 성자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의 의를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구원받기에 필요한 의가 10이라고 한다면, 성인들은 만개, 십만 개를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영세명에 해당하는 성자가 남겨 둔 그 여분의 의로 구원받는 다는 것이 영세명을 주는 동기이자 이유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자마자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세례만 받는다고 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세례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형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율법에 있는 조항을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면 그는 당연히 율법시대에 살아야 논리가 맞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에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기 않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율법을 주셨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때로부터 430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무슨 재주로 그가 율법이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사람들이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세상의 상속자”라는 말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이 낳을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의 원리는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구원의 문제에까지 그대로 적용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또 다른 예로 들고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면 하나는 아브라함이고 또 하나는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다윗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진 목자였습니다. 그 백성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수 있었던 진정한 왕이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던 민족을 통일했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위대한 음악가였고, 노래와 악기는 귀신을 쫓아냈고, 수많은 시로 백성들에게 참된 위로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런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존경을 받아 마땅한 다윗도 그의 행위와 그의 업적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위대한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불법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본문 6절 이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불법과 죄란 말이 나옵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불법한 사람이었고 죄인이었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생애 가운데서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어느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자기 민족을 위협하던 골리앗에게서 자기 민족을 극적으로 구출했을 때, 그 때 다윗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아니, 남과 북으로 나눠져 있는 한 민족을 그가 통일하고 국민들에 의해서 그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추대를 받는 순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러나, 본문은 그때가 다윗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다윗의 행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불행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다윗은 내면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왕이요, 지도자요, 음악가요, 시인이요, 추앙을 받는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내면적으로는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이런 불행은 그 어느 날에 있었던 사건으로 더욱 심화됩니다. 자기가 거느리고 있었던 부하의 처를 간음했던 사건입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빼앗었던 그 사건으로 다윗은 더욱 불행해 졌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과 자리를 이용해서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그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완전범죄의 성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후에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어졌고 노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의 다윗의 심정을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고백이 시편 32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3절과 4절의 고백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자기 마음속에 경험하고 있었던 죄책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입니다. 이 견딜 수 없는 마음속의 안타까움과 갈등과 영혼의 황폐함과 육체적인 쇠약도 함께 있었음을 이 고백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나단 선지자의 도움을 받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와서 그가 지금 고독해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불행의 원인에 직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해결되지 못한 죄였습니다. 나단의 도움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는 그 순간, 조건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자기 생애에 처음으로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 행복에 대한 고백을 시편 32편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편의 처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허물의 사람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시작한 후 5절에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 문제를 잘 처리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러므로 신구약을 통틀어 구원의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성도나 신약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장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할례 받지 않은 아벨, 에녹, 노아 세 사람이 기록되어 있고, 율법을 모르는 7명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고, 율법을 받은 후 살았던 8명의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칭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그들의 생애를 통해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이들의 삶을 열거한 후 뭐라고 말합니까? 히브리서 12장 1-2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기 소원합니다. 오늘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믿기만 하번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를 실감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다”입니다. 4장에서 11번 나오는데, 3, 4, 9, 10, 11절 등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정해 버리다” 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의롭게 살지 못했지만 의롭게 산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깨끗한 성품이 아닌데도 깨끗한 사람으로 인정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를 따지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주신 예수님만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격도 없고 경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자는 가난해도 찬송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복과 이런 감격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길 소원합니다.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못생긴 남자를 예로 들었습니다. 아주 못생긴 남자. 거울 볼 때마다 괴롭고 머리도 없고, 눈도 작고 아주 못생겼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다가 어느날 잘 생긴 사람의 가면을 본 떠서 만들고 얼굴에 붙이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년을 살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를 멋있게 생긴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가 가면을 벗었더니 자기 얼굴이 진짜 그 가면의 잘생긴 얼굴로 바꿨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도 오래써서 가면에 눌러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위장이 현실이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며, 믿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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