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17-29 표면적 그리스도인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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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그리스도인
로마서 2장 17-29절
한 때 유행했던 유머 가운데 교황 시리즈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황이 연옥에 간 이야기입니다. 천주교에는 연옥설이 있는데, 천국과 지옥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황이 나이가 들어 죽었습니다. 천국에 갔더니 천국 문 입구에 사람들이 얼마나 길게 늘어서 있던지 좀처럼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지’ 물어봤더니 한국 사람들이 워낙 천국에 많이 왔는데 한국 사람들이 성형을 많이 해서 얼굴 대조작업을 벌이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명부에 있는 것과 실제 모습이 달라서 확인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성격 급한 교황이 그만 못 참고 ‘그럼 지옥이라도 가자.’하고 지옥에 갔더니 지옥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긴 또 왜 이런가’ 해서 봤더니 여기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워낙 찜질방에서 연단이 많이 되어서 지옥 불에 넣어봤자 끄떡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 보수작업을 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성격 급한 교황은 결국 천국도 지옥도 못 가고 연옥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성형 1위 국가입니다. 이제 성형수술은 사회의 보편화 현상입니다. 원래 성형은 못생긴 얼굴을 잘 생기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화재를 입었다거나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해서 얼굴이 흉측해진 모습 등을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성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 위해, 좀 더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인기 있는 의사가 형성외과 의사이고, 방학이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성형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성형이 유행이 되고, 인기가 높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겉모습을 신경 씁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드러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서 겉으로는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찬양도하고 봉사도해도 열심히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모습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예배당에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2장 11절의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 “누가 진정한 유대인이냐?” 하는 중대한 문제를 우리들에게 제기합니다. 그리고 본문 28,29절에서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유대인, 즉 겉으로 나타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면적 유대인, 즉 내면적 유대인이 되어야 진정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외관상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7절에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네가” 라고 하면서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네가”에 우리의 신분을 넣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네가” 그리고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표면적 유대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이 표면적 유대인으로 머물러 있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에만 집착하고, 삶은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7-20절에서 유대인이 자랑하고 있는 특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17절에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듣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었던 놀라운 특권으로 인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통해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어떻게 그들을 이끄셨고, 함께하셨는지, 모든 만물을 섭리하고 계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18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게 된 일, 이런 하나님의 지식, 도덕적인 지식을 깨닫게 된 것은 굉장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것들로 인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하나님의 지식만 있었지 삶은 없었습니다. 감사는 있었지만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고백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세리와 가까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에만 집착하고 이 특권에 따른 의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 세리, 토색하는 사람들, 불의한 자들, 간음하는 사람들을 행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다르게 만드신 그 이유, 나를 구원하신 이유, 나를 선택하신 이유,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이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은 평민이하의 하찮은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를 믿는 백성이 누구이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율법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관한 지식만 있었지, 그렇게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감사는 있었지만,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부르시고, 선택하게 하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신 이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유대인을 표면적 유대인으로 머물게 한 이유입니다.
또한 19절과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맹인의 길로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절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범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유대인들은 표면적 유대인으로 머물게 한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는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말하고,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말하면서, 굉장한 자부심에 사로잡힌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우리는 때때로 남의 대해서는 굉장한 기대를 걸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기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을 엄격하게 비판하지만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용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정한 행동을 하면 도둑질이라 규탄하면서 내가 같은 일을 하면 당당한 권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불륜에 대해서 간음이라고 정죄하면서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우상숭배자라고 지적하면서 성경을 읽을 때, 탐심이 우상숭배라는 말에는 그냥 스치고 지나갑니다. 성경을 모르는 이웃에게는 비판하면서 성경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에게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23절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시정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시여, 저 아래 지방에서 일어난 서민들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촌에 있는 한 도시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또 한 사람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이 부자는 많은 양떼들과 소떼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은 암양 한 마리 밖게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부자집에 어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자기의 많은 양떼와 소떼를 잡는 것이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잡아 손님에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들은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러한 짓을 하냐고, 그 사람을 당장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흥분했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고 있는 흥분은 사실 누구를 향한 흥분입니까?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나단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윗에게는 여러명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인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없었던 다윗이 자기의 신아 우리아에게 하나밖에 없었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아는 죽이는 범죄를 은폐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아직도 표면적 신앙으로 머물러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타인을 가르치는 일에는 열중하면서도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에게 주신 이 말씀이, 이 복음이 먼저 적용되어야 할 삶의 자리가 바로 나의 삶이고, 이 말씀으로 깨져야 할 사람이 바로 나이고, 이 말씀으로 새로워져 할 대상이 나로 나이고, 이 말씀으로 거룩해져야 할 대상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으로 표면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을 할례를 통해 말합니다. 25절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할례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 장면이 나옵니다. 그 언약의 핵심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과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이제부터 유대인을 택하신 동시에 그들의 주권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며 축복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자격 얻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언약의 후손임을 증명하시는 표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꼭 할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할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징에 부합되는 삶의 내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그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외적인 상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내용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4장 4절을 보면,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피부의 가죽을 베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피부의 가죽을 베기 전에 먼저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강조합니다. 신명기 10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고 하셨고, 신명기 30장 6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면서,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을 내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지금 그들은 상징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실 때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교회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내가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새가족 공부가 끝나면 등록교인이 되고, 목사님 심방 후, 어느 교회에 다니는지 교패를 입구에 부칩니다. 그리고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교패를 부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유아세례 받았다고, 모태신앙이라고, 세례받았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다 다닙니다. 예수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중요한 것은 상징이 아니라 그 상징자체보다 그 상징이 의미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 열망이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도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지금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에 살아계시고, 나를 다스리시고 나의 의식을 지배하시고, 내 생각을 다스리시고 나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삶의 내용이 되고, 우리 삶의 실상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내 나의 삶의 자리에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외적인 상징, 표면적 상징만을 붙들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향해, 바울은 말합니다. 24절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 실체가 없는 삶, 그 내용이 없고, 고백이 없는 삶, 외적인 형식과 상징만을 가지고 있는 삶을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 모독을 받고 있다고 하십니다. 왜? 우리의 신앙은 외면적, 표면적 신앙에 머물러 있을까요? 신앙의 상징에는 집착하고 있었지만 그 신앙이 의미하는 내용을 내가 추구하지 못했던 삶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정직하게 이 말씀을 통해 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표면적 그리스도인입니까? 내면적 그리스도인입니까?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해서 위선자가 되기도 하고, 불순종의 삶을 살기도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고 언약하지만, 아직도 내가 가야할 길이 멀지만, 주님이 분명히 내 안에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며,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주고 계시다는 이 사실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내면적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고백과 영광과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무리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바로 서기를 소원합니다.
2023년 올 한 해 우리의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말씀을 통해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다스리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우리에게 선한 길, 좋은 길, 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끝내 승리케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장 좋은 길을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간다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으로 2023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삶 가운데 역사하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복기도>
지금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내면적 그리스도인의 향기와 고백과 영광과 열매를 맺기 소원하는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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