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4:14-18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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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를 인도하신다.
수 24:14-18
여호수아의 유언의 메시지는 전반부는 이스라엘의 두령들과 리더들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의 메시지는 후반부에서 전 백성들에게로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보다 여호수아가 어디에서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다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하필 세겜입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지명이 몇 군데 나오는데, 첫번째로 중요한 역사적 현장은 길갈입니다. 그들이 요단을 건너자마자 요단을 건넜다는 기적의 상징으로 기념비를 세운 곳이 길갈입니다. 후일에 네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이러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의 역사가 있었음을 증언해 주라고 명령하신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길갈은 그런 역사적 기념비가 세워진 장소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은 현장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길갈은 “모든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이겠습니까?
이런 곳에서 여호수아가 마지막 설교를 했다면 기념도 되고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길갈보다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곳이 있는데 실로라는 곳입니다. 실로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을 때 수도와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실로에 회막, 즉 예배의 처소가 세워져 하나님의 법궤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실로가 길갈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가 마지막 설교를 실로나 길갈에서 하지 않고, 세겜에서 했을까요? 예를 들면 본당에서 하지 않고 구석진 작은 방에 백성들을 불러놓고 설교하는 식입니다. 앞의 두 지역보다 세겜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왜? 이곳 세겜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을까요? 본문 24장 32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이 구절을 보면 세겜에서 설교가 끝난 후에 요셉의 장례가 마무리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의 장례가 몇 대가 흐른 후에 이곳에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장례 때문에 여호수아가 고별 설교를 세겜에서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2-26절을 보게 되면, 요셉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서 먼저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보통 장례예배는 입관, 발인, 하관 순서로 드립니다. 원칙적으로는 모두 장지에 돌아와 위로예배까지 드려야 장례가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요셉의 장례는 입관을 하고 끝나 버렸습니다. 사실상 그의 장례가 마무리 되지 않은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역사상 가장 긴 장례식이 요셉의 장례식입니다. 몇 대에 걸쳐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이 장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끝이 나는데 그곳이 세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집을 떠난 지 20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첫 번째 머물렀던 장소가 세겜입니다. 그래서 세겜은 야곱의 일생에 적어도 그가 멀리 떠날 수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이 모든 순간에 붙드시고 함께하셔서 결국은 돌아오게 되어 처음으로 장막을 치고 머문 곳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하몰의 아들들에게 이 땅을 금을 주고 이 땅을 삽니다. 그리고 자식들 가운데 가장 애정을 쏟았던 요셉에게 물려줍니다. 그 후 요셉은 애굽으로 들어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결국은 돌아오지 못하고 애굽에서 총리로 지내다가 110세에 죽게 되는데, 요셉은 죽기 전 형들에게 이렇게 유언합니다. 창세기 50:24-25 :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는 비록 애굽에서 죽게 되지만 그곳이 자신이 영원히 잠들 곳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일생동안 자기를 어떻게 만지시고 붙드시고 간섭하시는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의 장례가 세겜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역사적인 장소에서 여호수아가 전하고자 했던 마지막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아라. 우리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와 이 땅을 정복하고 살게 된 것도 언약의 성취이자 완성임을 눈을 똑똑히 보아라” 이런 메시지를 자신이 죽기 전에 반드시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각인 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구체적인 메시지를 증거합니다.
2절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이 말은 너희의 조상들은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놀랍게도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떠올리며 서두를 알립니다. 이것이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들의 전력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을 빌리자면, 전에는 너희가 이방인이요, 나그네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3-13절까지 “내가” 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내가” 는 “나는”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한 것이 “내가”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14절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의 설교는 딱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했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나만 섬겨라”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잘 못 들으면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무언가 실천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가 설교를 하고 나서 결단을 요구합니다. 백성들에게 결단의 시간이 온 것이다. 무엇에 관한 결단인가? 조상의 신들들이든, 거주하고 있는 땅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 아니면 하나님이든 섬길자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들어보면 선택권을 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나는 곳 갈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 우상을 섬길 것인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잘 생각하고 알아서 선택해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입니까? 지금 여호수아의 말은 “너희에겐 선택권이 없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뭐라고 반응하는가? 16절에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 대답을 들은 여호수아가 19절에 이렇게 말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 말씀의 결론이자, 우리가 끄집어야 낼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섬길 쪽을 택하라고 요구하자 백성들이 하나님을 택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절대 다른 신은 섬기기 않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러면 대답이 된 거 아닙니까?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가 감동을 받아야 할 텐데 의외로 찬물을 끼얹습니다. “웃기지 마라. 너희들은 하나님을 못 섬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가 말하는 섬김과 백성이 말하는 섬김의 의미가 다릅니다.
두 가지 섬김의 의미가 있습니다. 17-18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여기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단을 하면서 그 이유와 명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통해 기적을 경험했고 은혜를 받았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 사랑을 갚으며 살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렇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1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없는 이유로 첫째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투가 무엇입니까? 질투라는 개념에는 사랑이라는 강력한 속성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놓고 질투하신다는 말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고 딴 짓 하는 것을 못 견디십니다. 그렇게 질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섬기며 살겠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를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갚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를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갚으면서 살라고 요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 지도자들만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거짓말쟁이요, 사기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세요, 야곱이며 이삭이고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의 나라에 가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수치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법대로 자녀도 낳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취소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야곱은 어떠합니까? 그는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만지시고 다루셔서 결국 영적 거목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다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요셉의 장례식을 거행하면서 언약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가나안 땅에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싸움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갚으려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 소망 가운데 기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나그네의 삶의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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