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18 죄인인 이유

로마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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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인 이유
로마서 3장 1-18절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인간성에 관한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과연 믿을만한 존재인가?? 혹은 인간의 심성은 과연 어떠한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중국의 맹자는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인간 속에 있는 것들을 잘 이끌어준다면 인간은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꽤 괜찮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순자같은 사람은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인간은 본래 악한 존재이고, 전혀 기대할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개선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순자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우리 인생 경험이 증거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죄인인 인간은 죄로 시작해서 죄로 마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생입니다.
어떤 청년이 장난삼아 영국의 유명 인사 20명을 뽑아 명단을 만든 뒤 일제히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전문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 이튿날 어떤일이 벌어졌을까요? 전문을 받은 20명이 같은 시각에 일제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인이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그 첫 장에서 로마사람들을 향해 죄악을 폭로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이방인들을 향한 죄악들이 무엇인지, 그들이 자랑했던 문화, 그들이 자랑했던 정치, 그들이 자랑했던 사회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불신앙과 부도덕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 고발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복음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그 다음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이들은 로마인이나 헬라인에 비해 매우 도덕적이고 매우 종교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에 들어와서 유대인, 혹은 헬라인, 로마인을 포함해서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장 9절에서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모두가 “죄 아래 있다” 는 말에서 사용된 죄는 단수입니다. 죄들이 아니고 죄라는 말입니다. 로마서에는 ‘죄’를 단수로 사용할 때와 복수로 사용할 때의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 복수의 개념이 약간 애매한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 매우 정확하게 구별해 놓았습니다.
죄를 복수로 사용할 때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여러 가지 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저것 잘못한 것들을 두리뭉실 모아서 죄라고 말합니다. 한편 죄를 단수로 사용하면 이것은 ‘죄의 실체’,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소개하였습니다. 즉 죄는 마귀와 비교되는 실체를 말합니다. 또 ‘죄 아래’에서 ‘아래’라는 말은 헬라어 전치사 ‘휘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이 디모데전서 6장 1절에 나옵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에서 “아래”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면 멍에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쇠사슬에 묶여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 종살이 하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무서운 힘을 가진 죄의 손아귀에 붙잡혀 끌려 다니고 있는 모습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모든 사람은 다 예외 없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까?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인 이유를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당신은 죄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두분의 사람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이라는 딱지가 그 사람의 자존심이나 종교성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장에서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바울은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지적하고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이방인들과 같은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 몹시 불쾌했을 것입니다. 싫어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강하게 항변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질문을 가상으로 묻고 답하는 일종의 가상적 변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인임을 지적하였을 때, 우리는 이방인과 똑같은 의미에서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특권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3장의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만약 이방인과 똑같은 죄인된 사람이라면 유대인이라는 특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인 할례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2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은 유대인에 주어진 신앙적인 특권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그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을 바울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만 해도 후레쉬라이트(손전지)가 매우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에 산을 행군하는 군인들에 있어서 그들이 손전지를 지급받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들에게 손전지가 주어져서 불을 켜서 어두운 밤길을 행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손전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손전지가 주었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용하지 않거나 혹은 사용할 줄을 모른다면 그 주어진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토라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이 굉장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특권이 당신들의 삶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으로 만들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후에 이 백성들을 통해서 행하시고자 하는 많은 언약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들과 약속들은 어떻게 될까요?
무효화될까요? 그렇다면 그 약속들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은 바로 이 문제를 3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서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미쁘심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성실성은 어떻게 될까요? 이 백성들을 통해서 하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계획들은 무효화되는 것일까요? 바울의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선택하셨을 때, 그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계속되고,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한 유대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사람들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정당화해 주지는 결코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와 선의 도구로 쓰임받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또 그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하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나타났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욱 드러날 수가 있었다면 우리의 악함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실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5절과 7절과 8절을 통해서 계속됩니다.
‘그러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정이라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룟 유다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반역과 배신까지 사용하셔서 십자가의 구속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반역과 배신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면 그 불의한 것이 용서될 수가 있을까요?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이 그들이 이방인과 꼭 같은 죄인으로 분류될 수 없다는 모든 변론이 무효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유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가 없다면 그 많은 변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죄인입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 죄 아래 있느니라’ 우리는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은 우리가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죄인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10절에서 12절까지 읽어보면 우리가 죄인인 이유를 기록하였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본문의 내용은 주로 시편 14장 1,3,5절 10장 7절, 140장 3절, 36장 1절, 이사야 59장 7,8절입니다. 그러니깐 구약성경이 진단하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아무 무능하고, 아주 부패하고, 절망적이다” 입니다.
수학자이자 발명가, 신학자인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가지의 단어를 신용하지 않는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자도 없다’고 모두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앞에, 이 하나님의 진단앞에, 이 창조주와 심판자의 진단 앞에서 누가 예외임을 말할 수가 있을까요?
10절부터 12절까지 이런 죄인들에 대한 일반적 서술을 했던 바울은 13절에서 17절까지 죄인들에 대한 구체적 진단을 시작합니다. 이 진단의 내용을 간단히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 보라는 것입니다.다듬어진 말 말고 무의식 속에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말 소리를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됨을 스스로 자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습니까? 여기 그들의 언어속에 그들의 행동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죄악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3절부터 17절까지 바울사도는 특별히 두 가지의 죄악을 집중적으로 고발합니다.
첫째는 언어의 죄악이고 둘째는 행동의 죄악입니다. 왜 바울사도는 언어의 죄악을 먼저 말할까요? 언어는 마음의 거울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목구멍, 혀, 입술, 입을 마음으로 통하는 통로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슴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어느 사이에 내 속에 나를 증언하는 그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읽어 보시겠습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언어의 통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면, 먼저 목구멍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혀, 입술, 입 순서로 언어가 나오는 통로를 추적한 것입니다. 시작이 목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열린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에 가보면 그 무덤의 입구가 한국처럼 흙으로 덮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입구를 돌로 막아 놓습니다. 중동같은 열사의 뜨거운 사막지방에서 그속에 있는 시체가 얼마나 썩는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돌을 굴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속에서 썩는 악취냄새가 풍겨나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마음은 악취가 진동하는 열린 무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 17:9
예수님도 같은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뿐만 아니라, 부패한 마음은 말만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 더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다음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파멸이라는 단어는 파괴라는 단어로 다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며 하는 일이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어떤 사람을 살인하지 않았지만, 나 때문에 가슴 상하고 나 때문에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 때문에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고 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상처를 주어서 피를 흘리게 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간은 매우 파괴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결말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16-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자신이 가는 길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한평생 살고난 다음 무엇이 기다리는 지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모든 사람 앞에는 각자의 죗값을 지불해야 할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파멸과 고생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희망이 없고, 절망뿐입니다.
사람들이 언어에 있어서 행동에 있어서 이 죄악속에 빠진 자명한 죄인됨의 이유를 마지막 절에서 지적합니다.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 그 이유는 저희의 눈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내 존재를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사람들은 다르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오 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예외일 수 없는 죄인됨을 주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보여 주셨다면 그 하나님 앞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복음을 말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그곳,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바울이 1장에서부터 3장까지 장황하게 유대인들의 논리를 반박하며 설명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 피할 곳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십자가 앞입니다. 옛날 구약성경에 자신의 죄를 인하여 나갈 길이 없었던 그 사회속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의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마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죄인인 우리가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 죄 아래 있느니라’ 이 선언앞에 누구도 예외 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과 진노를 피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흘려 나의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주님앞에 와서 그분이 주시는 용서와 그분이 베푸시는 새생명을 체험하고 “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날 용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찬양속에 주님을 향하여 삶을 바꾸게 된 이 은혜, 이 경험,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저와 여러분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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