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극복하는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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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극복하는 긍휼
마태복음 5장 7절
요즘 드라마 중에 ‘국민사형투표’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목부터 굉호기심이 생기죠? 무슨 내용인가 싶어서 간단히 요약해놓은 영상을 봤더니 내용이 이렇습니다. 중범죄자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지 않고, 너무 쉽게 풀려나는 일이 생깁니다. 피해자들은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데 가해자들은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또 다시 죄를 저지르자 개탈을 쓴 사람이 이들에게 직접 복수해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복수를 하기에 앞서 전국민에게 먼저 문자 투표를 해요. 이 사람을 죽일지, 살릴지를 투표해서 과반수가 넘으면 죽이는 겁니다.
자!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아동 성착취물을 2만건 이상 촬영해서 이걸로 돈을 버는 파렴치한을 죽일까 살릴까라는 문자가 왔습니다. 한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고도 도무지 반성을 하지 않고,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또 그짓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여러분이라면 이 사람 어떻게 하는게 좋겠습니까? 어디에 투표 하시겠어요? 참! 철저히 이 투표는 익명으로 진행됩니다. 죽일까요? 살릴까요? 누군가는 죽여라 라고 선택할 거고, 에이~ 그래도 죽이는 것까지는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은 마음은 들지만 적어도 이 사람은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한다라는 마음이 들겠죠.
저도 제대로 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고, 그래야 사회가 안전해질테니까요. 그쵸? 너무 당연하고 확실한 생각이죠? 아무도 제 생각에 아니다라고 부정하실 분이 없으실 겁니다.
그런데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뭔가 불편한 마음이 계속 생기는거에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는데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제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죄 지은만큼 제대로 벌을 주신다면 송목사! 당신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이 저에게 덮쳐오자 참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죄 지은 만큼 하나님께서 제대로 심판하신다면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 앞에 우리가 어찌 능히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우리가 지은 죄 대로 다 벌 받지 않고, 용서해주시고, 받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의 기준을 말씀해주고 계신 겁니다. 오늘 본문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아멘.
긍휼이라는 이 단어는요, 첫째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뜻도 있구요, 둘째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상당한 피해를 입힌 원수를 용서하는 마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 긍휼을 실천하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렵습니다.
우리 민족은요, 굉장히 독특한 언어 습관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거죠. 우리 집, 우리 교회 그쵸? 굉장히 익숙하고,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씁니다. 그런데 영어는 어떻게 표현해요? My house, my church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내 집, 내 교회인거에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문화를 가지고 있죠. 그런데 우리 민족은 나 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해요. 공동체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독특한 정서를 가지고 있죠.
이런 미덕을 가진 나라지만, 먹고 살기 바빠지니까 점점 자기 중심적으로 변해가요. 그래서 갈수록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굳이 나서지 않죠.
이런 상황 속에서 나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을 용서한다? 말이 안되죠. 그래서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데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힘 입게 됩니다.
구원 받기 위해서는 값없이 긍휼을 받았지만, 구원 받은 이후는 조건적 긍휼을 받는다. 긍휼히 여기면 긍휼을 받고, 용서하면 용서를 받는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마 6:15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먼저 주님의 긍휼하심을 얻었으니 이제 우리도 그 긍휼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긍휼하심을 힘 입어 믿음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 긍휼을 실천해야 한다. 이 긍휼을 우리가 잘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자기를 저주하고, 조롱했던 유다인의 아픔을 내 일처럼 여기고 불쌍히 여겨 도와줬던 사마리아인!
1. 불쌍히 여겼다. 긍휼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 불쌍히 여겼다라는 이 말은 그 사람의 아픔을 동정해서, 안타까워해서 그의 창자가 베베 꼬일 정도의 아픔을 본인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마음이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에게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향한 너무너무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이 땅 가운데 오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긍휼의 마음은 먼저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의 한 바리새인은 죄를 토설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세리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긍휼이 없는 자의 모습은 한 바리새인과 같다. 난 그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긍휼이 있는 자의 모습은 주님과 같이 함께 죄인들과 거하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며, 그들과 같이 되셨다.
양지제일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이런 마음을 품고 서로를 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힘 입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그 사랑을 날마다 누릴 수 있게될 것이다.
2.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겼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믿음은 행함이다. 구원은 그 열매로 안다.
먼저는 기도하라.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결단으로, 지혜로 실행에 옮겨라.
1992년 LA흑인폭동이 일어났다. 한인상점 2300곳이 파괴됐고, 4112억원의 재산피해가 일어났다. 이 끔찍한 폭동의 현장 속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홍정복 씨가 운영하는 한인마트였다.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흑인들 스스로가 이 가게를 지키며 폭도들을 막아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기저귀와 우유를 살 여유가 없는 아이 엄마에게 물건을 챙겨주면서 귓속말로 돈은 다음에 주세요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청년을 향해 조심해, 넘어질라 생계 보조비로 받은 수표로 술을 사며 나머지는 현금으로 달라는 흑인 남성의 집에 전화해서 아내가 직접 이 현금을 가져가게 하는 등 돈만 벌면 그만인데 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돕기 위해 세밀한 관심과 배려를 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흑인들의 ‘마마’로 불려지기 까지 했다.
그래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흑인들이 오히려 그 가게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긍휼히 여기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긍휼이 여길 것이다 라는 이 말씀을 고스란히 열매맺은 귀한 분이다.
사람의 시선으로 봤다면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봤기에, 그의 긍휼이 열매맺게 된 것이다.
긍휼은 인종도, 문화도, 세대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각박해져가는 세상 속에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긍휼히 여겨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 사랑을 힘 입어 긍휼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긍휼이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임하여 복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