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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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유초등부 아이들이 함께 율동하니까 더 활기가 있고, 은혜가 넘치죠? 모든 성도들이 바쁜 가운데서 새벽을 깨우는 것도 참 좋고, 아름답지만, 특별히 아이들이 새벽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우리교회의 미래가 이 아이들때문에 참 밝습니다. 우리 더 하나님 안에 아름답게 자라가라고 박수로 격려할까요?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수요일에 대한 기록은 따로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날 유다에 관한 기사를 발견할 수 있죠. 오늘 우리가 읽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흥정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이죠? 예수님을 판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참 나쁜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유다를 어떻게 기록하나 보니까 배신자, 도둑놈,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 마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한테 배신자라고 말하기만 해도 엄청 기분이 상할 일인데 심지어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이라니, ‘마귀’라니 성경에서 유다를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유다가 얼마나 악한 자인지, 얼마나 실패한 인생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야… 유다만 욕할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에게도 있는 유다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야…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유다가 될 수도 있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 오늘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로, 유다는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12제자 안에 속해서 3년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한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에 같이 있었고, 수많은 무리가 주께로 돌아오고, 위로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지만, 그는 정작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 증거로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랍비여 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는데는 내 인생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내가 온전히 따를 유일한 분, 내 삶의 주인이라는 고백으로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유다의 입술에서 주님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다만 ‘랍비여’라고 부르죠. 이 호칭은 나에게 좋은 교훈을 주며, 내가 가는 길에 도움을 줄 만한 분이라는 의미 정도입니다.
이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유다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수를 따랐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뭔가 목적이 따로 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같이 지낼수록 자신의 생각과 뭔가 맞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세요. 유다가 돌아섰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죠. 내가 예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게 있는데, 죽어버리면 모든게 허사가 되잖아요? 그래서 유다는 그때부터 플랜B를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만약 예수가 죽는다면 그동안 내가 3년동안 따라다닌 투자금 정도는 회수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은 30세겔에 예수를 팔려고 대제사장 무리들과 흥정하고 있었던 거죠.
은 30세겔은 소 6마리 정도의 가격, 또는 종 하나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작은 돈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이 감히 이 값을 매긴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죠. 예수님이 고작 소 6마리? 노예와 동급으로 유다는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가치를, 그분의 영광을 고작 은 30에 팔아버렸던 겁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또 그분이 감당하신 십자가는 고작 은 30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느 정도의 가치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겠다고 고백하지만, 우리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정말 주님을 가장 우선 순위로 놓고 계십니까? 눈 앞에 있는 현실적 어려움들 때문에 언제든지 주님을 뒤로하고, 헐값에 팔아버리는 모습이 우리 속에는 혹시 없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그 기준이 결국 우리 중심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자답게 믿음을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적 문제와 경제적 가치로 우리 믿음을 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돈벌이로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나의 선택에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증거되고 있습니까?
유다의 우선순위는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목적 달성이 어려워 보이자 헐값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결국 돈을 따라 산 것이죠. 눈 앞에 현실 속에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단 한 번도 주님이라 부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과연 주님이라 부르기에 합당한 삶으로, 그런 선택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며, 정말로 우리 삶에, 우리의 선택에 예수님이 온전히 주님으로 고백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우리가 살펴볼 유다의 모습은,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저도요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참 많아요. 그럴 때 어떻합니까? 돌아서는 거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다시 나아오면 주님이 용서해주세요. 다시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세요. 이게 신앙생활의 묘미고, 우리가 이 새벽을 깨우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아멘이시죠?
그런데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어요. 유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 기회까지 놓쳐버린 거죠.
여러분! 성경에서 마치 가룟 유다의 운명이 예수를 팔자, 배신할 자라고 정해진 것은 아니에요. 비록 예레미야와 스가랴서에서 이와 관련된 예언이 있고,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맞지만, 여러분! 결국 선택은 유다가 한 것이지, 유다가 마치 그럴 운명처럼 태어나 이 일을 벌인게 아니에요.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해요. 마치 태어나서 그런 운명은 없어요. 결국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그 책임을 지는거지, 하나님이 애초에 그런 운명으로 태어나게 하셨다? 이건 큰 오해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12제자들을 발을 씻겨 주시잖아요? 그 때 다른 제자들의 발은 다 씻겨 주면서 가룟 유다만 너는 배신할 놈이니까 패스! 이러셨나요? 아니에요. 똑같이 씻겨 주십니다. 발을 씻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요? 종이죠. 당신을 위해 나는 기꺼이 종이 되겠습니다. 그만큼 나는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라는 표현으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겁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즐기실 때, 여느 때와는 달리 헬라식으로 식사를 즐겼어요. 헬라식은 주인공이 정중앙에 배치되고, 그 주위에 중요한 순번에 따라 자리 배석이 되요.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 서로 왼쪽편에 앉은 사람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 다리를 그 옆으로 쭉 뻗어서 서로서로 연결된 구조에서 밥을 먹어요. 지금 우리가 그렇게 먹으면 체할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이 식사 자리를 통해 서로 친밀감을 나누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 주위로 누가 있었냐면 예수님의 품에 안긴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었고,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새벽이니 긴 설명은 나중에 기회될 때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셔서 가룟유다를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셨고, 심지어 그를 위해 빵을 찍어 나눌만큼 그를 소중히 생각하셨습니다. 그가 배신 할 줄 알면서도,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면서도 주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준 것이죠.
그런데 주님이 건넨 그 빵을 가룟 유다는 먹지 않았습니다. 그 빵을 받으며 다시 상에 내려 놓고 그 자리를 떠났죠. 뭐하러 갔을까요? 예수님을 어떻게 잡을까 모의하러 가요. 참 나쁜 놈이죠.
그런데요, 유다만 그런게 아니잖아요? 베드로도 유다만큼 잘못 했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까지 한게 베드롭니다. 잘못한 걸로 따지면 베드로나 유다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큰 차이가 있죠? 베드로는 돌이켜 회개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왔어요. 그래서 그는 치유되고 회복되어 초대교회의 수장으로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는 했어요.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순순히 십자가를 받아들이시자, 다시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서 내가 무죄한 자를 고발했다. 내가 착각했으니 돈을 돌려주겠다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무리들이 차갑게 대꾸하죠. 우리와는 상관없다. 니가 저지른 일이니 니가 감당하라며 내쫓습니다. 그길로 가룟유다는 목을 매 자살합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까?
저는요, 유다를 보면서 사람은 너무 똑똑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다가 재정을 담당했는데 재정담당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요? 똑똑하고, 꼼꼼하고, 철저해야 믿고 돈을 맡길 수 일인데 세리 마태를 제치고, 재정을 담당해요. 어느 정도 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심지어 이 재정에 손을 대요. 야금야금 자기를 위해 공금을 횡령하는데 요한만 그 사실을 알아서 그는 도적이라 기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몰랐을 만큼 똑똑했어요. 그런데 그게 결국 문제였던 겁니다. 똑똑하니 자존심이 세고, 자기가 한 일에 실수를 용납하지 못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자기 뜻대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자 플랜B를 진행하죠.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목격하면서 드디어 자기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를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자기가 무지한 자의 피를 흘리게 됐다며 돈 돌려주고 이 일을 무마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자기가 나름대로 계산하고, 선택했던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자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던 거죠. 바로 그 때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께 돌이키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유다는 끝까지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똑똑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결국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너무 믿는 사람들을 대신한 말이죠. 아직까지 자기를 믿고, 자기 생각에 가득차서 주님이 보이지 않아요. 주님께 나아오지 않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너무 똑똑한채 하지 말자구요. 베드로처럼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냥 울어버리자구요. 그냥 무릎 꿇자구요. 그러면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시며, 마지막 그 순간까지 유다의 품에서 떡을 떼어주신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여전히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면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 아시죠? 어느날 다빈치가 그림을 거의 완성해갈 무렵 유독 가룟 유다의 그림 모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봤지만 도무지 갈피를 못잡고 있는 그 때에 한 술집에서 술에 쩔어 세상 다 산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사람이다 싶은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여차저차하니 모델이 좀 되어줄 수 없겠냐고 물어봤는데 그 사람이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나를 기억할 수 없겠지만,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 2년 전에 제가 당신의 그림 모델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죠. 2년 전 그 때는 예수님의 모델이었는데, 이제는 가룟유다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하니 인생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를 우리가 배신자, 도둑놈,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으로 기억하고 부르지만, 우리는 유다를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고, 경각심을 가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유다처럼 잘못된 선택으로, 잘못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사로 잡혀 예수님을 헐값에 팔아버린 그 유다,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알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유다,
어떻게 보면 유다도 잘 살아 보기 위해 자신이 생각한 가장 최선의 길을 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선택이 아니었죠.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부인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런 유다를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발을 씻기셨고, 그의 품에 안겨 그에게 떡을 떼주셨습니다. 끝까지 가장 소중한 자로, 가장 사랑받을 만한 자로 유다를 대해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을 우선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며, 그의 충만함이 우리를 사로잡아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와 이 사랑을 반드시 받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설교 후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