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앞에 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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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서론
스탈린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스탈린은 레닌의 뒤를 이어 소련의 2대 지도자가 된 자 입니다.
그는 책을 많이 읽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다독이 그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주의와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의 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것은 느낌표와 밑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엑스자와 ‘헛튼 소리’ 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착화 시키는 공부와 독서는
사람을 오히려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준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 기준이 자신의 협소한 생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확고한 기준과 잣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혼돈된 다양성 보다 인생에 유익이 됩니다.
진리 안에 자유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지혜를 얻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많은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해석에 해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캐논을 내 안에 세우는 과정 입니다.
내 안에 내 생각보다 상위의 잣대를 세워
내 생각 조차도 주관 할 수 있는 기준을 받아들이는 시간 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판단하는 시간이 아닌
그 말씀을 내 안에 기준으로 삼는 시간 입니다.
말씀이라는 기준이 없는 사람은 지혜를 사모하나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지혜의 잣대로 삼는 사람만이
진정한 생명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심 이후,
자신의 지식과 성정을 하나님의 잣대에 맞춰 재 정립했고
그의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그 말씀 앞에 겸허히 순복하며
전달자의 역할에 충실하였습니다.
바울은 수 많은 사람 앞에 섰고
때론 법정과 위정자들 앞에 섰습니다.
이 상황들을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수 많은 위정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바울 통해
말씀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 앞에 선 다양한 군상을 보여 줍니다.
당대에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던 유대인들
당대에 가장 지혜롭고 풍성한 삶을 살았다는 헬라인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 떨며 그 말씀 앞에 선 베뢰아인들이 등장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말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오늘날 그 말씀이 나의 삶에 어느 부분을 차지 하고 있고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가 살펴보실때
큰 깨달음과 결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말씀 앞에 선
‘베뢰아인과 유대인들
이름 모를 신들’과 지혜자들
말씀 앞에 선
‘베뢰아인과 유대인들
이름 모를 신들’과 지혜자들
1. 베뢰아인들과 유대인

1. 베뢰아인들과 유대인

종교와 철학 이라는 작은 테두리 안에 광대하신 하나님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훌륭한 철학자도
우주를 논하는 과학자도 하나님을 털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그분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설 뿐 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부심에 차 있던 아덴 사람과 상반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베뢰아인과 유대인 입니다.
사도행전 17:11–12 NKRV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지역의 사람들은
바울의 선교여행 중에 찾아 보기 드물게 신사적이고 고상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남달랐습니다.
바울의 전도 대상에 대해 성경은 두 부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로다
로마서 1:16 NKRV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베뢰아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 이었습니다.
에브게네스 -너그러운
집안이 좋은 고귀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했지만
베뢰아인들 모두를 지칭하여 그렇게 표현 한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근거로 든 것이 이들이 말씀 앞에 서는 자세 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다양한 번역본이 있는데, 그중에 ESV 버전에서는 열정적이라는
Eagerness
말씀이 그러한가 연구하고 조사하고 검토한다는
Examining
Now these Jews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eagerness, examining the Scriptures daily to see if these things were so. (ESV)
앞장 16장에서 디모데를 소개할 때도 디모데의 신실함 뿐 아니라 그 어머니 유니게를 믿는 유대 여인으로 소개 합니다.
디모데후서 1:5 NKRV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신앙세계에서
좋은 집안출신 이라는 것과 고귀한 가문 이라는 것은
디모데와 베뢰아인들과 같은 신앙자세를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대대로 부유하고 높은 직위를 가진 집안이 고귀한 집안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학벌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어도
특히, 말씀 앞에 서는 자세가
간절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신실합니다.
대대로 충성되게 신앙생활 하는 것
말씀을 간절하게 받고 날마다 그 말씀을 상고하고 믿고 따르는
개인과 가문이 고귀한 신앙인, 신앙적 명문가문 입니다.
welcomed, Open-minded
welcomed, Open-minded
그리고 이들은 말씀을 반갑게 (welcomed) 기대하면서 받았습니다. 라이프 성경에는 Open-minded 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말씀 앞에 서는 자세를 설명 합니다.
반면에 같은 유대인이지만 또다른 부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바울을 뛰쫓으면서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13 NKRV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바울을 시기하여 괴롭히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인데 이 얼마나 상반된 모습 입니까?
이 말씀을 받는 자세의 차이는 화연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7:12 NKRV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결국 말씀을 받는 자세는 이래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고 나서의 자세도 날마다 상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곧 말씀이 날마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곧 영적으로 고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뢰아인들의 말씀을 향해 갖는 기대와 간절함이 여러분께 있을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과 여러분의 가문에 역사 하실줄로 믿습니다.
2.’이름 모를 신들’과 지혜자들

2. ‘이름 모를 신들’과 지혜자들

바울과 그 일행은 빌립보에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로 들어 옵니다.
그리고 베뢰아를 지나 아테네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로마제국 시대였지만 실상 문화와 정치 면에서 중심지는
아테네 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마게도니아를 가로질러 로마로 가야 하는 경로가 갑자기 남쪽으로 급선회 하는 궤적은
선교적으로 복음전파적 측면에서 아덴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 세계를 헬라 문화권으로 통합시키시고
로마제국을 강하게 결속 시킨 이유가
바로 복음의 폭발적 전파를 위해서 였다는 것을 볼때,
아덴(아테네)에 주의 복음을 들고 바울이 입성 하는 장면은
사도행전의 클라이막스 중의 한 장면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사를 통해 당시의 그리스의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아덴에 대한 첫인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7:16–17 NKRV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먼저, 우상이 즐비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성전은 아니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회당에서도 격렬한 논쟁과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아덴에서는 이런 모습은 너무나 당연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현대 선진국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법한 자유분방한 모습 입니다.
또한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7:18 (NKRV)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
정말 다양한 생각이 존재 했고
아레나는 끝없이 논쟁하고 토론 하는 열린 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이자 가말리엘 제자가 아닌,
그저 무명의 이교도 전도자 였습니다.
사도행전 17:18 NKRV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사람을 논리와 수사학으로 설득하고 토론하는데 경험이 많은 아덴의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았던 궤변론자들과 논쟁하며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잘 닦인 도로들은 수많은 이방의 나그네들이 비교적 쉽게 아덴에 오갈 수 있게 해주었기에
바울과 같은 특이한 사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말쟁이’ 정도로 치부합니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나 발언권을 줍니다.
그런데, 당시 회당과 아레나 광장에서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들과 바울은 다른데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의 메세지가 남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은 그를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도행전 17:19 NKRV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아테네 [Athens], 아레오바고 [Areopagus]

당시 아레오바고는 ‘신의 언덕’ 이라는 뜻으로 당시 아테네 시내의 아레나 광장과 장엄한 신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했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최고 법정으로
교사들을 심사하고 임명하기도 하고,
나그네와 외국인들의 새로운 사상이나 철학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법정이다 보니, 말을 잘못했다가는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죄목도 ‘이교의 신을 전했다’ 였습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발언의 기회를 주는 것이지만
실상은 목숨 걸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었고
마치 검투사가 싸우러 올라가는 형국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아덴 사람들의 성향을 “종교심이 많도다” 라고 고집어서 말합니다.
사도행전 17:22 NKRV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식의
고상함으로 포장되고 호의로 포장된 아레오바고의 연설을
역으로 고상한 방식으로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의 종교심이 많다 못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있더라 말합니다.
사도행전 17:23 NKRV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런 걸 배운 사람의 재치 라고 해야 하나요?
악의적인 호의를 고상하게 받아치고
맹목적 종교심을 정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덴의 종교심의 문제

아덴의 종교심의 문제

알지 못하는 신, 맹목적 종교심, 미신적 숭배
알지 못하는 신, 맹목적 종교심, 미신적 숭배
Altar to the Unknown God
Altar to the Unknown God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가? 되묻고 그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7:24–25 NKRV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이런 바울의 주장은 종교심이 너무 많고 넘쳐서 수 많은 신을 섬기던 미신과 우상이 판을 치던 아덴을 직격하는 연설 이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번영과 풍요를 약속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존재를 우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능력 없는 존재를 맹목적으로 미신적으로 따르는 것이
너희의 종교심의 본 모습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9 NKRV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우상 섬기듯 금으로 은으로 돌로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에게 절하며 섬길 분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6 NKRV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나님 아래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고 로마인도 없고 야만족도 없다
우리는 모두 한 혈통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7 NKRV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누구나 찾을 수 있다”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누구나 찾을 수 있다”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은 특별한 지혜자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찾고자 하는 자는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계시지 아니 하도다”
플라톤의 이데아론(Theory of Idea)
플라톤의 이데아론(Theory of Idea)
를 설명하는 동굴이론이 가장 유명한데,
동굴에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서 앞만 볼 수 있고
등 뒤에 불빛으로 비취는 그림자로만 형상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허상이고 그림자 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동굴을 탈출한 아주 특출난 현자만이 현실 저 너머의 이데아를 원래 모습대로 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데아의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 라고 등치 하여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상향 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과 아무 접점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천국이 그저 죽어서 가는 곳이라면
우리는 오늘 왜 고생 고생하고 살고 있습니까?
철학을 많이 공부한 현자들만 이데아를 볼 수 있다는 말을
아무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마태복음 3:2 NKRV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사도행전 2:21 NKRV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동떨어진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닌 아주 가까운 곳에 와 있습니다.
지혜로운 철학자나 특출난 영웅들만 이상향에 이른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 받는다고 증거 합니다.
에피쿠르스와 소토아
에피쿠르스와 소토아
이런 바울의 비판은
당대에 대표적인 철학 사상인 에피쿠르스파의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에피쿠르스파를 흔히 알기로 쾌락주의 라고 생각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고통이 없는 상태가 쾌락 이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평안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분리 시키는 사상입니다.
쉽게 말해, ‘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나와 상관 없다.’ 라는 생각 입니다.
너무 종교심이 강해서 모든 일상을 미신적으로 접근한 아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에피쿠르스파는 신을 우리의 일상에서 분리 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토아철학
스토아 철학
또한편으로는 스토아 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르스가 인간의 불안 같은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사후세계나 신을 인간과 관계 없다고 주장 하였다면
스토아철학은 인간의 불행을 다루는 철학 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고대에서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추종자를 갖고 있습니다.
노예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대문호 세익스피어, 오마하의 현자 워렌 버핏
스토아 학파는 3세기 거상이었던 제논 이라는 사람이 큰 풍랑으로 배가 난파 되어 막대한 재산을 잃은 불행에 대해 연구 하다가 만들어진 철학 입니다.
저 미지의 자연과 우주는 로고스 라는 신적 존재에 의해 움직이고
실생활에서 불행은 무작위적으로 찾아오고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 짧은 인생을 내가 해낼 수 있는 것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집중 하자 라는 생각 입니다.
딱 듣기에는 아주 일리가 있고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어느 정도는 우리 중에 스토아적인 입장으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스토아의 신관은 우리와 다릅니다.
신에 대해 정확히는 우주에 대해 지성과 의지를 가진 광대한 준 이성적 존재 라고 인식 합니다.
그리고 스토아철학은 내세에 대해 구원이나 심판 등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현상으로 멸망과 재탄생을 반복할 뿐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안에 던져진 인간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28절에서 이를 반박합니다.
고린도전서 8:6 NKRV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입니다.
자연 속에 존재 하는 정령이나 신령 또는 인격이 없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는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시고 함께 웃고 울며 호흡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그런 인격을 가진 것도 그분의 형상을 본떠 창조하셨기 때문 입니다.
사도행전 17:28 NKRV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리고 우리는 망망한 무의 공간에 그저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호흡하는 순간 마다 야훼의 하나님은 존재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지만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 NKRV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
여기서 말씀 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로고스 입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같은 단어 입니다.
말하다 라는 레게인 이라는 동사에서 온 단어 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광장에 모여 토론 하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지혜자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말함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비난하였던 그 말, 말쟁이에 불과했습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절대적인 존재 로고스가
우주 만물을 주관 하시는 그분이
이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함 (로고스)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 입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서는 가장 진실된 자세는
우리 예수님 처럼,
말씀이, 오늘 내게 하신 그 말씀을 우리 삶 속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결론

현생의 삶을 위해 이름이 없는 신이라도 붇잡는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오늘도 하나님 나라가 나와 가까이에 있습니까 아니면,
저 먼 곳에 있는 손 닿을 수 없는 이데아 같은 세계입니까?
신앙생활의 높은 경지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이
아주 훌륭한 현자들과 신앙심이 깊은 누군가에게나 가능한 경지로 여기며 동떨어진 삶과 신앙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는 예수 보혈에 의지하여 구원 받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 권세와 축복을 누리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살지 않고
내 가진 힘으로
힘겹게 하루 하루를 무작위적인 운명 앞에 작아진 모습으로
순응하며 던져진 존재로 움추리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뢰아인들을 본 받읍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함으로 기대함으로 받았고
그 말씀을 매일 같이 상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에 그 말씀이 성취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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