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칼리지-갈라디아서 7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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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모양, 예수의 흔적(갈 6:11-18)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모양이 있다. 불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양은 불상, 목탁 등이 있고, 이슬람은 꼭대기가 만쥬빵 같이 생긴 사원이고, 기독교는? 어떤 모양이 떠오르는가? 십자가. 장의자. 찬양대 등등.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 모양에 있지는 않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내면에 있다.
외면과 형식에 있지 않다.
우리의 내면 중심에서부터 나오는게 진짜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내면을 강조하지 않고, 외면의 형식을 강조했다.
12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6:12 (NKRV)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거짓 신앙을 가진 자들은 외적인 모양에 마음이 온통 빼앗긴다.
이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만 그런 거짓 신앙에 빠져 살지 않고 꼭 다른 사람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거짓 신앙도 다 못 지킨다.
그러면서 끌어들인 타인에게 거짓 신앙의 율법을 강요한다.
13절을 보자.
갈라디아서 6:13 (NKRV)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율법 지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 것처럼 외적인 인상을 끼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은 내면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는 노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신앙의 껍질만 남아 있고, 본질을 버렸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탄식하시고 아파하신다.
이사야 29:13 (NKRV)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입으로는 “나는 교회 다닙니다”라고 말해도 그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안 계시고,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만을 바라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내면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 핵심이 15절에 기록되었다.
갈라디아서 6:15 (NKRV)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신앙은 외적으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잘 지키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할례를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헌신도가 더 높은가 안 높은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몇시간 더 많이 하는가 안 하는가?
이러한 것은 사실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순서를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주셔서 구원하셨다.
이게 첫번째고, 그 뒤에 내 영혼이 감격하고, 그 다음 순서로 경건생활, 바른 신앙생활이 따라오는 것이다.
교회는 이 순서를 바로 가르쳐야 한다.
조국 교회의 영향력이 약해진 이유가 무엇일까?
내면의 변화는 없는데도 겉으로 신앙생활 잘 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율법과 교훈들을 먼저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된 순서로 교회를 오래 다녀도 내면이 거듭나지 않으면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없다.
우리의 내면의 영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직분을 맡은 자도 내면의 변화가 없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마음이 없다면, 구원 받은 자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내면의 거듭남도 없이 외적인 종교생활만 열심히 하고,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감동 안 하면 이상한 거다. 하나님은 감동 받고 날 구원하셔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사람이 선행을 아무리 많이 하고 덕을 많이 행해서 우릴 구원하셨는가?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조건을 내걸지 않으시고 값없이 구원을 주셨지 않은가?
그러니 성도는 자랑할 게 없다. 우리가 값을 지불한 것도 아니고,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핏값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의지하겠는가?
오직 예수님만 의지할 뿐이다.
그래서 바울이 17절과 같이 말한다.
갈라디아서 6:17 (NKRV)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할례를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봉사를 여러개 하는가 안 하는가?
직분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흔적들은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구원 받은 자가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헌신할 때 따라오는 모습일 뿐이다.
진정한 흔적은 내면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다.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이다.
이 말은 과거에 주인이 노예나 짐승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찍은 도장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고, 그분이 자기 주인임을 보장하는 도장이 찍혀있다고 한다.
사도 바울에겐 정말 예수님의 흔적이 많았다.
궁극적으로는 그의 내면에 예수님의 흔적이 남았다.
그래서 그 흔적이 자기 몸에도 새겨진다.
예수님 때문에 수없이 맞았던 매의 흔적, 광풍에 휩쓸려 산산조각난 배의 조각에 베인 흔적들, 갈라디아 지방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은 흔적들,,,
이처럼 예수의 흔적은 고난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도 예수님의 흔적이 새겨졌고, 그 흔적이 외면상 고난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할례를 자랑하지 않고, 봉사의 경중을 자랑하지 않고, 직분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자랑해야 한다.
그걸 14절에 잘 정리했다.
갈라디아서 6:14 (NKRV)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도의 도리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자랑하는가?
자녀가 잘 된 것?
내 삶이 잘 풀린 것?
이런 것을 자랑하는가?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선물 아닌가?
그런데, 그걸 왜 내가 이룬 것처럼 자랑하는가?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뿐임을 기억하길 축복한다.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를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그에게는 사실 다른 자랑거리가 많았다.
좋은 가문, 좋은 혈통, 탁월한 지식, 출중한 학벌.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했다.
그런데 지난번 강의에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겐 십자가 복음이 걸림돌이 된다고 했다.
죄된 본성에게는 십자가 복음이 걸림돌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심령 가운데 가득찼다.
우리도 십자가를 자랑하는 인생을 살아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을 믿고도 세상을 놓으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만 붙잡는 자다.
이런 자들에겐 예수님의 은혜가 가득 임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갈라디아서 강의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주님은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아브라함이 찢겨 죽어야 했는데, 우리가 못 박혀 죽어야 했는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몸이 찢기시고 죽으셨다.
그러면서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도 무너졌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님 말고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벗어던지자.
그리고 사람의 평판에 목말라했던 예전 모습을 내려놓자.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이웃과 성도를 사랑하며 살아가자.
#갈라디아서와 야고보서 비교
*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말씀 2장 16절을 집중해서 살펴봤다.
갈라디아서 2:16 (NKRV)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한 사람도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진리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 말씀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이 진리가 제대로 정리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자꾸 놓친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가 된 이후에도 행위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오해한다.
그래서 야고보서 본문을 가지고 한 번 더 갈라디아서 전체를 정리해보자.
행함이 없는 믿음
야고보서 2:14 (NKRV)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한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믿음대로 행하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냐고 질문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삶에 구체적인 증거가 나타난다.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강의를 듣고 있는 성도님들도 경험했을 것이다. 나도 경험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당연히 삶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세상 방식대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지기 때문에 삶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믿는 결과가 행위로 구체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그런데 믿는다고 해 놓고 행함이 없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 말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구원할 수도 없다고 한다.
아직까지 헷갈린다. 6주동안 뭔가 행위를 쌓는다고 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다고 하니까,
행하라는 말이야? 행하지 말란 말이야? 헷갈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야고보서 2:15–17 (NKRV)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한 지체가 헐벗고 굶주려 있는데, 말로만 평안하길 바랍니다.
양식이 채워지길 바랍니다. 이러면 무슨 유익이 있냐는 말이다.
이 사람 내면에 그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까?
빨리 그 사람을 지나치고 싶은 마음 뿐일 것이다. 빨리 내 눈 앞에서, 내 생각에서 사라져서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싶은 생각 뿐이다.
행함이 없다. 사랑에 근거한 행함이 없다.
그럼 그 자는 입술로는 예수님 믿습니다. 해도 그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면 구체적인 변화와 행동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2.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것인가?
야고보의 주장에 어떤 사람이 반론을 제기한다.
야고보서 2:18 (NKRV)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무슨 말장난 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다.
너는 믿음이 좋다고 평판이 나 있으니까, 행함이 없어도 인정해주겠다. 그리고 나는 행함, 곧 실천과 봉사를 잘 드러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묻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기도도 많이 하고, 늘 신령한 상태에 빠져있는 것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봉사를 아예 하지 않는데도 뭔가 믿음이 좋아 보인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는 좀 모자란 것 같은데, 봉사는 열심히 한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행함이 있는 거 아니냐?
둘 다 잘못된 게 아니지 않느냐? 자기 취향에 맞게 신앙생활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의하는가?
아니다. 큰일 난다.
야고보가 반론한다. 18절 하반절이다.
야고보서 2:18 (NKRV)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한 번 보여 줘봐라.. 네 속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건데? 다른 사람들이 네가 믿음 있는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는데?’ 라고 붇는다.
그리고 야고보는 자신은 믿음을 이렇게 보이겠다고 한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게 성경이고 기독교다.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신대원 조직신학 교수님은 증기기관차에 비유하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죄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예수님의 값없는 은혜.
그런데 그 은혜는 반드시 우리 삶에 녹아든다. 적용된다.
믿음의 증거가 우리의 삶의 행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이 붙은 증기기관차는 가만히 있지 못 한다. 움직인다.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 속에 있는 믿음으로 바깥으로 드러내 보이는 중요한 도구는 우리 말로 하는 고백이 아니다.
고백,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고백 만으로 우리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믿음을 검증할 수 있는 틀은 우리 삶 속에 드러나는 행함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7:20 (NKRV)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리가 포도열매를 포도열매로 알 수 있는 것은? 포도 열매가 눈에 보여야 알 수 있다.
믿음 있는 자인 걸 알 수 있는 건? 행함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이 성도의 열매다.
그런데 유사품이 한번씩 나온다.
마태복음 7:22–23 (NKRV)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뭔가 권능을 행했다고, 자기가 믿음 있는 자라고 주장한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자기 믿음이 엄청 뛰어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방 종교에도 이런 종교적 체험들이 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떠나가라고 하신다.
영적 체험은 믿음의 증거가 아니다. 24절을 보자.
마태복음 7:24 (NKRV)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다.
자기 자신의 공로, 영적 체험,,,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그분을 믿기 전과 다른 형태로, 믿음에 합당한 삶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3.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분명 갈라디아서에서 계속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데,,
우리가 ‘행위’라는 단어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우리는 ‘행위'를 윤리적인 삶, 특별한 인물들처럼 영웅적으로 하는 행동들을 떠올린다.
완전하고 실수가 없는 행실을 떠올린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는 이런 게 아니다.
야고보서 2:21 (NKRV)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런 행위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횃불 언약, 할례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삭을 얻고, 이삭을 통해 많은 후손들과 결국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걸 믿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다.
분명 그는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삭을 바치려고 한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부활시키실 것을 또한 믿었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로마서 4:19–22 (NKRV)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이 위대한 인물이어서 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부족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못하는가? 아니다.
야고보서 2:25 (NKRV)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과 대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생 라합도 믿음대로 행할 수 있다. 기생이었다. 아브라함과 반대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동을 한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사람도 적은 믿음만으로도 진실된 행위를 할 수 있다.
야고보서 2:21–23 (NKRV)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말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순서가 잘못된 말이다.
믿음과 행함이 같이 일하는 것이다. 증기기관차처럼.
그것을 보고 ‘온전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로마가톨릭 학자들은 22절 말씀을 두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믿음’만으로 불충분하다. 그러니까 행위가 더해지는 것이다. 라고,,,
이런 논리를 펼치면 그 누구도 구원 못 받는다.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그런 말이 아니다.
23절을 다시 보자.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는 게 언제 증명되는가?
이삭이 소년이 되고 그를 바칠 때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한 행동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는다.
온전한 믿음은 행위를 가져오는 믿음이다.
행위가 없고 믿음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생각해볼 질문
나는 지금껏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면서 행함 없이 믿는다고 고백만 하지는 않았나요?
나는 지금껏 특별한 신앙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성도는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릅니다. 하지만 ‘믿음’은 ‘행위’로 발현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진정성은 예수님을 믿는 고백이 만들어 내는 ‘행위’에 있습니다. ‘믿음’에서 수반되는 온전한 ‘행위’가 내 안에서 흘러나올 수 있기를 간구하며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