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음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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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
먼저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은데요 예수님의 기도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몇 분들은 ‘주도기문’이라고 불리는 기도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이 떠 오르지 않는다면 마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고는 있지만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어디즘에서 관망하고 있을 수 있다 생각됩니다. 조금 더 가까이 오셔도 괜찮습니다.
주기도문이라는 용어는 사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기도했다고 보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곧곧에서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시기 위해 한 적한 곳을 찾으실 뿐만 아니라 어떤 기도를 하셨는지는 불분명해도 늘 기도하시는 분으로 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아버지 이 잔을 옮겨 주옵소서’라고 간구하신 후 잘 알다시피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마무리하고 이는 예수님의 순종 또는 예수님도 기도하신 분이니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면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구한다’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주님은 기도하셨고 그럴 때 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도 하셨고, 응답이 아버지의 뜻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이 아버지의 뜻임을 확인하는 것도 기도였습니다. 시편에 유명한 기도에 대해 ‘기도는 우리의 호흡’이라는 의미는 이렇듯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내는 신앙의 과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예수님은 직접 보여 주신 것이죠.
그렇다면 1장에서 요한은 이미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는데 ‘왜 그분에게 기도가 필요했는가?’ 또는 기도할 필요가 없는 분이라는 차원에서도 생각이 가능합니다. 병자를 고치실 뿐만 아니라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죠. 이를 통해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려는 목적에 맞다면 13장부터 시작되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17장의 기도는 무엇을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려는’ 목적 하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17장은 예수 자신을 위해서 5절까지 제자들을 위해서 19절까지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과 신자의 온전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내용이 마지막에 들어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떠하신 분이시길 원하는가?로 좀 바꿔서 질문을 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답은 능력이 있는 예수님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이라고 누군가 정의를 한다면 아마도 ‘네 동의합니다. 그러나 ...’ 하면서 당연한 기도를 원하는 순서에서는 좀 뒤에다 두려고 할 것입니다.
읽은 본문 2절에도 ‘아버지게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라고 예수님은 직접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는데 다시 아버지와 어떤 결정을 상의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4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즉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은 행하셨고 이를 통해 계속해서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기도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지금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일을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도 아니라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행위를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일을 조목조목 아뢰고 있다.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는 의미를 기도라는 행위에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유사한 행위는 어쩌면 가장 높은 결정권자에게 지금까지 된 모든 일을 소상하게 보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차용 가능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특히 시작에서 1절 ‘때가 이르렀다’라는 표현은 혹시 여러분이 기억하실 지 모르겠으나 아주 오래전 2장에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로 부터 잔치에 포도주가 없다는 사실을 듣고 ‘여자여… 내 때가 아직은 아니다’라고 했던 말씀을 혹시라도 기억한다면 지금은 ‘그 때가 되었다’는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전히 능력을 행하시면서 왜 ‘기도’가 필요한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보면 자녀가 잘 하고 있을 것을 부모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듣고 싶죠. 그럴때 자녀는 ‘어련이 알아서 잘 할까봐’, ‘다 알면서 굳이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알아서 잘 할 텐데 뭐 그리 알고 싶어하냐고 좀 믿고 기다리면 안돼’ 이렇게 다른 입장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짧은 시간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 행위가 진행 중이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 시간에 오히려 긴 시간을 할애해 하나님께 최종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에게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 깊은 어딘가에 저장되고 또 언제든 꺼내고 기억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면 또 하나의 방식은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에게, 나를 통한 주변에서 그리고 나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세상에 대한 ‘나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의 노예 생활을 모세를 통해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통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기도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후에 여호와 하나님과 소통을 하는 성막이라는 곳 안에 성소가 다시 지성소로 나뉘는데 성소 안에 위치한 분향단에서 향을 태우고 태울 때 소금을 함께 태웁니다. 이러한 향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표현으로 향기를 흠향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언약의 징표를 향과 함께 태우는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를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전부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미주알 고주알 뭐 그렇게 다 알고 싶어하냐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부모가 그런 모든 걸 다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야기 하는 동안 자녀를 살피고 어떤 일로 인해 힘들어하고 또 행복해하고 있는지를 ‘흠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앞에 아뢰는 ‘기도’를 통해 ‘너희를 위하여’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랑을 구현해 내시는 아버지의 아버지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죠. ‘때가 이르렀다’ 이는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구원 계획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만큼이나 영화로운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다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길은 말 그대로 참혹한 길입니다. 인간 예수가 겪기에 고통 그 자체입니다. 대체적으로 십자가에 3일은 매달려 있고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가장 처첨한 사형 방식입니다. 모진 채찍으로 인한 예수의 몸은 3일을 견딜 수 없었고 상당히 빠른 시간에 죽음을 맞이 하게 됩니다. 그런 길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셔 걷게 하신 길을 앞두고 예수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에 대한 아버지의 순종은 ‘앎’에서 나옵니다. 대부분 기독교가 예수님도 순종했으니 우리도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갈 수 있습니까? 물론 나라를 구하고, 동료를 구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말하는 바는 아닙니다. 불과 몇 주전 예수의 죽으심은 친구를 위해 죽는 것이고 이것이 얼마나 선한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ㄱ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근거는 ‘아는 것’입니다. 순종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을 ‘맹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 결과 오늘 한국 교회는 천만명을 넘어 천1.2백만을 바라보던 교세가 600만명에 불과하다는 조사는 오히려 늘고 있는 이단 종교에 비하면 급속하게 쪼그라드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4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앞서 긴 시간동안 예수께서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일을 해 오셨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로 잘 알고 있습니까? 서두에서처럼 분명 활활 타오르는 캠프 파이어를 보는 것은 분명한데 거리가 너무 있어 불길의 뜨거움이 아니라 따스함조차도 느끼지 못한다면 본다는 것은 결코 경험을 통해 각자에게 쌓이는 기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나간 삶은 인간 예수로 복음이 타오르는 불길을 느끼며 경험하며 지금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제자를 불러 세웠고 유대인들과 계속해서 싸우며 마치 포도주가 빠진 잔치라는 모순처럼 우리의 삶에는 진정한 기쁨이 없는 거짓 행복에 춤추고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육신의 고통과 자녀의 아픔을 통감하셨고 배고픈 무리에게 진정한 만끽을 알게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아 이제는 자신의 제자까지도 배신하는 경험이야 말로 예수 스스로가 갖는 고독함, 철저한 절망의 경험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들어 주세요. 이렇게 해 주세요라는 나의 필요를 채우는 기도라면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하신 일이 드러났음을 알고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처럼 기도한다는 의미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각자의 서로 다른 인생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깨닫고 아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는 ‘영화로움’을 받습니다. 비록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도 그조 소소하게 여러분 주위의 친구들과 부모 그리고 몇몇의 사람들에게 행한 일들로도 충분한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같은 줄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이미 우리의 시간을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짧은 우리의 인생으로 우리의 길을 깨닫지 못해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노래 가사나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하는 가사도 우리의 깨달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그러면서도 그런 노래 가사에 눈물을 흘린다면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말을 통해 설득하고 이해하는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지난 주 살폈던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독특한 사역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로 깨달아 알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창세전에 함께 계셔 지금 ‘이 때’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때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첫 번째 구조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기도가 필요하신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를 받으신다라고 구약의 분향단을 통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간구하는 것이라는 보편적인 기도에 대한 내용도 분명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일종의 보고와 유사한 점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지난 주 이 말씀을 듣고 이러 저라하게 살았는데 이러 저러한 일들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그럼에도 자녀로써 하나님의 권세를 누리며 살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멀리서 캠프 파이어의 불을 보고 ‘저게 캠프 파이어’야 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예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시는 기도가 우리의 본이라는 의미보다 예수님 조차도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어떻게 하나 되어 있는지를 그리로 다음주 제자들과 신자들 역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과 지식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살아 온 삶 그리고 이어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나타납니다. 저와 여러분이 자꾸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만 집중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오랜 시간 신학을 했던 시간은 신학에 대한 깊이를 갖게는 했지만 이제 목회라는 현장의 경험을 통해 단단해지거나 어쩌면 부러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동안 배운 신학의 토대는 그럼에도 그 길을 가려는데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의 시간이 여러분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며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부모된 입장에서는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하겠지만 한없이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통해서 가슴 깊은 조언을 주실 것이고 그때마다 힘을 내어 보이지 않는 길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을 것입니다. 또한 기꺼이 동료가 되어주고 선배가 되어 여러분의 길에 동행할 것입니다. 물론 부모는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지지하고 응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은 다시 여러분의 영광이 되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모두가 경험하실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