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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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5:35-43
제목: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카터 콜론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있다. 카터 콜론은 15살 때부터 공황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두려움은 아무 예고 없이 늘 따라 다녔다.
수업을 받다가 쓰러진 건 고 3때 였고 유급되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렸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고. 일평생을 두려움에 휘둘리며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 싶어 괴로움을 당했다.
한 때는 급성 뇌졸중이 오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생명에 매우 큰 위협을 받을 때도 있었다.
1975년 대학에 졸업을 하여 시경찰국 직원이 되었고, 매일 동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밤에는 약 3킬로미터를 달렸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결국 이 목사님을 구원한 것은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고 복음이었다.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혼과 우리 생명과 우리 인생을 구원한다.
911테러 사건 이후에 있었던 첫 설교, 생명을 위해 달리십시오. 라는 설교는 언제나 들어도 참 은혜가 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본문인데, 달리다굼, 소녀여 일어나라. 하며 예수님이 죽은 한 소녀의 생명을 다시 주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사건은 예수님과 소녀의 관계를 조명하기보다 예수님과 그 소녀의 아버지인 회당장 야이로와의 관계에 더 집중해야 한다. 죽어가고 있는 사랑하는 딸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 줄 마음이 있으나 아무 소용 없이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안타까움, 예수라는 신기하고 놀라운 어떤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 청년을 찾아가서 간구했던 그 아버지의 마음, 그 안타깝고 급박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이 보이시는 왠지 모르게 느긋해 보이는 행동들. 답답하고 타들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된다.
1. 간절함은 믿음의 좋은 재료가 된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많은 질병이 공항 장애 같은 정신적인 질병이다. 현대인들은 이전보다 육체적으로는 더 우람해지고 더 건강해진 것 같은데, 정신적으로는 더 연약해진 것 같다. 그 정신적인 질병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가 두려움일 것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잘 먹고 더 잘 살면 평안해지고 두려움은 없어져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더 많이 가지면 가질 수록 두려움은 더 커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아이러니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하고 살기 좋아져도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그 옛날에 사랑하는 딸이 화상 때문에 진물이 뚝뚝 흐르고 있는 그 몸을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가도 병원에서 치료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떤 기도원에 찾아가 기도 받고 기적적으로 낫게 되고 그 사건으로 그 온 가정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 그 딸의 죽음과 같은 고통, 화상은 그 당시에는 저주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보니 그 가정의 축복이었다. 화상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 있고 펴지지 않는 팔은 저주스런 상처가 아니라 영광의 상처인 셈이다.
딸의 죽음 앞에 아빠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다. 자존심을 챙길 정신이 없다. 내가 무슨 옷을 잆었는지,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챙길 겨를이 없다. 단지 살려야 한다라는 급박함과 간절함만 있다. 그런데 그 급박함과 간절함이 저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저주스러움이 변하여 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육신적인 질병이 있고, 정신적인 질병이 있고 한 것이 단지 저주만이 아니다. 그런 연약함, 모자름 때문에 간절함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 기도하게 되는 것, 이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복이다.
그러므로 간절함은 믿음의 좋은 재료가 된다. 가난한 것, 어디가 모자란 것, 아픈 것,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 이것이 저주만은 아니다. 고통과 어려움만은 아니다. 이것이 재료가 되어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바랄 수 있다면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다. 간절함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라는 더 큰 것을 위해 간절함을 가진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먼저 자기 인생을 향한 간절함부터 가지라. 원래 어릴 때는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거기서부터 서서히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간절함까지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야이로의 딸의 죽을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재료가 되었듯이 우리 인생의 고통, 고난, 질병, 사고들, 혹은 좋은 일들,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믿음의 재료가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그 고통의 상처가 알고보니 영광의 상처였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인생의 모든 일을 해석해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2. 하늘 문을 가르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성경의 어떤 사건을 볼 때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정도로만 살펴서는 안 되고, 항상 예수님이 그 당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 예수님이 그 당시 사람들을 대하신 방식은 오늘날 나를 대하시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항상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는 방식, 나를 이끌어가시는 방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를 대하는 방식, 그 딸 아이를 대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느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게의치 않으시고 밤에 제자들을 제촉하셔서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가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라사 광인,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치시고 또 다시 배를 타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신다. 거라사 광인 치유 사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건인데, 이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을 가장 원초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 귀신에 들려 자기 몸을 해하고 살아가고 결박되어 살아가는 모습, 그러나 그 한 영혼을 위해, 보잘 것 없고, 아무 쓸모 없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그 한 영혼을 위해 폭풍을 뚫고 밤새 건너오신 예수님, 그 거라사 광인을 고치시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홀연히 원래 자리로 가신 예수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가장 원초적으로,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갑자기 배를 타고 건너가신 것 같지만 사실 거라사 광인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고 또 곧바로 다시 건너오신 것도 다 목적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마치 아버지 야이로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만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야이로와 그의 딸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고, 또 혈루병 여인도 마찬가지다. 혈루병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오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찾아가서 만나주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기도하는 것,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란 것,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먼저 우리 마음에 간절함과 소원을 주시고 그리고 기도하게 하시고, 찾고 부르짖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만나주신 것이다.
노사연씨의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겉으로는 우리의 간절한 바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놀랍고 신기한 계획이다.
이것을 우리 신앙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나의 간절한 기도가 예수님을 만나게 했고,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 라는 식의 신앙을 기초로 하면 잠시 잠깐은 약간의 성장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반드시 암초에 걸려 좌초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다 이루셨다. 라는 신앙을 기초로 신앙생활을 하면 왠지 지루하고 나는 할 일이 없는 것 같고, 열심, 열정도 낼 필요도 못 느끼겠고, 신앙의 성장도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기초만이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더욱 더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기초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풍을 가르시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거라사 광인을 만나주신 예수님, 무리를 가르시고 불쌍한 혈루병 여인을 만나주신 예수님, 지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예수님. 그 사랑의 예수님이 오늘날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만나주신다. 그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모든 사람들 마음 가운데 잘 박힌 못과 같이 역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이 아버지 야이로에게 왜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을까? 아버지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 아버지의 입장에 되어 보면 이해가 쉽게 된다. 함께 집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이 갑자기 멈추어 서신다. 그리고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라고 말하며 굳이 자기 옷을 만진 사람을 찾아내려고 한다.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이 밀치고 하니 그럴 수도 있지요. 하며 별 것 아닌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이 나갔다. 하며 굳이 자기 옷을 만진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왜?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에 매여 고통 가운데 자유함이 없던 그 한 불쌍한 여인을 위해. 그 여인의 참된 믿음과 구원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가장 마음이 급한 사람은 아버지 야이로다. 옷을 누가 만졌든 아니든 그냥 가시지 왜 이렇게 지체하는가? 속이 타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그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한, 자기 자신의 인생이 이젠 끝난 것 같은 심정이 아닐까?
그런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 장면은 역설, 아이러니 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가장 슬프고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인데,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아무 슬픈 감정 없는 것처럼, 남 일 처럼 태연하게 우리에게 “괜찮아.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믿기만 해.”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우리 인생에 대하여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또 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겠습니다. 라며 슬퍼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믿기만 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그러하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가장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였다. 평강할만한 상황, 환경이 되어야 평강할텐데, 왜 예수님은 상황과 환경이 바뀌지 않았는데 아무런 근거 없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실까? 우리 인생을 향하여서도 이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다.
현대인의 가장 크고 많은 질병이 공항장애 같은 정신적인 질병이다. 왜 그럴까? 라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 현대적이고 더 과학적이고 더 논리적이고 더 계산적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우리 인간이 일하는 방식은 노력과 결과의 방식이다. 인과 관계라고 한다. 계산하고 노력하고, 계산하고 노력한만큼 결과를 얻어내고. 하는 인과 관계의 방식. 내 계산 안에 들어와야, 내 판단과 내 통치 안에 들어와야 안심이 되고 또 어떤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두렵지 않다. 더 논리적이고, 더 계산적이고, 더 합리적이고, 더 과학적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우리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큰 두려움에 쌓이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된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이, 더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 인간의 방식과 다르다. 물론 원인과 결과 라는 방식도 사용하시지만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원하시는 방식은 믿음의 방식이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 일반 방식들이야. 그러니 너도 열심히 일해야 해. 그러나, (여기에서 그러나가 중요하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를 믿는 것이야. 나를 신뢰하는 것이 너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너희 인생에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나를 신뢰하는 것은 너희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방식이다.
믿음의 방식이란 오직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만, 사랑으로 하나된 사이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방식이다. 마치 독수리 날개 아래 있는 새끼가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 그분의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혹시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 때문에, 혹은 어떤 사건들, 환경들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있는가? 우리의 노력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라.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이, 그 신기한 믿음이 우리를 사랑 안에서 든든히 세울 것이다. 믿기만 하라. 믿음 안에서 자라가라. 믿음만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신뢰하라.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이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심령에 든든한 믿음으로 세워나가시기를, 우리 가운데 놀랍고 신기한 믿음의 선물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아버지 야이로가 예수님을 간절히 찾아 만난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야이로를 만나주신 것이다. 폭풍을 가르시고 거라사 광인을 만나 주신 예수님이 동일하게 야이로도 만나주시고 혈루병 여인도 만나주신 것이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를 만나주신다.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가장 연약하고 초라한 아기로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해주셨다. 그 은혜 때문에 나에게 새 생명이 오게 된 것이다. 그 하나님이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믿음 안에서 성장해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더 강력하며 얼마나 더 확실하고 굳센지, 그것이 어떻게 내 인생의 두려움을 내어쫓는지를 믿음으로 경험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믿음 안에서 굳센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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