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2 수요예배 (용서와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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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세기 31:43-55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야곱의 재산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하니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라반도 야곱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야곱이 라반을 떠나 고향으로 갈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가 몇일동안 집안을 비운 사이에 야곱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포함해 모든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듯 떠난다.
라반이 뒤늦게 야곱이 떠난 것을 알고 야곱을 잡기 위해 추격을 합니다.
라반의 입장에서 야곱의 행동이 얼마나 괘심했으면 3일이나 앞서 출발했던 야곱을 쉬지 않고 달려 7일만에 잡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라반이 야곱을 만나게 되었고 만나자 마자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창세기 31:26-28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라반이 하는 말은 떠나면 떠난다고 이야기를 하고 가지 왜, 자신을 속이고 몰래 떠나 딸들과 손자들에게 작별 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라반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야곱의 행동은 라반이 충분히 화를 낼 상황이다.
라반이 이렇게 반응 할 수 있는 이유는 처음 야곱이 라반의 집에 왔을 때 야곱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엇하나 의지 할 곳이 없었던 도망자 신세였기 때문이다. 그런 야곱에게 먹을 것도 주고 잘 곳도 준 사람이 바로 라반이었다.
이렇게 볼 때 라반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야곱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라반은 지금 야곱이 있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 라반 자신 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에게 라반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본문 43절입니다.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라반이 생각하길 지금 야곱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라반의 것이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자신의 소유를 야곱이 빼앗아 갔다 라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라반 입장에서는 자신의 소유였던 가축이 야곱의 소유로 넘어갔고, 자신의 가족이었던 두 딸이 야곱의 가족이 되었고, 나아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드라빔도 야곱이 도둑질해서 빼앗아 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라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전반적인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라반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라반의 입장만 생각한다면 지금 야곱의 행동에 화가 나는 라반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라반이 볼 때 야곱의 이러한 행동은 배은망덕 이다. 그래서 라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상태 이다.
라반이 야곱에게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2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해 할만한 능력이 내게 있으나” 이 말은 지금 야곱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따라온 목적은 단순히 따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죽이기 위해 따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라반 입장에서 원래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딸들과 손주들, 그리고 모든 짐승들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었다. 라반이 야곱을 추격하면서 드는 생각에 화해는 없었다. 오로지 배은망덕한 야곱을 죽이는 것만을 생각하며 3일 먼저 출발한 야곱을 쉬지 않고 따라온 것이다.
그러면 야곱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 라반은 생명의 은인이다. 그런데 라반은 애초에 야곱을 가족으로 인정하기 보다 어떻게 하면 야곱을 통해서 자신이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하며 야곱을 이용하였습니다.
아내를 맏이 할 때도, 라반은 야곱을 속였다. 그래서 14년동안 야곱은 라반의 종과 같이 일을 하였다. 그뿐 아니라 10번이나 라반이 유익한대로 품삯을 바꾸면서 야곱을 속여 왔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서운함을 토로 한다.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그리고 이것은 야곱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야곱의 아내들도 라반이 야곱에게 한 모든 것들이 잘 못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아버지인 라반을 떠나 사는 것에 기꺼이 동의 하였고, 심지어 라헬은 아버지가 신으로 여기는 ‘드라빔’을 훔쳐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기에 야곱은 라반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성도님들 용서와 화해는 다른 것이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다. 나만 마음을 먹으면 된다. 하지만 화해는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도 용서해야 서로 화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TV프로그램에 아이 콘택트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말그대로 눈마춤 이라는 컨셉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인데, 주로 좋았던 관계가 어떤 상황으로 인해 단절이 되었던 두 사람을 스튜디오에서 만나게해 서로 눈을 맞추면 대화하는 시간을 주어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한 사람이 신청을 하고 만나서 자신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이야기 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보는 프로그램이기에 모든 사람이 화해를 하며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화해를 하지 않고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에 앞에서도 이야기 한 것처럼 용서와 화해는 다른 것이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다. 용서하기가 쉽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용서는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한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화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성도인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화평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2:18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끊어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야곱과 라반의 끊어진 관계 가운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라반이 야곱을 따라온 이유는 단 하나다. 야곱을 죽이고 야곱이 소유한 모든 것을 라반이 소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라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그리고 이것을 라반이 그대로 야곱에게 전달한다.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그래서 라반은 야곱을 해하지 않는다. 그의 자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처럼 라반은 야곱과 서로 침밤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맺고 두 사람 사이의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을 기원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으로 인해 라반은 더이상 야곱에 대해 적대적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심지어 야곱이 언약을 어길지라도 그것을 라반 자신이 심판하지 않고 그것마져 하나님께 맡긴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 44, 50절 이다.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으로 야곱을 향한 라반의 마음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분쟁이 일어나 관계가 깨어질때 성도인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야말로 사람과 달리 전지하시고 또한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정확히 보시고 판단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이 개입하시고 모든 상황을 해결해 주실 것을 기도로 간구해야 한다.
또한 오늘 본문의 야곱의 태도를 성도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야곱의 입장에서 지금 라반의 행동과 말들은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동안 야곱이 라반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라반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 31:36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여기서 노하여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불같이 진노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고 ‘책망하다’의 원어의 뜻은 ‘다투다, 꾸짖다, 싸우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야곱은 매우 분노하여 라반을 말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동안의 서운했던 모든 마음들을 라반에게 울분을 토하듯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라반의 평화 언약을 맺자는 말에 흔쾌이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 본문 54절을 보면 야곱이 언약에 대한 기념으로 제사를 지내고 라반의 형제들을 초대해 잔치까지 벌인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떻게 그의 분노를 잠재우고 라반과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어떻게 라반을 용서 할 수 있었을까?
먼저는 야곱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반을 흔쾌이 용서 할 수 있엇습니다. 이 말은 야곱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명확히 알았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라반을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야곱의 욕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고 있는것이다. 다시말해 야곱은 지금 자신이 가야 할 곳이 명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명확해 진 것입니다.
물론 야곱에게 있어서 20년가 라반이 야곱에게 한 행동과 거짓말들로 인한 상처가 별 것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명확한 목표가 생겼기에 상처로 인해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지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교회 안에서 사역을 할 때 어떻게 늘 좋은 일들만 있을 수있겠는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나를 응원하고 내가 하는 사역을 도와 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때로 어떤 사람을 통해서 기운이 빠지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해서 주저 앉아 포기 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상처로 인해 그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가기위해 기도하며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경기중에 한번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났다고 그 자리에 앉아 상처를 부여잡고 울고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까? 혹시 달리다 넘어지면 바로 다시 일어나 골인 지점을 향해 바로 달려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상처받았다고 그 상처를 부여잡고 내게 어려움을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마라톤 선수가 넘어졌다고 그 상처를 부여잡고 앉아있으며 경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경기에 집중을 하면 혹여나 상처가 났다 할지라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목표점에 내 모든 것을 집중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나서 모든 긴장이 풀릴 때 아픔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건 어떤 경기를 하는 사람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넘어져 본 경험이 있으신가? 저는 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크게 넘어져도 그 당시에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피하기 때문이다. 어떻게해서든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해 아픔을 느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목적이 분명하면 때때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표점이 분명하면 다시말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분명히 보인다면 때때로 여러가지 모양으로 오는 상처에 아픔을 느끼지 않을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해야 할 것은 내게 상처준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말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인다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우리가 점을 보면 안되는 이유도 그것에 우리가 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예전에 스포츠 신문 한쪽에 그날의 운세를 띠별로 나온 것이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흥미를 가지고 읽었는데 주로 내용이 남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나고, 북쪽으로 가면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될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이 주였다.
그런데 희안한것은 읽을 때는 그저 재미로 읽는다. 그런데 혹여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아 맞다! 북쪽으로 가면 안됐는데… 내가 남쪽으로 가서 오늘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구나.. 이렇게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런것이 매이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에 매일 수 있다.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그것에 매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에 매이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을 하면 그 순간 또 다시 생각이나 하루종일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럴때 생각하지 말아야지..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더 의미있는 말, 중요한 말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가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게 상처가 되었던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별 것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야곱은 그것이 분명하였기에 20여년간 자신을 속이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죽이겠다며 따라온 라반과 화해 할 수 있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혹여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고통가운데 계신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주신 말씀처럼 듣고 행하여서 우리의 삶속에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오늘도 주신 말씀을 붙잡고 숭종하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특별히 저희의 삶속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여러 이유로 깨어진 관계 가운데 있는 성도가 있다면 오늘 말씀을 기억하여 순종함으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기쁨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이 가신 그길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