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버지의 코이노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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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Transcript

#서론
여러분이 일주일동안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는 곳은 어디이십니까?
집을 제외하구요.
회사, 학교. 이런 곳이겠죠?
.
.
저는 일주일동안 집을 제외하고, 어디에서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낼까요?
교회겠죠?
저는 교회로 출근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교회로 출근하는 게 참 좋습니다.
제 평생에 제일 좋아했던 곳, 또한 교회입니다.
저는 학창시절 때부터 교회에 있는 게 너무 좋았어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 형. 누나들이랑 노는 게 너무 좋아서,
교회가 좋았구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로는, 교회 형. 누나들, 친구 동생들이랑 예수님을 함께 나누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좋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저의 어떠함과는 관계 없이 있는 그대로 저를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참 유치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 형 누나들 친구들 동생들이랑 어른이 돼서
커다란 집을 같이 짓고 같이 살면 좋겠다.’
‘이 교회가 내 평생의 터전이 됐음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만큼 학창시절 저의 교회생활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물론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지상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끔
그 곳에서 많은 은혜들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목사야 돼야 하는데 교회를 사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는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교회에 출근할 수 있으니까요.
#본론
사랑하는 여러분.
비단 목사뿐만이 아닙니다.
성도가 가장 사랑해야 할 곳도 교회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복은,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교회에서 사랑 받고, 교회를 사랑하는 복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교회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가장 사랑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터전을 세우실 정도였습니다.
시편 87:1–2 (NKRV)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여기서 성산은 시온성이 있는 시온산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있는 해발 800m에 이르는 높은 산입니다.
서울에 있는 북한산과 비슷한 높이인데요.
하나님은 이 높은 산에 시온성을 건축하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솔로몬을 통해 지으셨죠?
하나님은 이 시온 성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성의 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야곱과 시온이라는 단어를 잘 살펴봐야 하는데요?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죠?
하나님이 그 야곱에게 어떤 이름을 주셨습니까?
이스라엘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거처를 다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시온성을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도대체 시온성에 어떤 사랑할 만한 점이 있었길래 그러시는거죠?
시온성은 성경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비유됩니다.
야곱이라는 단어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대변할 때 쓰이기도 하구요.
천국을 비유할 때 쓰이기도 하구요.
교회를 비유할 때 쓰이기도 했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시온을 교회로 비유하며 설교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시온성이 교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거하는 모든 곳을 다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성도가 모이는 교회를 가장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교회를 하나님의 신부라고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이사야 62:5 (NKRV)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5:25 (NKRV)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도 바울이 남편들에게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 설명하면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언급합니다.
여러분.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아마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에 결혼을 하신 분들은,
저의 질문에 다 똑같이 답하실 겁니다.
여러분과 배우자가 깊은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구명 조끼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 구명조끼를 누가 입으실 겁니까?
목영의 성도님들은 열이면 열,
그 구명조끼를 배우자에게 주겠다 하실 겁니다. 그렇죠?
여러분의 배우자는 뭐라고 대답하실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배우자를 위해 죽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죠?
의심하지 마십쇼. 자기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쇼.
아내와 남편을 의심하지 마십쇼.
분명 그러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을 어느 한 장면에 담아보라고 하면,
저는 이 두가지 모습을 꼽을 겁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잭이 로즈를 부서진 문틀에 태우고, 자신은 바다에 잠겨 죽는 모습.
또 하나는,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
이 두가지 모습을 사랑이라 말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잭의 희생으로 살아난 로즈를 영광스럽다 칭송할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받은 여인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온 세상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를 가장 영광스럽다 찬송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랑보다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87:3 (NKRV)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에게 빛이 납니다.
사랑은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
.
예수님의 사랑은 교회를 빛나게 합니다. 반짝반짝 아름다운 왕관처럼 말이죠.
시편 기자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은 교회를 향해 반짝반짝 빛난다고, 너무 영광스럽다고 찬송합니다.
3절의 뒤에 셀라가 나오죠?
셀라는 시를 읽다가 쉬어가는 구간을 말하는데요.
시편 기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 영광스러운 교회 문턱 앞에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 문턱을 누가 넘어올 수 있을까요?
누가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헌금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학벌이 좋은 사람일까요?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일까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일까요?
건강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과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말하는 시온의 문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교회 문턱 앞에서 우리가 들어갈까 말까 주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문을 활짝 열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자격같은 건 요구하지 않을거야.
나는 니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 널 위해 죽었단다.
그러니 나에겐 니가 돈이 많든, 적든,
학벌이 좋든, 그렇지 않든,
한국인이든, 타국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앤이든,
중요하지 않아.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아무 조건 없이 너를 위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살아서 너를 이 곳으로 불렀다는 것.
그것만 믿어주면 된단다.
알겠니?
어서 내게로 들어오렴.”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과 함께 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어떤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이노니아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받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이룹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간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코이노니아를 이룹니다.
코이노니아는 헬라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교제, 사귐, 섬김.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헬라어의 뜻을 깊이 들여다보면, ‘기꺼이’라는 부사가 붙어있습니다.
‘기꺼이’라는 부사가 왜 붙겠습니까?
교제 나누기 힘든 상대라도, 사귀기 싫은 상대라도, 섬기기 싫은 상대라도
기꺼이 교제 나누고 섬겨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리고 코이노니아는 쌍방향적인 겁니다.
한 쪽만 좋아하고, 한 쪽만 섬기는 게 아니라, 둘 다 서로 사랑해주고 섬겨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사람들 사이에선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릴 섬겨야 된다구요?
‘아니,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쌍방향적으로 이루려면,
하나님도 우릴 섬겨야 되는데, 우리가 어찌 감히 하나님의 섬김을 받습니까 그쵸?’
.
.
우리가 이 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예수님의 섬김을 받았거든요?
대신 죽는 것보다 더한 섬김이 어딨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절대 받아볼 수 없는 최상의 섬김을 예수님께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마태복음 20:28 (NKRV)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도 안 되는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늘 아버지를 한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이뤄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좋은 점을 닮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못 박히시기 전,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서로 행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장면을 한번 살펴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장면, 다들 잘 아시죠?
이 자리가 어떤 자리였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유대 문화에선, 식사를 하러 실내로 들어오면 하인이 손님들의 발을 씻겨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만찬의 장소에 하인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구라도 나서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서로 씻겨줘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다 눈치만 보고 있는 겁니다. 섬기기 싫은거죠. 내 옆 사람보다 낮아지기 싫은 겁니다.
심지어 이 자리에서 어떤 말까지 오갔는지 아십니까?
마지막 만찬 장면이 누가복음에도 병행구절로 실렸는데,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22:24 (NKRV)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님이 떡과 잔을 나눠주고 계시는데,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는거예요.
이게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장면인데요. 공생애 시작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46 (NKRV)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사람 참 쉽게 안 바뀌죠?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도 누가 큰지 겨루고, 예수님이 죽으시기 직전에도 누가 더 높은지 비교하는 제자들의 모습.
우리의 모습과 참 닮아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도,
‘왜 나만 쌩고생하고 있냐?
너는?’
지금도,
‘이 일은 내가 안 했으면 좋겠다. 이런 섬김은 저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
.
.
그런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직접 일어나셔서 그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하인이 해야 할 일을 온 세상의 주인께서 행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3:3–5 (NKRV)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우린 잘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12명을 다 씻겨주십니다.
그럼 누구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까?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
이 때 예수님은 이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대적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가룟 유다의 발까지 직접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이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 손톱을 세워서 손톱으로 발등을 꾹꾹 누르셨을까요?
.
.
아마 고개를 푹 숙이시고 눈물을 그 가룟 유다에 발에 뚝 뚝 흘리시며, 티가 나지 않게 세숫물로 유다의 발을 따스히 감싸셨을 겁니다.
.
.
“유다야,, 어찌할 생각이냐..? 이 못난 아들아. 정녕 나를 팔아넘길 거냐? 못난 아들아. 그래 ,,, 이제 너의 일을 하거라. 그럼에도 난 너를 사랑한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서로 섬기려고 하지 않는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손수 씻기시는 섬김을 보이시고는, 벗어놓으셨던 겉옷을 입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완전 벙찐 모습으로 예수님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이때가 상처 나지 않은 예수님의 등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알지 못했을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애굽과 바벨론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섬김이 이루어지는 곳이 시온성이요, 곧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제 너희가 교회 안에서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섬기고, 세상으로 나아가 애굽과 바벨론과 블레셋과 같은 대적자들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의 대적자였던 그들 또한 시온의 문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시편의 기자도 오늘 시편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 87:4–6 (NKRV)
나는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 (셀라)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이방 민족들이 열거되는데, 이상하게도 이들이 시온에서 났다고 합니다.
4절에서 말하는 ‘라합’은 애굽을 상징하는 괴수를 부르는 말인데요.
이 괴물과도 존재들이 어떻게 시온에서 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결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가능합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로마서 6:6 (NKRV)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럼 죄된 옛모습이 죽고, 더 이상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고 서로 사랑의 종 노릇을 하는 멋진 성도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13 (NKRV)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런데 그들이 그냥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들 발로 시온의 문을 찾아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무빙워크가 되어줘야 합니다.
무빙워크가 되어야 한다는게 무슨 말일까요?
그들이 우리를 밟고 우리 위에 서야 시온의 문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더라도 우리는 움직여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을 성실하게 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
.
본 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으라고 부르셨다.”_본 회퍼
예수님이 우릴 부르신 곳은 죽음의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부르신 자리로 갔더니 당황스러울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영광스런 자리인 줄 알고 왔더니, 나더러 죽으라고 하시나..
그런데 여러분.
오늘 3절에서 시편 기자가 교회더러 왜 영광스럽다 칭송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살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 이 교회 밖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던 자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딨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럴 땐, 우리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겉옷을 벗어던지시고 우리 발 밑에 머리를 숙이신 예수님의 등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채찍질 당하신 예수님의 등을 바라보십시오.
그 때 우리가 세상 속 동산교회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길 줄 믿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코이노니아가 우릴 통해 확장될 줄 믿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코이노니아가 확장되면 각 나라와 모든 족속과 방언이 함께 하늘 아버지를 노래하고 뛰어 춤추며 이렇게 고백할 겁니다.
7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시편 87:7 (NKRV)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이 말씀이 꼭 목요영성집회에 나아오신 여러분을 말하는 것 같아요.
우리 아까 예수님 때문에 노래하고 뛰어놀았잖아요 그쵸?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모든 근원은 섬김의 코이노니아가 존재하는 교회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의 종노릇하는 섬김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실 때 라합과 바벨론 같았던 세상사람들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늘 아버지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실 때,
아직 오지 않은 저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될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을 우리 찬양으로 함께 고백합시다.
자리에서 다 일어나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코이노니아”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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