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4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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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
예수의 흔적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다들 휴일은 잘 보내셨나요? 징검다리 휴일이다보니 어떠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저희가 오랫동안 갈라디아서 말씀을 함께 읽었었는데요, 오늘로서 그 마지막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죠? 편지의 마지막은 모든 주된 내용들을 정리하고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대다수이죠.
오늘 말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바울이 줄기차게 이야기했던 것들을 다시금 언급하고 마지막에 인사로 편지를 끝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어떤 내용들을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면서 갈라디아서 내용을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첫 구절은 어떤 내용이 나타나죠? 바울이 본인의 손으로 너희에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딱 이 구절을 보면, 바울이 왜 이런 내용을 적었나 싶기도 할거에요. 큰 글씨로 쓴게 뭐 어떻다고 보라는 건가. 글씨체 자랑하는 건가.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겠죠? 우리야 편지를 쓸 때 정성을 담아 스스로 자기가 작성을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편지에는 대필자가 있었습니다. 불러주면 그대로 받아적는 식이었다는 것이죠.
바울의 서신들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서신들을 대신 기록한 대필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이 본문만 보아도 로마서를 바울이 직접 기록하지 않고 더디오라는 사람을 통해서 대필했다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런데 오늘 11절을 보면 바울 자신이 직접 이 편지를 기록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는 것은 그 글을 읽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게 될까요?
그만큼 자신이 이 편지와 그 내용에 대해 진심으로 전하고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큰 글자로 썼대요. 우리가 문서작업을 할 때 폰트를 크게 해서 쓰는 경우는 보통 뭐에요? 강조할때의 경우죠. 마찬가지로 바울의 이 서신에도 자신이 직접 크게 적었다는 것은 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을겁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이 서신에 특징이 있다고 했었죠? 보통은 바울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서두에 여러 형식대로 글을 작성하지만, 이 갈라디아서 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했어요. 왜냐? 이 편지가 시급하게 전달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당장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공격을 받고 성도들이 시험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시급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형식 없이 빠르게 적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무리하는 오늘의 본문에서도 빠르게 강조하면서 너희가 이 내용들을 중요하게 집중해서 보길 바란다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의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바로 율법주의자들이죠? 그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뭐 때문이래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 뿐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이 지금 할례를 가지고서 너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이런거에요. 처음 율법주의자들이 성도들에게 나아와서 율법을 강조하고, 할례를 강조하는 이 모든 행동들이 그저 말씀을 잘 지키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왜 율법주의자들이 당시에 박해의 위협을 받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누구로부터의 박해일까요?
바로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신약시대때는 디아스포라라고 하죠. 유대인들이 곳곳에 흩어져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원래는 성전에서 한데 모여 예배해야 하지만, 헤롯왕 전에는 성전이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았고, 다들 뿔뿔히 흩어졌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나뉘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가 바로 회당이었죠.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모여 말씀에 대해 나누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당의 문화가 꽤나 이방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죠. 헬라 문화에도 아고라에서 모여 토론하는 문화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지식과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회당에 꽤나 많은 이방인들도 참여하여 관심을 갖고, 심지어는 개종을 하는 경우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등장을 한 거에요. 그들이 회당에 와서 말씀을 자기들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니까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들이 많아진 것이죠.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빼앗긴다고 생각이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고, 그 결과로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대로 사도들이 고발당하고 옥에 갇히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죠.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다 보니, 몇몇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정도 타협을 본 것입니다.
이런 것이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할례를 하도록 하면서 유대인으로 만들고, 기존 유대인들에게 마치 자신들이 위협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주어지는 박해를 타협으로 면하려는 계획이 그들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결국에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고,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었죠.
바울은 이어지는 13절에서 율법주의자들의 또 다른 위선적인 모습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하는 척 하지만, 사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이방 성도들로 하여금 할례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 성도들의 육체로 자신들을 자랑한다는 것이었죠.
이건 무슨 이야기냐, 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할례를 행하며 그들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실적과 같이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보험가입자 실적으로 보험왕 만드는 것처럼, 더 많은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 삼았다는 것이죠.
결국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위선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꼬집은 것입니다. 말로는 마치 자신들이 율법을 너무 소중히 여기고, 그렇기에 무조건 지켜야 할 가치처럼 말하면서도,
실상으로는 박해를 피하고 싶어서, 그들을 통해 자신들을 드높이고 싶어서 할례를 강요하는 이중적인 모습들이 그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어지는 14절을 통해 그와는 반대로 오로지 자랑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또한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자신도 세상을 똑같이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이야기냐, 뭐 세상이 나를 왕따시키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거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구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자신을 못박는 것처럼 핍박하고 괴롭게 하지만, 사실 그것으로 우리가 무너지고 쓰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세상도 그리스도로 다시 살도록 변화시킬 것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과 율법주의자들의 차이를 14절의 말씀으로 드러낸 것이죠. 율법주의자들은 세상의 핍박 속에서 두려워하여 그들과 타협하고, 오히려 세상의 식대로 자신들을 자랑하고 드높이지만,
바울을 비롯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맞서 고통을 받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임을 선포한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강조하는 성도들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세상과 싸워 이겨내고, 그 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모습이죠.
그런데 사실 그 길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을 걷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통들이 수반될 수밖에 없죠.
그러다보니 사실 지금의 교회를 돌이켜보면, 어쩌면 유대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아직도 그 가운데 남아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습들, 어쩌면 나 자신이 편하기 위해 진리를 타협하고, 또 세상의 진리대로 우리를 자랑하는 모습들. 우리 가운데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 재학생들 좋은 학교 가는게 중요하니까 한두번 예배 안나올 수 있지. 그래도 공부해야하니까 그정도 편의는 봐줄 수 있지.
어쩌면 이러한 논리구조 하에서, 우리도 세상이 말하는 거짓 진리들에 우리의 진리들을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그 진리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가치들, 1등이 되어야 한다. 좋은 학교 가야 한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그러한 논리들에게 우리 주님의 자리를 넘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 매일성경 묵상 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열왕기하 내용들 같이 보고 계실텐데요, 그 말씀을 보면, 사실 하나님께서 그 왕들의 죄악된 모습들을 평가하고 나열하시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무조건 이방 우상 숭배하고, 아들 인신제사하고 이런 것만을 죄라고 하시지 않아요.
그저 단순하게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 이방 민족들을 믿은 것. 이런 것들을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사실 당시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별것도 아닐 수 있어요. 산당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 예배하는데 그게 큰 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구요, 외교적 상황에서 다른 나라 의지할 수도 있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지금 상황이면 어쩔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그 문을 열어주게 된다면, 진리를 타협하게 된다면, 우리도 한순간에 죄악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박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우리도 맞서서 세상을 못박고 변화시키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고, 힘들지만 말씀대로 걸어나가는 길. 그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바울은 15절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어갑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하지 않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할례에 대한 논쟁은 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입니다. 할례가 곧 율법 준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것은 바울이 오래도록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한,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할례를 무조건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반대로도 무할례를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할례는 그저 언약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식일 뿐이지, 그 행동을 하냐 안하냐에 따라 그 구원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실제로 바울은 여러 인물들을 교회에 파송하면서, 디도에게는 할례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두었지만,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하도록 했습니다.
왜 서로 다르게 하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두 일꾼들이 사역할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도는 이방인들을 향해 사역했지만, 디모데는 유대인들을 향해 사역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혹여나 할례의 문제로 사역의 대상자인 성도들이 시험들지 않도록 유대인들을 만날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같은 선상입니다. 할례라는 행위 자체는 하든 안하든 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자체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바울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지는 16절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 즉 새로 지으심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리스도를 따라 서로 사랑함으로 행하는 이방인들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이끄시는 기존 유대 성도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도록 축복합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중요하지 않고, 할례가, 무할례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말씀을 믿음으로 새롭게 되어 그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이 중요하다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바울은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도 이 문제로 괴롭게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상당히 시급한 상황에서 걱정과 염려의 마음으로 기록을 했기에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음을 말하죠.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이 겉으로 보이는 할례의 흔적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지만, 사실 자신은 그보다 더 중요한 예수의 흔적이 이미 있음을, 그렇기에 할례와 같은 외적인 흔적 생각하지 말고, 예수를 따라 그 흔적을 새기라고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언급된 예수의 흔적은 무엇이냐? 아마도 바울 자신에게는 실제로 새겨졌던 여러 매질과 고통의 흔적을 가리키는 것일 겁니다. 다만 바울이 이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 모든 상처와 흔적이 예수의 일을 행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못박기 위해 받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8절의 축복으로 모든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할례와 무할례 같은 외적 행동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았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고, 그 자유함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겸손으로 서로 종노릇 하며 짐을 지어주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못박은 것처럼 고통과 슬픔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비참한 아픔이 아닌, 예수의 흔적이 되어 우리 가운데 기쁨과 감사로 자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몇주간 갈라디아서를 함께 보면서, 어쩌면 우리 자신이 새로운 율법주의자가 되어 나 스스로를 행동으로 행위로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함께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걸 못해서 부족한 것 같고, 나는 이걸 못하니 구원받지 못한 것 같고. 이런 생각과 판단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은 바울의 손을 통해 큰 글자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제는 어떤 것들도 우리를 괴롭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꾸 우리에게 행동으로 인한 부족함과 죄책감을 주는 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여 분리시키려는 것이죠.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잖아요. 육체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지 자랑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가지 딱 자랑해야해요! 뭐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구원하셨는데, 왜 혼자 그 십자가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자랑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우리는 그 십자가의 가치를 가진 이들입니다. 그 십자가를 마음껏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고통을 주고 좌절케 하려는 사단의 세력을 주님과 함께 그의 능력으로 못박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평강과 긍휼을 주실 것이고, 우리의 심령 가운데 크신 은혜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함으로 크신 은혜를 누리는 우리 귀한 하임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십자가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 이전까지 세상의 가치들에 매여 외적인 것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변화하기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하셔서 주님 주신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세상을 못박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의 일꾼이 되게 해달라고
여러분의 아픔과 슬픔을 놓고 기도합시다. - 주님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예수의 흔적이 될 것임을 믿기 원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하셔서 고통으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흔적으로 감사하며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재학생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 어쩌면 이들에게는 시험이라는 것이 가장 큰 싸워야 할 고난이요 세상의 가치일 것입니다. 우리 재학생들을 붙들어주셔서 절대 타협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오직 주님의 진리를 붙잡고 승리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 세상의 가치들에 타협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주님의 진리를 지키며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들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진리를 선포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