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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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은 믿음의 표징
탄원은 믿음의 표징
맥락 설명: 경외
맥락 설명: 경외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오늘로써 이제 욥기가 끝이 납니다. 오늘 부분은 이제 욥기의 결론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서 욥만큼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씀하시자 사탄이 “그의 재산을 없애고, 자녀들을 없애고, 자신의 건강마저 없애면 당신에 대한 믿음을 잃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허락 아래 사탄이 여러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처절하게 탄원을 하지요.
신기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욥은 하느님께 탄원을 했지요.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그날!”이라고 말할 만큼 아주 처절하게 탄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탄원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욥기에는 욥의 친구 세 명이 등장하는데, 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종 욥처럼 나에게 올바른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욥이 비록 탄원도 하고 저주도 했지만 그런 말들이 올바른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탄원은 믿음의 표징
탄원은 믿음의 표징
우리의 시각에서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탄원하고 저주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욥이 올바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 감사하거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거나 혹은 하느님께 어떤 청원을 드릴 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모두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라고 치부하지요. 그러나 탄원을 뒤집어서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께 탄원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탄원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실망하고 아무 기대도 하지 않겠지요.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과 같은 이치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탄원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닥친 여러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이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원도 믿음의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너무 큰 고통에 절망하고 하느님께 탄원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의 고통이 너무 커서 하느님께 탄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도 되는 걸까? 혹시 내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욥을 떠올립시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탄원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올바른 행위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이 시간 청합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