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교회 프레임

염광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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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4 (NKSV)
1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골로새서 3:1–4 (NKRV)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요즘 정치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프레임”이라는 용어입니다.
개인에게 어떤 생각이 결정되어지면 그것이 참이든지 거짓이든지, 객관적이든지 주관적이든지 상관없이 그것을 믿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프레임이 결정이 되고 나면 그 프레임에 갇혀서 말하게 되고 결정하게 되고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프레임을 내가 만들기도 합니다.
나는 연약한 사람이야.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야.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야. 이런 프레임을 만들면 관계 안에서 계속 자신을 향한 연민을 느끼도록 행동합니다.
반대로 상대방을 향해 프레임을 만들면 어떤 행동을 하고 말을 해도 자신이 만든 프레임에 끌어 맞추게 됩니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원래 그런 사람인줄 알았어.
자 한번 제가 몇가지 나열해 볼테니 한번 생각 해 보세요.
지적이다.
열정적이다.
말수가 적다.
고집이 있다.
신경질적이다.
위의 사람은 어떤 사람처럼 느껴집니까?
다음 사람입니다.
고집이 있다.
신경질적이다.
열정적이다.
말수가 적다.
지적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처럼 느껴집니까?
사실 같은 사람입니다만 순서를 다르게 했을 뿐입니다.
처음 사람의 대한 평가는 지적인 이미지가 먼저 생겨서 지적인 사람인데 열정도 있고, 말수까지 적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적당하게 고집도 있고 신경적일 수 있다고 좋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의 대해서는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고집쟁이들은 신경질적이고 열심이 많고 말도 없이 무뚝뚝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겠죠.
아마 여러분도 이 두사람을 전혀 다르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 번째 사람은 지적이다라는 프레임이 다른 부정적인 평가를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두 번째 사람은 고집스럽다라는 프레임이 다른 평가를 부정적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저래야지, 교회는 저래야지... 어떤 기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의 이웃들도 주변에있는 교회들을 향해 각각의 프레임을 만들어서 보고 있을겁니다.
이 교회는 어떤 교회, 이 교회는 어떤 교회야 라고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교회를 향한 프레임을 이미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회는 어떤곳이냐,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들이냐?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를 향한 프레임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는 위에 것을 찾는 자들입니다.
1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2장 20절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2장 20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새번역)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교회는 기독교인이기 전에 우리가 경험했던 종교들과 전혀 다르고, 세상이 요구하는 많은 규칙들, 도덕적 요구들, 윤리들 이것들에 얽매여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이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로 이끌어 가는 거짓된 종교, 세상의 요구, 유혹, 심지어 율법까지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함께 그리스도와 죽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새로운 존재인 교회는 이제 땅을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위에 것을 찾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변하지 않는 프레임이 된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을 쌓기 위해 세상과 단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찾으라”라는 말은 “추구하라”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되는데.
끝까지 시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시도하는 방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 이땅을 향해 설정할것인가?
우리가 바라보고 살아가야 곳은 하나님이 계신 영광의 자리입니다.
땅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묘한 속임수에 빠져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면 땅의 것이 풍성 해 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누릴 풍성함을 위해 위를 바라보는 것은 말씀이 요구한 태도가 아닙니다.
말씀은 오히려 3절에서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졌다라고 합니다.
위의 것을 찾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땅에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땅에서 확실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된 구원입니다.
구원이 주는 자유입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이 어마어마한 신령한 프레임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데 교회는 끊임없이 땅의 것을 쫓고 땅의 것을 누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위의 것을 쫓는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우리의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방법과 지혜로는 위의 것을 쫓을 수 없습니다. 이땅의 것도 제대로 쫓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찾는 다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마음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찾고 추구하는 것보다 더 확장된 말씀이 됩니다.
추구하고 찾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 생각, 가치관까지 모두 새롭게 위를 향해 있어야 됨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찾고 추구하고 생각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총체적 모든 것을 하나님을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모든 서신서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을 쫓는 것이지만 육신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육신으로 살아가지만 육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3 (NKSV)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자로 교회의 방향은 이미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육체로 끝마치려고 하는가
갈라디아서 2:20 (NKSV)
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땅을 벗어날 수 없고 이 육신을 벗어날 수 없지만 이제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을 알기전의 옛 질서, 이 땅에서 요구하는 세상원리를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이제는 믿음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계속 이땅에서 해결하던 방식과 술수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그럴까요?
마지막 세번째는 교회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하는 곳입니다.
골로새서 3:3–4 NKSV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아무리 대단한 계획을 세우고 일한다 하더라고 연약하고 부족합니다. 지금도 그 연약함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합될때 우리교회는 완전해질 수 있고, 완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 되지 않습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교회를 보십시오. 훌륭한 교회들입니다.
핍박가운데서 믿음을 지켜나가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각자 다 연약함들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냉랭함이 가득했고,
서머나교회는 비방받고 고난을 당하고,
버가모교회는 믿음없는 모습을 보일 때 있고,
두아디라교회는 용납하지 말아야 될 것을 용납했고,
사데교회는 믿는자의 삶이 없고,
라오디게아교회는 열심이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권고하는 것은
계시록 2장, 3장에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즉 연약한 교회들이 해야 될 일은 성령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땅에서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와 계획들을 교회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4시간 기도하면 됩니까?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예배드리면 됩니까? 물론 해야지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7:13 (NKRV)
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기도하면서 예배하면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열심으로 예배해도 우리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을 옳게 여기려는 기도를 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들을 수 있는 온유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제가 참 존경하고 좋아하는 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기도사역에 온 인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인데.
보통 기도에 심취하신 분들은 확신이 너무 강해서 만나면 무서울때가 있는데
이분은 만나면 너무도 평안해요. 기도제목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이 하시겠지요. 우리는 하나님만 따라갈 수 갈수 밖에요.
마치 기도로 해결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를 하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골로새서 3:4 NKSV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위에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하셔서 우리도 함께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 염광교회를 둘러싼 프레임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오늘 우리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임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여전히 불행가운데 있는 삶이든지, 고통가운데 있는 삶이든지, 만족이 안되는 삶이든지, 답이 없는 삶이든지, 가난한 삶이든지 어떤 삶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의 영광된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이땅의 영광을 쫓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는 삶을 사느라
오히려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오히려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됩니다.
교회는 땅의 영광을 쫓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종교적인 허영심은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숨을 들으시고, 고통을 보고 계시고, 우리의 눈물을 아십니다.
위의 것을 찾으며 겸손하게 세상을 섬기고 있는 교회들의 아픔, 어려움, 고통, 눈물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여서 새로운 프레임을 가지는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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