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열왕기하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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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할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
[서론]
영화 ‘타이타닉’을 기억하시나요? 이 영화에서 제 기억에 강렬히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사람들이 서로 먼저 탈출하려는 아비규환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때 끝까지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멈추지 않던 연주자들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1992년,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분쟁 당시의 일입니다.
빵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던 어느 날, 그 전날의 폭격으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였고, 그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첼로였습니다.
사라예보 관현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그는 전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미복을 입고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습니다.
그의 연주는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무려 22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빵가게 폭격으로 사망한 22명의 희생자 수와 같았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한 위로의 연주를 통해 산 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세르비아 점령군은 발포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살다 보면 인생의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걱정과 두려움에 일상이 무너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은 무엇일까요?
[본론]
오늘 말씀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 왕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잘 순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성경은 그를 유다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좋은 왕'이라고 높이 칭송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주변의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며 패권을 장악한 강대국,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략한 것입니다.
잘 믿는다고해서 고난을 무조건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막아보려 엄청난 양의 조공을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이를 위해 왕궁과 성전에 있는 모든 은과 금을 긁어모아 앗시리아에게 바칩니다.
왕궁의 보물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물들까지 떼어내야 할 정도로 처절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왕의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족, 즉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 왕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반응에 있습니다.
산헤립은 유다의 조공을 받고도 침략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유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겠다'며 더욱 강하게 압박해 옵니다.
앗시리아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 앞에 진을 치고, 그들의 대표인 랍사게가 나와서 심리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의 불신을 조장하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발언을 쏟아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무 힘도 없는 신인 양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18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우리 삶에도 위기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인생에는 원하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건강의 위기, 재정의 위기, 관계의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게 닥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TV를 보면 인생의 큰 위기를 겪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설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젊은 친구들은 아직 큰 위기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변곡점을 많이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직장, 결혼, 자녀 출산 등 삶의 여러 단계에 이르면 위기의 순간은 다르게 찾아옵니다.
지금은 대학입시 실패나 취업의 어려움 정도일 수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 더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고 대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를 만듭니다.
이와 관련해 최선규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당시 잘나가던 아나운서였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3살 된 딸이 소꿉놀이를 하다가 2톤 트럭에 깔리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생방송 중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평소 10분이면 갈 거리가 그날 따라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는 차 안에서 극심한 다급함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불교 신자인 그가 왜 하나님께 기도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차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 아이를 살려주시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딸은 이미 하얀 천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딸을 안고 울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에 걸린 핏덩어리를 빼주자 딸이 다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을 경험한 후, 그는 집에 있던 불상을 치우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큰 위기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히스기야 왕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그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조공이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귀족들과 백성들의 은과 금까지 다 걷어 바쳤을까요?
아니면 몰래 사람을 보내 이집트에 도움을 청했을까요?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앞서 조공을 바치며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을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 선택이 결국 더 큰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선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슬픔과 괴로움의 표시로 자신의 옷을 찢고 베옷을 두른 채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택한 것은 인간적인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동시에 히스기야는 신하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3절에서 히스기야는 신하들을 통해 이사야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며, 백성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의 말을 잘 보십시오.
히스기야는 지금이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아이를 낳으려 하지만 낳을 힘이 없는 산모'에 비유합니다.
이는 그가 절망적인 상황과 자신의 무력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구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4절에서 히스기야가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명예입니다.
그는 랍사게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합니다.
히스기야는 이 전쟁이 단순히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가 걸린 영적 전쟁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구하는 것은 자신의 안전이나 나라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입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히스기야가 예언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중보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물론 히스기야가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함께 기도할 때 더 큰 하나님의 손이 움직인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중보기도의 힘을 믿고 있습니까?
나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그 기도의 끈이 위기 가운데서 자신을 붙잡아 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해외의 위험한 곳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금전적인 후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기도 후원입니다.
중보기도하는 사람들은 마치 우물 속에 내려간 사람을 끈으로 붙들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 줄을 잡아주는 이들이 없다면, 우물 속에 들어간 사람은 위험에 처하고 맙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끊임없이 기도 편지를 보내며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기도 제목을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나누고 있습니까?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라는 말보다 더 겸손한 표현은 없습니다.
물론 자신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부탁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에게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알려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이 우물 속에 들어가 있을 때 그 끈을 단단히 붙잡고 있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중보의 끈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나 혼자 기도할 때보다 함께 기도할 때 더 크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십시오.
히스기야 왕의 기도 부탁에 예언자 이사야는 놀라운 예언을 전합니다.
7절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어떤 영을 보내 앗시리아 왕이 거짓 소문을 듣게 하고, 그로 인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또한 그가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앗시리아 왕은 에티오피아가 자신을 공격하려고 출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랍사게를 철수시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합니다.
이는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연합군을 막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러가면서도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편지를 하나 보냅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는 편지에서 또다시 히스기야를 조롱하고 협박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어떤 신이나 왕도 앗시리아를 막지 못했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히스기야의 믿음을 흔들고 두려움을 심어,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항복을 받아내려는 전형적인 심리전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오히려 더 악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 상황일까요? 위기 속에서 기도한다고 해서 항상 상황이 곧바로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자기자기하며 항복을 선택했을까요?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는 그 편지를 펼쳐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 편지의 내용을 모르실까봐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히스기야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가 겪는 두려움과 위기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문제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가져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문제를 주님 앞에 솔직하게 들고 나가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다 아시겠지' 하며 형식적인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을 다해 마음을 열고 그분께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히스기야처럼 우리의 문제를 그대로 펼쳐 놓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산에 갇힌 안개가 태양의 따스한 빛에 의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 녹아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히스기야의 기도에 주목해 보십시오.
15절에서 그는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자 창조주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그의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어서 앗시리아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는 이 전쟁이 단순히 인간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가 달려 있는 영적인 전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히 요청하는 것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앗시리아가 점령한 나라들의 신들이 나무나 돌로 만든, 참된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들을 이 위기에서 구원하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셔서 온 세상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의 위기 앞에서 결국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열쇠는 바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삶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 깊이에서 나오는 진짜 믿음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원자로 고백하는 믿음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그것은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사는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라는 고백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전쟁의 위기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첼로를 연주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위기 속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연주를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의 위기 속에서 인간적인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생의 여러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첼리스트가 첼로를 켜듯,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솔직히 내어놓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고 우리 삶 속에 놀라운 변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삶이 그분의 뜻에 따라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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