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6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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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배 하는 이유
Hosea 4:11–19 NKRV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14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16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18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19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12절 이스라엘 백성이 왜 나무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면서 그 나무로부터 신탁을 구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며해 주는데 12절을 보면 그 근본적 원인은 그들에게 음란의 영이 가득하여 그 음란한 영으로 인해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고 마음이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루아흐는 단순한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이 아닌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인 영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다시말해 ‘영’을 의미하는 ‘루아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러기에 ‘루아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도, 그분을 섬길 수도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소중한 ‘루아흐’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채우지 않고, 더러운 우상과의 교제 및 우상에 대한 지식으로 채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종으로 붙들려 있던 애굽에서 구출되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고 광야에서는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불평에도 불구하고 물을 주시고 배를 부르게 하시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그들의 삶에 즐거움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만이 즐거움이 되어야 했다. 다시말해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렇지 못하였다.
오늘 본문이 그들의 삶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본문 11절에 음란한 짓과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것은 음행이라는 실제 행위와 술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쾌락이다.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채로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쾌락의 대표로 음행과 술을 이야기 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또 그들은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의지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게 된 이유도 12절에 나오는데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것이 된다. 결국 내가 의지하는 대상을 내가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있고 고민이 있을 때마다 다른 목사님께 묻는다면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에 묻고, 다른 우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을 버린 것과 같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것이다.
또한, 13절에 보면
Hosea 4:13 NKRV
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데 산 꼭대기에서 드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위에서 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 나무에서 제사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이방 신들에게 예배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편했을 것이다. 당시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렸어야 했다. 그러기에 어디에 있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 그들이 각자의 산위에 가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듯 하지만 이방신을 섬기듯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산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나무 그늘이 좋았다는 것이다.
나무 그늘이 좋은 이유는 문자 그대로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편안한 장소 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편한 것이다. 그들이 그들이 산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예루살렘까지 가지 싫은 것이다. 물론 북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사람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편한 것을 찾게 되어 있다. 그것이 본성이다. 누가 힘든 것을 좋아하겠는가? 어렵고 힘든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더 편하고 쉬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래서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도 조금더 편하고 쉬운것, 그리고 즐거운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배도 어떻게 하면 조금더 편리하게 드릴까, 즐겁게 드릴까에 너무 치우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배가 사람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점점 예배가 사람이 중심이 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예배를 고른다. 마음을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맡는 예배를 찾아 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일부로 고행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사람 중심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입맛대로 편리하게 드리는것이 옳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오늘날은 너무나 편한 것만을 추구한다. 교회도 그렇다. 내가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게 맞추려 한다. 그 신앙은 위험하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루아침에 타락했겠는가? 하나님을 버렸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조금씩 타협하고 조금씩 내것을 찾기 시작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당시 우상 숭배 제의가 백성에게 널리 퍼질 수 있엇던 것은 우상 숭배가 자극과 쾌락을 주었기 때문이다. 더운 중동 지방에서 돈네 가까운 작은 산이나 높은 언덕에 우둣 솟은 나무는 사람드렝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다. 그 아래에서 느기는 정취와 즐거운 잔치, 성적 쾌락까지 동반한 제의를 통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할 수 있으니, 율법에 순종하기를 강조하고 중앙 성소에 모여 제의를 드려야 했던 여호와 신앙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신상 앞에서 성행위를 하면 이 것을 본 바알이 자극을 받아 그 신상 앞에서 성교하고 있는 자들에게 다산과 풍요를 준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여러분 예배 가운데 어떤 특별함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무엇을 얻고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시간 모여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내 기분따라 예배를 나오고 안나오고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Isaiah 43:21 NKRV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처럼 여기시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우리가 지금 이자리에 있는 이유와 목적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편한것만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다, 즐거움 만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매주의 예배가운데 어떤 뜨거움, 감동이 없어도 우리는 기꺼이 기쁨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 예배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또 알아야 할 것은, 거룩한 장소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15절에
Hosea 4:15 NKRV
15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것이라면서 유다 백성에게 어떻게 권면하느냐면
길갈로 가지 말고 벧아웬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길갈이 어딘지 아는가?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다. 그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경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기까지 한 곳이다. 그래서 길갈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과 하나님의 약속을 새롭게 다짐하는 너무나 중요한 장소이다. 그런곳을 가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곳에 가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또 벧아웬 을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곳은 벧엘을 말하는 것이다. 벧엘과 벧아웬은 같은 장소이다. 그런데 벧엘은 하나님의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벧아웬은 거짓의 집, 악의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우상숭배와 불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벧엘은 어떤 곳인가? 야곱이 잠을 자다 하나님을 만난 곳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중요한 장소이다. 그런데 그곳에 잘못된 방법으로 제사를 지냄으로서 벧엘이 벧아웬이 된 것이다.
어느곳이 거룩한 곳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 거룩한 곳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떠나지 않는 곳이 거룩한 곳이 되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도 벧아웬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 한명 한명이 온전히 하나님을 마음에 품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거룩한 곳을 찾아 헤메일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 내가 있는 그곳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가?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가?
지금 나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거룩한 공동체 인가?
하나님이 아닌 내 중심이 되면 그것은 거룩한 공동체, 건강한 신앙일 수 없다.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다시 마음을 다해 주님 앞으로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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