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14-15 예수가 복음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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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복음인 이유, 세상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 1장 14-15절, 10장 29-31절
오늘 금요기도회는 교회 부임 후 첫 번째 인도하는데, 무엇을 함께 나눌까? 한주간 동안 고민하다가 나의 삶 가운데 유일한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함께 나누고 기도하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의 삶 가운데 유일한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이나 타종교에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오직 기독교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없이 듣는 단어가 바로 복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무수히 듣고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복음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복음이 무엇이냐?” 질문을 하면 분명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에 대해 절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복음을 믿고 있고, 또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복음에 관해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곳에서 복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지만, 복음에 관해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복음서는 마가복음입니다. 1장 1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사복음서 가운데 이렇게 복음이라는 단어를 멘 앞에 끄집어낸 책은 마가복음 뿐입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76회 사용되었는데, 누가와 요한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마태는 4번, 마가는 8번 사용하였습니다. 마가는 사 복음서 중 가장 짧은 책인데 불구하고 8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마태, 누가, 요한복음이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가는 특별히 복음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 1장 14-15절을 다시 보면,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라고 하면서 복음을 연속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8장 35절과 10장 29절에서도 예수님이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13장 10절과 14장 9절, 16장 15절에서도 “복음이 전파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렇듯 마가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마가는 “복음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 복음이 무엇인지 스스로 답을 찾게 적어놓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에서 마가는 메시아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그분의 행함을 통해,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면,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행함과 삶,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사건, 예수님과 함께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말합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자신의 책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 이 땅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복음이 오기 전에 이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세상은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배반으로 충만해진 시대였습니다. 종교를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새로운 전통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공허와 혼돈이 가득한 세상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어버린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런 시대 한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고, 온갖 질병과 아픔, 그리고 고통과 약함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하나님 나라, 그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어떻게 환영 받는지, 어떻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낼 수 있는지 알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복음을 흔히 ‘Good News, 즉,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어떤 이에게는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나쁜 소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나를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교회는 현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예배를 드릴 때, ‘내게 얼마나 많은 감동을 주는가? 내게 얼마나 많은 기쁨과 재미를 주는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볼거리가 있어야 하고, 설교에는 감동 있어야 하고, 유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값싼 싸구려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정확히 말하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선한소식 또는 좋은 소식’입니다. 누군가에겐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나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신 “때가 찾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 이 강력한 메시지는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이 사실을 동의하지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는 이 소식은 좋은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깨어지고, 정의가 사라져 있고, 상식이 통하지 않고, 위험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알아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이 찾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소식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오셔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차피 이 세상이 좋고, 하나님 나라는 그저 머릿속에 있는 개념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복음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하고 얼마나 깨져 있는지, 얼마나 무너져 가고 있는지를 아는 자들에겐, 정의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에겐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의 슬픔과 고통을 언젠가를 끝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 나라에 불러주셨기 때문에, 이 소식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사람들, 세상의 논리를 따라 강자가 되어서 약자를 억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때가 찾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이 말은 그들에겐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논리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공하고 나만 잘 먹고 잘 살아 이웃과 세상에는 무관심한 자들에겐 복음은 심판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복음은 어떤 소식입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이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 10장 29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즉,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쓰일 당시 ‘복음’은 기독교에서만 통용되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원래 로마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시민들은 ‘복음’을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인식했습니다. 유대 당시 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신의 탄신일은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다” 황제가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황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힘과 권력과 재력입니다. 따라서, 황제의 복음이란? 황제를 따르면 힘과 권력과 재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제의 복음이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가져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야기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라. 돈이 곧 힘이다. 너는 아직 누릴 것이 많다. 아직도 배가 고프다.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이것도 사야하고, 저것도 가져야 한다.” 진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아니라고 아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황제의 복음이 들려오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복음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황제의 복음과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이 시대의 비전과 야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가치관을 따르도록 부르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속에서 질식된 채 살아갔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극히 일부만 성공한 자로 뽑혀가고 나머지 모두는 그저 불행한 인생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속에 묻혀서 세상 방식을 따라 살다가 세상과 함께 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졌습니까?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마태복음 16장과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빌립보 지역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과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은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내가 죽고 부활할 것’이라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무서워서 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3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하는지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시는 이유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한 군데서 나타나는데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즉, 몸값으로 주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대속물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대가로 지불하는 몸값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때로는 우리 자신을 보면, 너무나 혐오스럽습니다. 매일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회개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세상에 팔려 살아가는 종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종이기 때문에 세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조차도 없는 그런 자들입니다. 세상의 포로가 되어 끌려 다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 몸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몇 천 만원, 몇 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몸값이 되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한 죄의 대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몸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달리 한다면, 죽어가는 우리의 심장에 예수님의 심장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몸 값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 27:46) 외치실 때,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낼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를 들어가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살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35절에 보면,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든지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목숨을 바치고 따라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았고 십자가도 지지 않았고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모두 달아나던 자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과 똑같이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번쩍이는 화려한 것에 늘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모두 실패한 자들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경험하고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실제로 생명을 바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평범하고 나와 다를 바 없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 졌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만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낮아지셔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마음에 품으신 분이십니다.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셨던 분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신비이지만, 더 기가막힌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더 낮아지시고 가난하고 형편없고 못난 사람을 만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살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우리들은 이제 이 땅에서의 삶도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낮은 이들의 친구가 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낮은 자에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우리의 말과 행동과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내려면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비밀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 말은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의 말이 무엇입니까? 내 속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나는 그것을 따라 수고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때때로 복음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부림치며 살다가 우리의 힘이 바닥나는 순간,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망이요, 복된 소식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상속이 무엇입니까? 상속이란 부모의 유산을 자녀가 물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나를 하나님은 상속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사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난 다음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롭게 시작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부활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생각할 뿐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워낙 안 읽는데다 읽어도 주의 깊게 보지 않기 때문에 다 나와 있는데도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과 상속받을 것에 별로 기대감도 없고 당장 눈에 보이는 이 땅이 훨씬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버리면 내세의 영생을 상속하지 못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땅에서 권세를 누리는 것을 더 원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과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상속받을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잘 나갈 때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습니다. 이 땅도 꽤 살만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는 결코 고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둠의 세력이 우리를 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어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 시간들이 반드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사탄의 속삭임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지 않으냐고,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다고...”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잠시 지나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이 땅의 삶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살아 갈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게 도우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질 때, 이 땅 위의 질병이든 고통이든 깨어짐이든 어떤 것이든지 의연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복음을 믿어라. 내가 복음이다.” 이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던 우리를 들어가게 만들어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수 없던 우리로 살아내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던 우리를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예수를 더 알아가기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비밀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CCC 대학 선교회를 만드신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주었던 분이 계십니다. 바로 김준곤 목사님이신데, 대학생들이 여름이면 항상 엑스플로 선교대회를 하시는데, 맨 마지막 시간에 100문 1답으로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100가지 질문을 하면 답이 한 가지입니다.
1.오늘 우리머리 위에 하늘을 활짝 열고 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2.우리를 보고 가장 기뻐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3.우리보다 더 높이 뛰시고 더 신나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4.우리에게 발벗고 달려오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5.우리도 질세라 마주보며 뛰쳐나가 안겨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6.이땅의 모든 민족이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7.이땅의 모든 교회가 무릎끓어야 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8.이땅의 모든 통치자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누구십니까
9.모든 민족을 품으시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10.모든 교회의 머리되신 분은 누구십니까
11.내가 알기 원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12.내가 더 알기 원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13.내가 평생 알아가기 원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14.나를 가장 알고 싶어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15.나를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 또한 누구십니까
16.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은 무엇입니까
17.온 지구의 함성이 하나로 외쳐야 하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18.지구 끝까지 외쳐야 하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19.지구가 터져도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20.가장 높은 곳에서 찬양 받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21.홀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분은 누구십니까
22.하늘에 저 별에 이름을 붙이신 분은 누구십니까
23.땅과 바다를 나누신 분은 누구십니까
24.천국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25.나의 죽고 사는 이유가 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26.할렐루야 내가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7.천국의 거룩하신 왕은 누구십니까
28.사단이 두려워하며,사단의 마음을 낙담시키시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29.우리가 사단 눈을 똑바로 쳐다볼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0.사단을 개무시할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1.사단을 개박살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분은 누구십니까
32.우리가 박살내기전에 사단을 누가 먼저 개박살시키셨습니까
33.세상이 모라해도 우리가 생까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4.그런 깡다구는 어디서 나옵니까
35.세상이 내게 돌을 던져도 상관 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6.돌 맞아도 아프기는커녕 실실 웃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7.나의 잔을 넘치게 채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38.나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39.안보이는 나를 보이게 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40.숨쉴수 없던 나를 다시 살리신 분은 누구십니까
41.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42.날 절대 떠나지 않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43.내가 시선을 뗄수 없는.또 내게서 시선을 떼시지 않는 분은 누구십니까
44.어둠이 나를 가릴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절망따위가 나를 꺾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6.환경따위가 나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7.질병따위가 나를 아프게 하지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8.죽음이 나를 묶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9.수많은 나의 기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50.우리의 모든것을 드려야 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51.우리에게 자신의 모든것을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52.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53.우리를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54.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게 하신 이는 누구십니까
55.내 영을 새롭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56.우리가 광야가운데 나아가 설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7.우리의 목이 마르고 눈물이 흘러내릴때도 두 손을 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8.나에게 첫 호흡을 주신 이는 누구십니까
59.내가 나의 마지막 호흡을 드릴 분은 누구십니까
60.내가 있는 곳이 광야이든 푸른 초장이든 함께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61.나를 절대 안 떠난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62.내가 절대 못떠나는 분은 누구십니까
63.하루 온종일 내 생각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64.온종일 나만을 보고싶어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65.나의 목소리와 나의 눈물과 나의 영혼으로 부르던 노래를
또 듣고 또 듣고 싶어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66.지치지 말고 우리의 최선을 다해 뛰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7.때론 내 안에 죄가 날 속이지만 이제 내 안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68.우리를 친히 지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69.나의 이름을 만드시고 불러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70.시간이 지난 후에도 조금도 변치 않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71.한번도 흔들린적 없는 그 사랑은 누구십니까
72.우리가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여야 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73.갈급한 내 영을 채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74.우리가 알기 원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75.우리가 보기 원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76.사자한테 가서 어린양과 뛰어 놀아라라고 말씀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77.어린이 손에 의해 독사굴이 남아나지 않게 만드신 분은 누구십니까
78.이렇게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79.그 나라에서 하루종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80.그 나라의 어제도 왕이요,지금도 왕이요, 영원토록 왕이신 분은 누구십니까
81.그 왕의 자리를 버리고 내가 너무 보고싶어서 이 땅에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82.내 모습이 죄로 인해 보이지 않자 자신의 피로 내 죄를 닦아 내신 분은 누구십니까
83.죽음도 못닦아내리라 했던 죄를 보란듯이 부활하심으로 나에게서
완전히 씻겨내신 분은 누구십니까
84.지금도 날 위해서 무릎으로 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85.날 위해 피투성이 되신 분은 누구십니까
86.날 위해 침묵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87.날 위해 십자가를 택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88.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89.눈물보다 많은 피를 흘려서 나의 죄를 씻기신 분은 누구십니까
90.이 성전 가득 은혜로 채우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91.우리가 영광중에 뵙기 원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92.사단이 두려워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93.우리가 소리높여 찬양하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94.오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심장을 다 모으면 누구의 심장
95.한 영혼도 이 이름을 듣지 못하고 죽으면 안되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96.세상 많은 길 중에 우리가 가야할 길은 무엇입니까
97.세상 많은 말 중에 우리가 할 말은 무엇입니까
98.죄와 어둠이 죽인 내게 생명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99.온 열방의 예배를 받기 합당하신 분은 누구십니까
100.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이 곳 가운데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세세토록 무궁하며,
끝이 없는 찬란한 영광 가운데 온 나라와 백성이 그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의 다스리심을 갈망하며, 그가 오셔서 성전의 마지막 돌을 쌓으실때 비로소 완성되게
하시는 우리의 왕이요, 온 땅의 왕이신
바로 그분, 그분은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
<축복기도>
지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하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복음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심을 믿고 알아가기를 소원하는 주님의 백성들 머리 머리위에 가정과 직장과 삶의 모든 영역위에 나라와 이 민족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