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3:1-6 하나님의 타이밍

여호수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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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3장 1-6, 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이스라엘에게 아주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바톤을 이어받아 그들을 이끌어 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호수아는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여호수아는 말씀을 의지하여 가나안으로 한걸음 전진해 나갑니다.
그리고 지난시간 살펴보았듯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는 과정에서 한 때,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정탐을 무사히 마치게 됩니다. 이 여인의 목숨을 건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라합의 도움을 받은 정탐꾼은 무사히 돌아왔고 확실과 흥분된 보고를 여호수아에게 하였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시간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이해하는 새벽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새벽을 밖에서 맞다보면 어둠이 물러가면서 하늘 끝 저 멀리서 희미한 빛이 서서히 밝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해가 짧아져서 6시 30분 쯤 되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멀리서 하얀 빛으로 동이 터오는 여명이 보이는데 이를 히브리어로 “보케르”라고 합니다. 바로 어둠이 지나면서 새날이 밝아올 때의 그 첫시간, 즉 새벽을 말합니다. 이 새벽은 우리에게 영적인 암시를 줍니다. 어둠이 지나고 새롭게 밝아오는 첫 시간은 단순히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오는 자연계의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는 적어도 새 역사를 눈앞에 두고 시작함으로 어떤 기대를 부풀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 새벽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정탐꾼의 보고를 통해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무언가를 준비합니다. 1절에 보니깐,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요단강으로 가까이 이동합니다. 싯딤에서 요단강까지의 거리는 약 12km 정도 됩니다. 싯딤이라는 말의 뜻은 작대기, 몽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싯딤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해 본다면, 이 장소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생각만 해도 괴로운 장소, 아픔의 장소, 지우고 싶은 장소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면서 지우고 싶은 장소, 추억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청소년 시기가 그럴 것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어려움 시기가 그러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순간을 지우고 싶을 것입니다. 그 괴로운 시간과 장소가 싯딤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날, 그들은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해 40년 동안 방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걸어서 열 하루 길이면 올 거리를,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40년을 방황한 것입니다. 이제 그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새 역사가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지우고 싶은 그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새로운 역사, 새 시대를 향해 한걸음 전진해 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요단에 도착합니다. 사실 요단이라는 지역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한 장소입니다. 신약에도 수없이 나오고, 구약에도 가나안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명의 의미를 정화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선 요단은 “내려놓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 죄악의 짐, 험한 세월과 아픔을 내려놓는 곳, 그곳이 바로 요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는 늘 채찍과 방망이 같았던 괴로운 추억의 장소인 싯딤에서 떠나, 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요단에 도착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시간, 모든 죄악의 짐이 벗겨지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단의 참 뜻입니다.
그들은 이제 요단강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곧바로 건너도록 하지 않고 거기서 삼일 동안 머물게 하십니다.
2절입니다.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사흘동안 어떻게 요단을 건널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구체적으로 지시는 하면서 일부로 삼일을 기다린 다음에 건너라고 명령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3일을 머물라 하셨습니다.
사실 3일은 광야 40년의 세월에 비하면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요단강 근처에서 3일은 너무나 길게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들에게 전혀 생소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강 건너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던 적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 중 장정만 60만 명입니다. 가족의 수를 계산하면, 성경신학자들은 보통 200만 명 이상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말이 200만 명이지, 남양주가 75만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이 지금 요단강 근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군들은 그들을 보고 예의주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3일은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고 하셨습니다. 강은 또 어때했습니까? 지금은 요단강이 그렇게 큰 강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보통 때에 강의 폭이 20-30m, 깊이가 3-4m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곳에 도착한 때는 곡식을 거두는 시기였기 때문에, 강물이 언덕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우기가 막 끝났을 때였고, 겨울 내내 얼었던 헬몬 산의 눈과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하류에 있는 요단강은 일 년 중 가장 물이 넘치는 시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군을 앞에 두고 있었고, 200만 정도의 사람들이 강을 건넌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곳에서 3일을 머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긴장과 갈등 그리고 두려움의 순간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다른 때를 택하지 않고, 요단강의 물이 가장 넘치는 시기를 택해서 이곳에 오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때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좀 더 쉽게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싯딤을 떠날 때, 요단강을 건널 방법을 알려주고, 곧바로 건너게 하실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단강 근처까지 오게 한 다음 3일을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통해서 들어가는 땅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서 들어가는 땅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의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이 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창세기 16장에 이스마엘이 나온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깨지면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수아에게도 이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의 기다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령합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드디어 구체적인 메시지가 관리들을 통해 온 백성에게 하달되었는데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언약궤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만 좇으라’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곳으로 각인되었을까요? 그것은 그 안에 담겨진 물건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 두 돌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돌판을 언약궤 안에 두도록 하였습니다. 이 안에는 아주 중요한 세가지 기념비적인 물건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물건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 십계명을 두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첫째,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그 기적이 왜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민수기 17장을 보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 모세를 지도자로 그보다 3살 많은 형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지 38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사촌 형제 가운데 레위 지파의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왜 모세와 아론만 리더십과 제사장직을 수행하는지 불만을 가지고 족장 250명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습니다(민 16장).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그들을 모두 지진으로 심판하셨습니다. 또 원망하는 백성들이 염병으로 인하여 14,700명이나 죽는 재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각 지파 족장의 지팡이들과 레위 지파 중에서는 아론의 지팡이를 법궤 앞에다 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보니까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고 열매가 맺혀있었습니다(민 17:1-10). 이 반역은 단순히 지도력의 대한 반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동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무섭게 치셨고, 고라 자손을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보이시기 위해, 죽은 지팡이에 살구 가지인 싹이 나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언약궤에 넣도록 명령하셨다. 따라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백성들의 패역함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만나가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내린 것일까요? 만나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엘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백성들은 먹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홍해를 건너게 하신 걸로 끝나는 겁니까? 먹을 것이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먹을 것을 주세요.” 이들은 “빵만 있으면 물만 있으면 하나님을 너무너무 섬길 텐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래 빵만 있으면 너희들이 나를 잘 섬길 수 있다고? 정말 그런가 어디 한번 보자” 확인을 시켜주시는 차원에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밤에 이슬이 내릴 때 함께 내렸고, 그 모양은 작고 둥글고, 서리같이 세미하며, 색은 흰 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만나를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어서 요리하거나, 굽거나 삶아 먹었습니다.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고기를 달라고 하자. 또 고기,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200만 명 이상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39년 11개월 동안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 하는 순간부터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매일 만나를 주셨지만,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온전히 쫓지 않았습니다. 틈만 있으면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황과 출애굽 2세대들에게 신명기 말씀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 40년을 동안 만나를 통해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만나는 먹고 배부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먹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존재라는 것,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고발이 만나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돌판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없어졌고,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새겨 받은 말씀입니다. 첫 번째 돌판이 왜 없어진 것입니까?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2장 7-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그들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춤을 추고 그들 스스로 송아지를 향해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 여호와라”
모세가 그 광경을 보자마자 화가 나서 돌판을 던져 부셔버립니다.
출애굽기 32장 19절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그리고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부숴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타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십계명을 받아 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돌판이 언약궤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는 모두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 물건은 단순히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기적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깨우침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요구 수준에 도달 할 수 없는 본질적인 죄인임을 알려고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이 죄 덩어리인 인간은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열심히 의를 행한다고 해도 결과는 죄 덩어리인 존재가 우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 입니다.
이 언약궤가 지성소에 있을 때 제사장들은 양을 잡아 피를 흘려 담아 와서 언약궤 위에 부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본질상 죄 덩어리인지 상징하는 고발장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이 부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의 천장을 “시은좌”라고 하는데 이것은 은혜가 베풀어져야 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인도하시면서, 요단강을 건너갈 때, 제사장의 어깨에 메여 백성들 앞에 먼저 들어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 그림을 상상하면 신약에 어떤 광경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을 만나 세례를 받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어린양 예수는 죄값을 다 지시고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으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강입니다. 모든 옛 사람이 죽는 곳이며, 옛 습관이 죽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까요? 세례란 죄에 대해서 죽는 다는 고백입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요단강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예수님이 요단강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오시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기 전에 요한은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3:2-6 외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는 의미와 같은 표현을 한 것입니다.
5절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기서 성결하다는 의미는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회개의 메시지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많은 조직과 일들을 준비한다 하더라고 회개가 전제되지 않는 부흥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점점 회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옛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새벽마다 우리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돌아와라. 회개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더 강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뭐 이런 교회가 있어,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맨날 회개나 하라고 하고... 딴 교회 가자!” 이러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소리를 싫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 있으면 정말 죽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지난 날 하나님 앞에 저질렀던, 모습들.... 개인의 회개, 교회 공동체의 회개... 를 해 야 합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그리 바쁘십니까? 왜? 계획과 준비에 바쁘십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정말 죽습니다. 이것은 진짜에요.
어린양 되신 예수님은 친히 언약궤가 되셔서 우리를 앞에 서서 요단강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서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요단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다시 홍해를 건너간 것 같이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해진 후에 떳떳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얼룩지고 누추하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 나와 회개하는 영혼에게 새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는 영혼에게 새 삶을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오늘 이 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합시다.
우리의 마음에 용서와 긍휼을 경험하는 이 밤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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