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7:1-7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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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여호수아 7장 1-7절
여호수아 6장 22-27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 기생 라합의 이야기로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7장에서 아간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6장과 7장은 마치 라합과 아간을 비교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듯 보입니다.
6장 라합은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살아온 기생 출신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기생입니다. 가나안은 극에 달할 정도의 죄를 먹고 마시고 우상을 섬기던 도성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이 기생 라합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팔아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6장 25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이렇게 라합의 인생의 말미가 아름답게 끝나서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명성으로 우리에게 화자되는 인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7장의 아간은 이렇게 끝납니다. 7장 25-26절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오늘까지 있더라” 이것은 라합과 같습니다. 라합도 “오늘까지 거주하였으니...”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는 메시지화 된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두 인물의 인생의 형태는 전혀 다릅니다. 라합은 구원의 소망과 아름다운 생명의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반면, 아간은 저주와 멸망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간 같은 인생의 끝을 맺어야 할지, 아니면 라합 같은 인생의 끝을 맺어야 할지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라합은 이방의 우상 문화속에서 멸망과 저주와 설움과 비통한 인생을 살다가 어느날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고 영광스러운 복된 인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아간은 어떤 인물입니까? 7장 1절을 보면 족보와 함께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여기서 나오는 유다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최고의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아가 올 것을 성경은 누누이 강조했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라는 말은 창송하리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메시지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그만큼 영광스럽고 복된 지파입니다. 이 지파를 비교하고 능가할 지파는 없습니다.
게다가 세라의 증손입니다. 세라는 씨를 뿌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작이 싱싱하고 푸르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의 결실과 열매를 바라보면서 씨를 뿌리는 어떤 기원에 해당하는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삽디의 손자입니다. 삽디는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선물이 아닌 기쁨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아간이 누구입니까? 갈미의 아들입니다. 갈미라는 말은 “열매”라는 말입니다. 그냥 열매가 아니라, 포도나무가 주렁주렁 맺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씨를 뿌리고, 기쁨의 선물이 있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남은 것을 거둔다라는 것입니다. 그 역할이 아간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이름의 뜻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입니다.
아간과 라합의 배경은 전혀 비교가 안 됩니다. 아간은 엄청나게 좋은 가문이 자녀입니다. 하지만, 그 끝은 사고뭉치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였습니다. 반면, 라합은 죄인 중의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끝은 구원을 받아 긍휼함을 입었습니다. 왜 성경기자는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일까요?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어떠한지 우리는 이 두 인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라합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죄 값으로 진노 가운데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였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믿음을 통해서 생명의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아간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그는 도적질을 해서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적질 한 것을 가지고 벌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이 아간의 범죄는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탐심을 관한 단순한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를 깬 것입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 법에 관해 나옵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자’ 라는 뜻입니다. 이 ‘구별된 자’ 라는 말에서 헌신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우리가 헌신이라고 하면 생각하기를 행위를 통해 무언가 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헌신은 어떤 행위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별입니다.
성도는 구별된 존재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이라는 말 속에 가장 중요한 개념은 내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헌신을 무엇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헌신하기 쉽습니다. 그것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헌신은 내가 어떤 존재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헌신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모든 삶의 전 영역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로, 직장에서 상사 또는 직원으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로 구별되어야 하는 가? 에 관점을 두기 시작하면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는 부딪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별된 자였던 나실인이 금해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술 마시지 말 것, 둘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 셋째, 부정한 것,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동물이든지 사람이든지 시체는 죽음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죄 값입니다. 다시 말해 죄값이 어떠한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의 우상과 죄악으로 얼룩져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한 것은 그것들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모든 것은 다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이 원리를 깼습니다. 다시 말해, 죽은 것에 손을 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입었고,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산다 해도 일단 신분적으로 심판과 죄값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쳐진 것, 죽은 것에는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아간이 지은 범죄는 단순하 도둑질이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깬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하기 전에 아간은 이것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삶의 기초를 어디에 뒤어야 하는 문에서 아간이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겉으로는 화려하게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더라도 그 인생의 기초가 그리스도의 구원에 반석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7장 2-3절을 보기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범죄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수의 가치에 의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하신 여리고의 승리에 도취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보니, 여리고 성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약했기 때문에 군대가 다 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힘의 논리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상대가 많든 적든, 우리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딱 한가지 원리만 통할 뿐입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싸움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이성 전쟁을 수의 논리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도덕적으로 흠 없이 사는 것,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갈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상대가 가진 것이 얼마큼이고 내가 가진 것이 얼마큰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며 나아가길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