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8:40-35 에발산의 복음

여호수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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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발산의 복음을 기억하라.
여호수아 8장 30-35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리고성의 대 승리를 통해 자만에 빠졌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만 아이성 전투에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원인을 찾아보니 이스라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아주 뼈아픈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간의 범죄로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가 되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두 차례의 격전을 치른 직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발산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들을 에발산에 세우신 것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8장 30절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에발이라는 지역은 어떤 곳입니까? 이 지역은 세겜 땅입니다. 세겜에 에발산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에발 산에 제단을 쌓습니다. 이 제단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에발 산이라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역은 세겜 땅입니다. 세겜에 에발산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겜은 기억의 장소, 확약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때까지 족장 시대를 이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은 아브라함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두 번째 대표적인 족장은 누구일까? 이삭인 것 같지만, 이삭은 족장이기는 하지만, 대표족장은 아닙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우리는 두 인물을 우선 기억해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대표족장이면서 세겜과 아주 중요한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연관성은 아브라함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며, 이방 땅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하나님이 그의 인생 속에 개입하셔서 그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는 전부 싸 짊어지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 가족이 하란에서 머뭇거립니다. 하란이 어디입니까? 하란은 강을 건너기 직전의 장소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머뭇거릴 만도 합니다. 이 강을 건너면 고향 땅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는데, 어떻게 망설임이 없겠습니까? 그러다가 거기서 머무르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사실상 여기까지는 데라가 주도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데라’라는 이름의 뜻은 뜻밖에도 ‘지연시키는 자’ 입니다. 이런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아브라함의 육신의 아버지를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브라함의 행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적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며 두 번째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다시 아브라함은 전부 싸 짊어지고 길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에 도착하는데, 처음 밟은 땅이 세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아브라함의 가나안 입성을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 12:5) 라고 표현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이 제단을 쌓는 곳이 바로 그 세겜입니다. 그러므로 세겜이라는 지역이 가진 첫째 의미는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셨음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곳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연관성은 야곱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그 이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발뒤끔치를 붙잡는 자, 사기꾼, 도둑, 이런 꼬리표를 갖고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형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야곱을 그냥 두었다가는 아들 둘을 다 잃게 될 것 같아 그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에게 집을 떠나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외삼촌 집에 피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길을 떠나 루스라는 어느 산 중턱에서 밤을 지나게 됩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총총 떠 있고 이슬은 내리는데, 광야는 매우 춥기 때문에 오들오들 떨면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아 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8장 13-25절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길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드디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야곱보다 사기를 잘 치는 사람을 그가 만난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외삼촌 라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그리고 추가로 6년을 총 20년 동안 라반에게 속아 일을 하였습니다.
이제 야곱은 재산도 많이 모았습니다. 4명의 아내와 12명의 아들들과 1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처음에 도착해 제단을 쌓은 곳이 세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우리에게 줍니다. 세겜은 적어도 이스라엘 족장 사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고 회복되었음을 확인하는 땅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돌아온 족장들이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제 두 전쟁을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세겜 땅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 곳은 세겜 땅은 에발 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에발 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신명기 11장 29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그 땅에 들어가거든,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서 서 있는 땅인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여호수아 8장 30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겜 땅을 통해서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이 바로 자신이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백성을 에발 산에 세우셨는데, 그 산은 축복을 선포하고는 땅이 아니고 저주를 선포하는 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에 그들을 데려다 놓고 죽이시겠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 백성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는데, 이것은 백성들이 순종을 잘해서 아니라, 열심히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셔서 라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죽어 마땅한 죄들을 지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조상 때부터 약속하신 그 언약 때문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구원에 대한 중요한 그림을 우리는 역기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내가 열심히 살았거나, 아니면 내가 가진 것이 많거나, 아니면 나에게 어떤 작은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장 큰 근거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해서, 노력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난 수 십년, 아니 인간의 삶에서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 앞에 살아온 세월을 보면, 죽을 일 밖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고발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고발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에발 산의 단입니다. 31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샐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그냥 소제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반드시 어린양의 죽음이 드려져야 되는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이 단에서 드리는데 단을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임한 이 생명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근거는 바로 그 단에 바쳐진 어린양의 공로,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오늘날 교회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교회에 나가 복음을 들어야 합니까?
교회는 철저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현장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이 비틀어지고 왜곡되어서 자꾸 사람의 행위를 강조하고 사람의 공로를 높이는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의 향기가 아닌 사람의 냄새가 나고 인간적인 자랑거리들을 자기고 서로 경쟁하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2천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시공을 넘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삶의 근원이요 시작임을 붙잡고 일어서는 현장이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것이 에발 산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저주 아래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철저히 확인하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보배로운 보혈의 공로를 붙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7장 21-23절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늘 바울 속에 있었던 절망이었고, 오늘날 우리 속에 있는 이중적 절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서 끝났다면 우리에게는 절망과 죽음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소식, 즉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졌습니다. 8장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것이 에발산의 복음입니다. 오늘도 우리 얼룩진 영혼과 눈물, 절망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또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멀리 던지시고 우리에게 죄 없다 하신 속죄의 피가 있기에 우리는 담대하게 예배의 자리에 나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에발 산에 세워졌던 희생제물이고 번제단이었습니다.
찬송가 268장에 가사는 이렇습니다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능력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왜?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까?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더러운 것들이 솟아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본문 8장 34절을 보면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선택하라는 이야기입니다. 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도 그는 모든 백성을 세워 놓고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이것은 선택하라는 이야기일까요? 여기도 복도 있고 저주도 있으니 알아서 택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부모님들이 학생들에게 말할 때, “공부하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밥 먹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이것이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본문 말씀도 이와 비슷합니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말씀하시지만, 이것이 선택하라는 이야기가 아님을 상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결국,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완악한 백성들을 하도 많이 겪으시다 보니, 축복과 저주를 같이 두시고는 이것을 선택하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 여호수아 내내 저주와 복을 함께 기록하신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저주가 하나님의 본 마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축복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일까요? 우리가 말 잘 들으면 축복하시고, 말 안 들으면 가끔씩 손을 대시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이렇게 믿고 있다면,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이 있다고 때를 씁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이에게 “이번에 말 잘 들으면 사줄게” 말을 잘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좋아하는 물건을 사주는 것이 부모의 궁극적인 목표일까요? 철이 덜 든 자식은 부모가 사주면 그것을 받아들고 복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말을 잘 들었더니 축복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정말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각이 커지고 인격이 성숙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서, 아버지가 앞으로 자녀와 함께하려고 그려놓은 그림에 동참할 수준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저주도 물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지만 축복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축복은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늘의 상속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을 좀 더 높여야 합니다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며, 에발 산의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어린양의 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훈련시켜 가시기를 원하는지 깨닫는 철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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