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0:1-6 도피성

여호수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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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는 도피성이 필요하다.
여호수아 20장 1-6절
오늘 우리가 읽은 여호수아 20장은 도피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른 장에 비해 본문이 짧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도피성에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일까요?
여호수아 본문 2절에 도피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이 도피성은 여호수아가 어느 날 자다가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고, 여호수아 자신이 창안한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이 도피성은 모세로부터 이미 계획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하여’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히브리 어원을 찾아보면, [나타르] 라는 단어인데, ‘넘겨주다, 드리다, 주다’ 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는 어떤 사물이나 장소에 대해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깐, ‘정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법률적으로 위임하여 보호하도록 맡기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성경 본문은 도피성에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도피성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도피성이라는 사물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도피성은 언제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제비 뽑을 때, 레위 지파는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 형제들이 각자 성을 하나씩 내줍니다. 이것이 모두 48개인데, 그 중에서 6개를 도피성으로 정합니다. 그러므로 이 도피성의 주인은 실질적으로 레위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팔레스타인 땅 가운데 요단강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요단강을 기준으로 한쪽에 3개씩 모두 6개에 도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상에서 보면 이 6개의 도피성은 아주 기가 막히게 위치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전역 어디에서 사고가 나든지 직선거리로 반나절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도피성이 있는 것입니다. 6개의 도피성이 균형 있게 거리를 유지하여 설정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반나절 안에 도피성으로 피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또 민수기를 보면 이 성으로 가는 길은 봄이 되면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한 번 전부 동원이 되어 빗자루와 곡갱이와 삽을 들고 나와서 항상 길을 보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도망 오는자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도록 ‘피난처’라는 팻말이 보일 수 있도록 보수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언제나 도피성 안으로 빨리 들어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피성은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상 중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인식 속에 ‘높은 곳’은 실제로 높다는 개념이 아니라, 안전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나그네, 과부, 이방인, 심지어 종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은 들어가서 피신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혐의가 확실하면 피신을 시켜주고 그 안에서 모든 의식주를 무료로 해결해 줍니다.
그러면 도피성에 피신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이 늙어서 나이 들어 죽으면 그 사람에게 씌어졌던 죄가 면제됩니다. 그래서 그가 나가도 아무도 그에게 보복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죽어서 나오는 방법입니다. 이 두가지 외에는 도피성에서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 곳일까?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도피성은 가나안 땅 안에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적부터 약속받고 소망하던 낙원이며, 소망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렇게 완전할 것 같던 가나안 땅에 도피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땅에서 살인 보복 등 각종 범죄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도피성에 어떤 사람이 들어갑니까? 성경이 샘플을 보여주고 있는데, 두 사람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나무를 하다가 한 사람의 도끼가 정비가 잘 안 되어 도끼머리를 고정시키는 쇄기가 빠져나간 것입니다. 도끼 자루가 헐렁해진 것을 모르고 내리찍었는데 도끼가 공중으로 날아서 옆에서 같이 나무를 하던 친구의 머리를 찍어 그가 죽었습니다. 신명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닙니다. 현대 용어로 ‘과실치사’ 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이 지금 가나안 땅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피성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지만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 불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죄를 짓고 사고를 칩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가나안 땅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환경에 흠이 있었습니까? 그곳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최초의 인류를 위해 하나님이 완전하게 만들어 놓으신 유일한 공간이요, 흠이 전혀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에덴동산 밖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안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더라도 죄는 인간의 내면에서 생성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최초로 하나님을 거역한 인류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벌거벗은 모습에 수치를 깨닫게 되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햇빛이 나자 그것이 말라서 비틀어져서 소용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드셔서 입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중요한 상징입니다. 인간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여 완전해지는 그날까지 가리고 감추어 줄 것이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다 내보여줄 수 있을 만큼 내면이 깨끗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 아래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성을 두고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거래를 합니다. 무슨 거래냐면, 그 성에 의인이 있다면 살려달라는 거래입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성에 의인 10명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브라함은 처음에 의인 50명을 내겁니다. 그런데 50명을 찾을 수 없자 45명으로 다시 제안합니다. 그런데 또 40명으로 줄입니다. 그렇게 해서 10명까지 갔는데 결국 의인 10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 명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의로운 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 이유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여 우리가 거룩해지고 완전해지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의 수치와 더러움과 아픔을 가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도피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오살한 자, 즉 실수로 살인한 사람입니다. 신명기 19장을 보면, 당시에는 동행 보복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동행이라는 것은 같은 행동을 뜻합니다. 그래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신 19:21)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 한쪽을 상하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눈 한쪽뿐만 아니라 이까지 뽑아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억울해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는 이만, 눈에는 눈만 갚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자비한 법률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을 이해하시고 정해 주신 자비의 법률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피성으로 피했습니다. 그러면 살인을 해서 도망간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그를 죽이겠다고 쫓아간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둘 다 본질상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려지고 덮여 졌을 뿐이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도피성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은혜를 얻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 도피성의 위치가 높은 언덕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안전한 곳입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누더기 같은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인생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도피성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의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슴 한복판에 도피성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높은 산위에 있었지만, 신약의 도피성은 어디입니까? 오라고 해도 가지 못하는 우리의 절망적인 상태를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습을 입고 높은 보좌에서 친히 우리에게 임하여 도피성, 즉 피난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와 긍휼을 입은 존재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도피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 명제에는 우리가 그런 긍휼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입은 존재로서 누군가를 찾아가 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찾아가 주어야 한다는 것은 행위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높고 높은 영광스러운 분으로 죄인의 몸을 입고 나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신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눈물겨운 고난의 삶의 현장으로 낮아져서 다가가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속에 피난처를 만들어 주위에 고통 가운데 있거나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참된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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