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1-14 라합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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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장 1-14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1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백성들에게 믿음의 선포를 한 여호수아는 첫 번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나안의 관문인 여리고성을 탐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탐꾼을 보냅니다. 이 정탐꾼을 영어로는 spy 스파이라고 번역합니다. 두 명을 보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과의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또한 그들은 군사력이나 전략을 통해 이 땅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난 번 말씀 드린대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정복하는 땅입니다. 그들은 지금 막 출애굽 하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무기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전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하면서 1세대는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다 죽고, 출애굽 2세대들로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정탐꾼을 보낸 것입니까?
민수기 13장을 보면, 40년 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지도자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각 지파별로 한 명씩 12명을 뽑아 가나안 땅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정탐꾼을 보내는 목적이 다릅니다. 40년 전에 모세가 스파이를 보낸 동기는 불신이었습니다. 이제 거의 가나안까지 오기는 했는데, 과연 가도 되는지 믿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를 신뢰하기 보다는 우선 현실적인 계산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각 지파별로 한 사람 12명을 뽑아 스파이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똑같은 기간, 똑같은 현장, 똑같은 성을 보고 돌아옵니다.
민수기 13장 32-3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돌아온 정탐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10명의 정탐꾼들의 눈에는 안 될것만 보였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고, 상식적으로 볼 때,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백성들은 밤새 모세 앞에서 원망하고 통곡합니다.
민수기 14장 2-3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원망과 통곡입니다. 맨날 울어요. 하지만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불평의 눈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갔던, 여호수와와 갈렙은 10명의 정탐꾼의 보고와는 완전 다른 보고를 합니다.
민수기 14장 7-8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이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돌로 그들을 치려고 합니다. 여론이 이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의 공동체는 민주주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교회 공동체 가운데 투표도 필요하고 의견도 필요하고 민주적인 방법과 합의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보면 언제나 다수가 이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정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10명의 소리로 백성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는데, 정탐꾼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40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이제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가 출애굽 2세대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꾼을 뽑아서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낸 동기는 모세의 경우와 달랐습니다. 앞에서는 불신의 동기가 되어 참담한 결과로 끝났지만, 그들은 불신이 아니라 전략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하나님이 여리고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후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망도 없습니다. 또한 나중에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호수아는 군사력이나 전략으로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었고, 하나님이 주실 땅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은 필요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가지면 비전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그 비전과 목표에 맞는 전략과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하시고 우리를 늘 인도하시지만, 우리가 방심한다면, 사단을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예배를 방해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려 하면, 읽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그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준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점령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었지만, 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여호수아 2장 1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앞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선포하고 양식을 준비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제적인 준비를 시키는 여호수아의 주도면밀한 면을 살펴보았는데, 여호수아는 이제 3일 후면 공격해 들어갈 이 땅을 두 정탐꾼을 보내어 먼저 준비시킵니다. 그래서 그 땅의 지형과 모형을 머릿속에 입력시켜 돌아와 보고하도록 시켰습니다.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하필 들어간 집이 어딥니까? 기생 라합의 집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기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보면 정확하게 ‘창기’라는 뜻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창기는 몸을 팔아 생계를 잇는 여자입니다. 왜? 하필 두 정탐꾼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것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연이 없습니다. 믿습니까? 저의 목회 사역 속에서, 저는 교회를 이동할 때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거치는 교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곳에 가시게 하신 것일까? 하나님께 묻고, 고민하지만, 그 모든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는 생각이 너무나 많이 듭니다. 그래서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그분들과 지금도 계속 교제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연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러한 인식 속에 살아야 합니다.
왜? 두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많은 집들로 있는데, 하필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책임지던 이 여인의 집으로 들어간 것일까?
여기에 구원의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슬픈 인생을 살아가던 기생 라합은 이제 정탐꾼을 맞이함으로써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리고 왕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탐꾼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집에 들어간 것 까지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에 라합을 소환합니다.
“네 집에 들어가 숨은 스파이를 데리고 와라. 끌어내라” 그런데 여기서 이 여인은 자신의 운명을 건 도작을 합니다.
4-6절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이 여인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논란을 제기 합니다. 라합은 지금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지금 거짓말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성경은 많은 인물들의 거짓말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의 바로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야곱은 거짓말의 명수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런 윤리적인 잣대로 이것이 거짓말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 여인의 행위를 어떻게 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게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명예의 전당과 같은 이 장에 라합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호수아가 못 들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그것도 기생이었던 라합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성경은 라합의 행위를 “믿음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윤리적인 잣대를 가지고 이것이 거짓말이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데 관심이 없으십니다. 윤리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가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이 찾으시는 중요한 신앙의 가치입니다. 거짓말을 했냐 안했나가 아니라, 이것보다 더 높은 기준은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다고 고백하는 신자인가? 아닌가? 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었던, 기생이었던 라합의 믿음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요? 라합은 이스라엘과 함께 살았던 자가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서신을 주고 받은 적도 없고, 직접적으로 율법을 공부하거나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인정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장 8-9절을 읽겠습니다.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방 여인 기생 라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내가 안다” 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해서 40년을 방황했는데, 가나안 땅에 살던 이방 여인이 이 사실을 확신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고백이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라합은 들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소문을 통해서 저 애굽 땅에 400년을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사건을 들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키셨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이가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자기들은 믿지 못해서 40년을 방황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이제 실제로 가나안 땅에서 사는 기생 라합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홍해를 건널 때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너희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간덩이가 녹아내렸다”
그 때 두 정탐꾼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냥 믿고 들어오면 되는 걸, 믿지 못해서 40년을 허비했구나” 그들의 불신앙이 40년의 세월을 허비하게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이 기생 라합은 그저 소문만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이 기생 라합 한 사람뿐일까요? 나머지 가나안 사람들을 듣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담이 녹아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가나안 왕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오직 한 여인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라디오에서 스마트 폰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똑같은 사람이 설교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 말씀은 그저 평범한 말씀입니다. 어제 들었던 말씀입니다.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어떤 이에게 이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고, 삶의 제일 우선 순위이고,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생라합은 구원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 구원의 때를 위해 준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갑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말씀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준비하는 자들에게, 그 말씀을 믿고 그 때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믿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는 너무나 잘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라합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기다렸고, 자기가 고백한 대로 자신의 전 존재를 걸줄 아는 신앙의 용단이 있었습니다.
라함의 집에 두 정탐꾼이 있다는 사실을 안 왕이 라합을 소환에서 그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라함은 감히 가나안의 왕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신앙의 결단입니다. 입술에 발린 신앙이 아닙니다. 라합은 자기가 믿고 고백한대로 자신의 전 존재에 걸었던 것입니다.
이 라합의 신앙을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고보서 2장 25절 “또 이와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야보고가 정의하는 기생 라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디까지 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입술에서 머무는 것으로 끝나면 아니라, 손과 발로 온전히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같은 신앙의 온전한 열매를 드러낸, 라합...
하나님은 이 여인의 인생의 결말을 어떻게 인도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장 1-6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누구의 족보에 라합의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까? 다윗 왕의 시조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방 여인 기생 출신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임했던 이 엄청난 구원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기생 라합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진노 받아 죽을 자들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구원의 복음이 임했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마치 우연인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정확하게 구원을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은 그들에게는 자기의 전 존재를 거는 삶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 생애를 거는 순종과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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