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9:1-6 끌어 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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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대립하지 말고 끌어 안으라.
수 9:1-6, 27
여호수아 9장은 전쟁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엄청난 격동의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가나안 원주민들은 듣고, 보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일곱 족속이 모여서 의논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할 것이냐. 이제 곧 우리 차례인데... 곧 저들이 올 텐데... 우리는 전투하지 말고 동맹체를 구성하자” 쉽게 말하면 그들이 연합군을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한 하나님의 신이 함께한다고 해도 일곱 족속이 함께 연합하고 있으면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
그런데 그 중에 기브온 거민이 “우리는 못하겠다”며 이탈을 하려 합니다. 기브온 거민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성경에서 제일 크고, 용감하고 제일 수가 많다고 묘사합니다. 따라서 연합군에서 기브온 거민이 빠진다면, 주 전력이 빠진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다른 족속들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 기브온 거민들이 먼저 허름한 옷을 어디서 구해 가지고는 변장을 하고 다 떨어진 망태를 하나 준비해서 그 안에 곰팡이 핀 떡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신발도 다 떨어진 것을 신고 이스라엘 족속에게로 투항을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는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당신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하면서 백기를 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가 보니 그들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 같은데 멀리서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행색을 보니 정말 멀리서 여행 온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좋다. 너희들을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들어와서 나무를 패고 물 긷는 것 같은 헤드레일을 하는 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놓고 학자들 간에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브온 족속이 아주 얍삽하게 사기를 쳤는데 그 사기에 이스라엘이 놀아난 것이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말아야 될 사람들을 이스라엘 공동체가 받아들여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해석이 있고, “무슨 소리냐? 그들은 비록 방법은 나빴지만, 생명을 얻기 위해 투항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 해석입니다. 어쨌든, 실제로 그들은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을 놓고 과연 이스라엘 공동체가 기브온 백성들과 조약을 맺은 사건이 성경 전체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7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일곱 족속을 만날 것인데, 그 족속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7장 1-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 그리고 5절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안에 이미 살고 있는 일곱 족속을 향해서 조금도 여지를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완전히 섬멸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들에게 반드시 죽이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에 나옵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을 완전히 진멸하고 뽑아낼 것을 명령하신 이유는 그들을 멸절시키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뽑아낼 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더 넓은 관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가나안 이방 족속의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섞여 죄를 짓다가 하나님을 떠날까 봐, 하나님이 미리 채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신과 가나안의 문화는 더럽고 추잡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이런 더럽고 추잡한 것을 좋아합니다. 안 그럴 척할 뿐이지 속에는 언제나 죄가 있습니다. 죄에 발동이 걸릴 여지가 있으면 바로 자동적으로 발동이 걸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가만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잡초가 무성해져 버리기 십상인 것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나님은 다 겪으셨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말 안 듣고 불순종하고 죄 짓는 데 전문가들인지, 하나님께서 너무 잘 아시는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의 문화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을 섬기는 죄 짓는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체 여지를 남겨주지 말고 멸절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들을 죽이고 멸절하고 뽑아내라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20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사안들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명기 7장에서는 남겨두거나 살려줄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장 10절에서는 전쟁을 하려 할 때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고 하십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이것은 적으로 하여금 종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데 단순히 노예를 삼으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끌어들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단, 그들이 평화를 받아들일 때 입니다. 그런데 12-15절을 보면,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신명기 7장에서는 가나안 일곱 족속의 본류들에 대해 매우 가혹했지만, 20장에서는 많이 너그러워졌습니다.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선언해 봐라. 그리고 그 평화를 받아들이거든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거든 같은 방법으로 죽여도 좋다. 그리고 탈취한 것은 내게 네게 준 것이니 누려라” 그런데 이들은 어디에 있는 사람일까요? 15절을 보면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의 심장부가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지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브온 거민이 이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행색을 멀리서 온 사람처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왜? 심장 한복판의 일곱 족속에게는 여지를 주지 않고 다 죽이게 하시고,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단 평화를 선언하고 그들이 수용하면 함께 지내고, 그렇지 않으면 상종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가나안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도의 인격적인 삶을 말합니다. 이와 똑같은 구조로 설명한 부분이 신약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6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상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말씀 합니다. 소 두 마리를 한 방향으로 일을 시키기 위해 멍에를 얹습니다. 그러면 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묶여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은 운명을 같이하는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명을 같이 하는 일의 대표적인 경우가 있다면, 결혼일 것입니다. 그리고 동업하는 일입니다. 함께 멍에를 멨다가 좋지 않게 끝난 경우가 많습니다. 시작할 때는 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교회만 안 나갈 뿐이지.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착해요”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철학이 다르므로 이익이 발생하면 방향성부터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장 9-10절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사귀라는 말인지, 사귀지 말라는 말인지 헷갈립니다. “사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니” 라는 말에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앞에서 본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삶에서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을 같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살 수밖에 없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섞여 살아 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었는데 사기를 쳤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와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무를 수 있는 것입니까? 주위 사람들이 말리는데 고집을 부려 마침내 결혼을 했는데 석 달쯤 살아 보니 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다 해서 결혼을 무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가지게 되는 삶의 무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족속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그런 식으로 부딪히는 일들이 많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신명기 7장의 “다 죽이라고 하셨다. 다 멸절하라고 하셨다” 는 말씀만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을 향해 이런 대립구도를 가지고 판단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또 예수의 이름으로 세력을 갖는 것이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세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끼리 조직을 만들어놓고, 세상 사람들과 대립구도를 만들고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부담을 주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에 우리를 가로등으로 서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오고가는 사람이 없어도 넘어지지 않는 길을 비추는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소금이 음식에 골고루 뿌려져야 하는데, 한 곳에 뭉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런 대립구도를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과 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세상의 권세를 잡은 어둠의 세력이지, 세상 사람들이 아니에요.
따라서, 기브온 족속과의 화친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양쪽이 다 나쁜 일을 했고,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엎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안고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을 안 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평가받을 만한 기준은 교회의 좌석수, 성도 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치를 두고 계시는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십자가의 짐을 지고 삶에서 그것을 녹여 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두려움이 닥치자, 자기 아내를 적에게 팔아먹었습니다. 그런 한심한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찾아오셔서 설득하시고 인도하셔서 아브라함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소금으로 빛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고단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내 삶의 자리에 오늘도 그대로 서서 눈물로 묵묵히 버텨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조약을 맺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안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마십시오. 주위에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이 있으면 그들에게 의도적으로 잘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비본질적이고 형태적인 것을 가지고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것은, 어떻게 나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사랑으로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설득되고 녹아졌는지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습니다. 기브온은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던 장소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립하지 말고 오히려 세상을 끌어안는 그리스도인, 세상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기억하고 오늘도 꿋꿋이 버텨 삶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제목>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품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통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